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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1 남경성 공략 및 입성에 관한 주의사항 (1937)
●. 황군이 외국의 수도에 입성하는 것은 유사 이래 엄청난 일로서 오래 역사에 남을 실적으로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대사건이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장래의 규범이 될 마음가짐으로 각 부대의 난입, 우군상격, 불법행위 따위를 절대 없게 할 것을 요함.
● 부대의 군기와 풍기를 특히 엄숙하게 하여, 지나 군민으로 하여금 황군의 위풍에 감탄하여 귀복(帰服)시킬 수 있도록 할 것이며, 그 중에서도 명예를 훼손하는 등의 행위 근절을 시도할 것.
● 입성 부대는 사단장이 특히 가려뽑은 자로 편성하여 미리 주의사항, 특히 성내 외국 권익의 위치를 철저하게 숙지시키고, 절대로 과오가 없도록 할 것이며, 필요한 경우 보초를 배치할 것.
● 약탈행위를 하고, 또한 부주의라 하더라도 불을 지르는자는 엄벌에 처할 것. 군대와 동시에 많은 헌병, 보조 헌병을 입성시켜 불법행위를 적발하게 할 것.
[001]-02 현지 신문 기사 01. (현지정부 검열 통과)
동경 일일 신문(東京日日新聞 [日])의 주요기사 중 하나. 일본군 소속인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가, 일본도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001]-03 현지 신문 기사 02. (현지정부 검열 통과)
남경을 향하여 쾌절•백명베기 경쟁
- 가타기리(片桐) 부대의 두 소위, '세키노 마고로쿠(関の孫六)'로 56명을 베고, 집안에서 이어져내려온 보도(宝刀)로 25명을 쓰러뜨리다.
소화 12년 (1937년) 12월 1일. 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상주(常州)에서 본사의 고모토(光本) 특파원
상숙(常熟), 무석(無錫) 사이 40킬로를 6일 안에 돌파한ㅇㅇ부대의 쾌속은 이와 동일한 거리의 무석, 상주 사이를단 3일만에 돌파해 버렸다.
쾌속이랄까 뭐라고 할지 비교할 수도 없는 이 쾌진격의 제1선에 선 가타기리 부대에 '백명베기 경쟁'을 시도한 청년장교가 둘 있다.
게다가 이 경쟁이 무석에서 출발할 때부터 시작되었음에도 한명은 이미 56명을 베고, 다른 한명은 25명을 베었다고 한다.
한명은 도야마(當山) 부대의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야마구치현 구가마치군 가미요무라 출신) 소위, 다른 한명은 동부대의 노다 쓰요시(野田毅, 가고시마현 기모쓰키군 다시로무라 출신)소위이다.
이 두 사람은 무석 입성과 동시에 바로 추격전을 전개했을 때, 누구냐할 것 없이 "남경에 다다를때까지 백명베기 경쟁을 해보지 않겠나"라고 서로 이야기해서, 유도, 검도 3단인 무카이 소위가 허리춤에 찬 칼 '세키노 마고로쿠(関の孫六)를 쓰다듬으니, 노다 소위도 무명이지만 선조로부터 이어진 보도(宝刀)를 자랑하며 서로 경쟁하는 참이다.
무석을 떠난 후 무카이 소위는 부하들을 이끌고 철도선로 북쪽으로 6,7킬로의 선을 대이동하면서 전진했고, 노다 소위는 철도 노선을 따라서 전진하게 되어 일단 둘은 갈라지게 되었는데, 출발한 다음날 아침에 노다 소위는 무석에서 8킬로 떨어진 이름 없는 마을에서 적의 토치카에 돌진하여 4명의 적을 베고 선봉의 영예(先陣の名乗り)를 거뒀는데 이 소식을 들은 무카이 소위는 분연히 일어나서 그날 밤에 횡림진(横林鎮)의 적진으로 부하들과 함께 뛰어 들어가서, 52명의 적병을 베었다.
그 뒤 노다 소위는 횡림진에서 9명, 위야관진(威野関鎮)에서 6명을, 마지막으로 28일 상주역에서 6명을 베어 합계 25명을 베었고, 무카이 소위는 그 뒤 상주역 부근에서 4명을 베고 기자들이 역에 도착했을 때, 이 둘은 역두에서만나고 있었다.
두 소위가 말하길,
무카이 소위-이정도라면 남경은 커녕, 단양(丹陽)에서 내가 백명 정도는 벨 수 있을 걸. 내 칼은 56명을 베었는데 칼날이 상한 데가 한군데 밖에 없다고.
노다 소위-저희는 둘이서 도망치는 적은 베지 않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저는 부관이라서 성적이 오르지
않았습니다만, 단양까지는 대기록을 세워 보겠습니다.
기자들이 "이 기사가 신문에 나오면 아가씨들한테 인기 만점이겠네요"라고 말하자, 80몇 명을 벤 두 용사, 수염 투성이의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부끄러워 하였다.
백명베기 경쟁 후일담
- 86명과 65명 엎치락 뒷치락하는 대접전
가타기리(片桐) 부대의 무카이(向井), 노다(野田)두 소위 통쾌•아수라의 대분전
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소화 12년 (1937년) 12월 4일
단양에서 아사미(浅海), 고모토(光本) 특파원으로부터.
이미 전해드린 대로 남경을 향해서 용감하게 매우 통쾌한 '백명베기 경쟁'을 개시한 가타기리 부대의 두 청년장교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向井敏明), 노다 쓰요시(野田毅) 소위 두 용사는 상주를 출발한 이래 분전에 분전을 거듭하여 2일 오후 6시 단양에 입성했는데, 한쪽인 무카이 소위는 이미 적병을 벤 수 86명에 달하니 노다 소위도 급하게 속도를 올려 성적을 올려 65명을 베어 따라잡으며 서로 엎치락 뒷치락 하는 대접전이 벌어졌다.
이미 두 용사는 상주, 단양의 단 10리 사이에 전자는 30명, 후자는 40먕의 적을 베었으로 장렬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수라와 같은 분전이다.
어쨌든 두 용사 모두 경호철도(京滬鉄道)에 맞닿은 동일 전선상에서 분우진, 여성진, 능구진(모두 단양의 북쪽)의 격전에서 적진에 뛰어들어서는 이리저리 적을 베었는데, 그 중에서도 무카이 소위는 단양성 중정문에 제일 처음으로 뛰어드는 것을 결행하였고, 노다 소위도 오른쪽 손목에 경상을 입는 등, 이 백명베기 경쟁은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기자들이 단양 입성후 쉬지도 못하고 추격하로 떠나는 부대를 따라가니 무카이 소위는 행진 대열 안에서 싱글벙글 거리며, "노다 새끼가 엄청 따라잡아서 멍하니 있을 수 없군. 이정도라면 포용까지 경쟁을 마무리 지을 것 같군. 그렇게 하고 남경까지 제2회 백명베기 경쟁을 할 작정이야. 노다의 상처는 가벼우니까 걱정없어. 능구진에서 벤 적의 뼈 때문에 내 마고로쿠(関の孫六)에 한구석 손상이 생겼지만 아직 백명, 이백명은 벨 수 있다구. 오오사카 마이니치, 도쿄 니치니치 기자들이 심판관이 되줬으면 해. 하하하!" 하고 말하고는 시원스레 떠나갔다.
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소화 12년 (1937년) 12월 13일
남경 입성까지 "백명베기 경쟁"이라는 보기 드문 경쟁을 시작한 예의 가타기리 부대의 용사 무카이 도시아키, 노다 쓰요시 두 소위는 10일에 벌어진 자금산 공략전의 혼잡한 와중에 106 대 105라는 기록을 세우고 10일 전도에 이가 빠진 일본도를 한손에 들고 대면했다.
노다-"이봐, 나는 105인데, 너는?"
무카이-"이 몸은 106이지."
두 소위는 "하하하" 웃었다.
결국 언제 누가 먼저 백명을 베었는지 알 수 없어 결국 "무승부로 치지만 다시 150명은 어때?"라고 바로 의견일치해서 11일부터 슬슬 150명 베기가 시작되었다.
11일 낮에 중산릉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금산에서 한참 패잔병 사냥 중이던 무카이 소위가 "백명베기 무승부"의 전말을 얘기한 뒤, "모르는 사이에 양쪽에서 백명을 넘겼다는 건 유쾌하군. 내 세키노 마고로쿠가 이가 빠진 건 철모를 쓴 놈을 내려쳤기 때문이야, 전쟁이 끝나면 이 일본도는 귀사(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주기로 약속했어. 11일 오전 3시 에 벌어졌던 교전에는 나도 탄우 속을 '에라이, 될대로 되라지'하고 칼을 지팡이 삼아 짚고 서 있었는데 한방도 맞지 않았네. 이것도 이 마고로쿠 덕택이야"
라고 말하며 날아오는 적탄 속에서 106명의 생혈을 빨아들인 마고로쿠를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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