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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수요시위 1000회]20년 전 작은 시위가 세계의 주목 받는 시위로 - “사죄하라, 배상하라.” “잃어버린 내 청춘을 돌려달라.”
7일 정오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선 귀에 익은 구호가 울려퍼졌다. 20년째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 여는 ‘수요시위’ 999번째 행사다. 수요시위는 오는 14일 1000회를 맞는다. 7281일, 만 19년11개월6일간의 투쟁이다.
이날 999차 수요시위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비롯해 전국철도지하철노동조합, 극단 고래, 원폭2세 환우회 등 시민단체와 일반 시민·학생 등 150여명이 참여했다. 강일출·길원옥·김복동·김순옥·박옥선·이옥선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 6명도 함께했다. 일본 취재진도 보였다.
경기 과천고 학생들은 할머니들을 위해 떡을 준비해왔다. 과천고 서영호군(18)은 “위안부 문제가 올바로 해결돼야 한다. 이렇게 집회 현장에 나오는 게 책 10장 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고 의젓하게 말했다. 철도지하철노조 박정규씨(52)는 “20년간 한 가지 주제로 시위를 계속해온 것은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다. 정부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정대협은 “다음주 1000회 수요시위 땐 미국,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에서 연대 집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대협은 14일 정오 일본대사관 앞에서 1000회 수요시위를 연다. 국제앰네스티와 필리핀 세계여성행진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첫 수요시위는 1992년 1월8일 열렸다. 당시 정대협은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위안부 강제연행 인정과 희생자에 대한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선언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1990년대 초반 여성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고,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가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면서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김 할머니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국민 모두가 과거를 잊은 채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일본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999차례 수요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문제 해결을 위한 일련의 성과도 있었다. 1993년 세계인권대회 결의문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포함됐고, 1996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강제노동금지조약에 위배된다고 발표했다. 2003년 7월에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는 일본 정부가 책임질 것을 권고했다. 이제 수요시위는 매주 수많은 시민단체와 어린이·청소년·일반인 등 국내외 시민들이 참여하는 인권·평화교육의 살아있는 현장이 되고 있다. 정대협은 연간 시위 참가 인원을 5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요구사항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일본 의회 사죄 결의,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 7가지다. 이 가운데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8월 일제강점기 위안부·원폭 피해자들이 “정부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한 분쟁을 해결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낸 헌법소원 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6(위헌) 대 3(각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당장 정대협에서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해 일본대사관 앞에 ‘평화의 비’를 세우겠다고 하자 일본 정부는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관할 종로구청도 아직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정대협 측은 “법적으로 ‘비’나 작품은 허가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계획대로 다음주 1000회 수요시위에 맞춰 평화의 비를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지난 19년간의 수요시위를 돌이키며 “위안부 피해자와 여성단체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평화를 위한 노력, 여성폭력 예방을 위한 노력에 눈을 뜬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윤 대표는 “일본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변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노조, 여성, 교육단체가 함께 힘을 모으고 정부도 헌재 결정을 존중해 일본 정부에 문제 해결을 촉구할 것으로 본다”며 “이제 일본이 변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다.
국제앰네스티는 2005년 ‘60년 넘도록 계속되는 기다림’이란 보고서를 내고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여성인권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진옥 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 캠페인실장은 “1000회라는 숫자를 보고 오래된 과거사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며 “특히 전쟁 중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은 지금도 진행 중인 문제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해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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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수요시위 1000회]일본 정부는 우회적 보상 검토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청구권 협정 체결로 위안부 배상청구권 문제도 법적으로 최종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후지무라 오사무(藤村修) 관방장관은 지난 10월11일 “지금까지의 방침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일관계 발전에 공을 들여온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은 최근 들어 우회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외상은 7일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은 해산했지만 이후에도 사업은 할 수 있다”며 “(일본) 외교관들이 한 명씩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얘기를 들으려고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위안부 피해자를 개별적으로 만나 아시아여성기금 방식으로 보상하는 방안을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은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 당시 일본 정부가 발족시킨 민간기구로 이를 통해 각국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방안을 추진해왔으나 한국 시민단체들이 “배상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편법”이라고 반발해 무산됐다. 아시아여성기금은 2007년 3월 해산했다.
한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1000회를 맞는 날인 오는 14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전국행동 2010’(전국행동) 등 일본 시민단체들은 도쿄 가스미가세키(霞が關)에 있는 외무성을 ‘인간사슬’로 포위하는 행사를 벌인다. 이날 낮 12시부터 600명의 참가자들이 1시간 동안 외무성 건물을 둘러싼 채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행사다. 전국행동 회원인 노히라 신사쿠(野平晉作·47)는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평일 낮에 열리는 행사여서 인간사슬에 필요한 인원을 모으기가 쉽지 않지만 시민들의 양심에 호소해 최대한 참가를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사카(大阪)와 나고야(名古屋), 삿포로(札幌), 하마마쓰(浜松) 등지에서도 연대행사가 열린다.
[연합뉴스] 日 지진성금 급감…"원전·독도 영향"
21일 교과서 논란 시점 맞춰 모금 감소세 반전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 약 1주일 동안 폭발적으로 걷히던 구호성금이 21일 이후 눈에 띄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구호단체들은 아이티 지진이나 인도네시아 쓰나미 등 과거 대형 재난사태 때 꾸준히 성금이 걷히던 것과 비교해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28일까지 19억5천만원을 모금한 월드비전은 15~21일 일주일 모금액이 16억3천만원에 달했다. 하루 평균 2억원이 넘는 성금이 답지했다.
그러나 22일 하루 모금액이 6천800만원으로 줄어들더니 23일 3천700만원, 24일 1천700만원, 25일 2천200만원으로 뚝뚝 떨어졌다.
`기아대책'도 지진발생 첫 주에만 전체 모금액 5억5천만원의 69%인 3억8천만원을 거뒀다. 모금 시작 이틀째인 14일 3천900만원이 모였으며 15~16일에는 각각 7천500만원과 7천200만원이, 17일에는 1억4천200만원을 모았다.
그러나 21~23일은 하루 평균 모금액이 3천만원대로 떨어졌으며 25~28일 하루 평균 모금액은 1천만원대에 불과했다.
대한적십자사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대형 구호단체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28일 기준 110억1천만원을 모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17일 하루에만 58억5천만원을 모았으며 18일과 21일에도 14억6천만원, 11억2천만원을 모금했다.
그러나 22일 모금액은 5억4천만원으로 떨어졌으며 23일 1억5천만원, 25일 3억1천만원, 28일 3억원으로 지지부진했다.
구호단체 중 가장 많은 213억4천만원을 모금한 대한적십자사 역시 15일부터 17일 사이 하루에 25억~34억원이 걷혔으나 21일 이후로는 하루 모금액이 10억 후반대로 줄었다.
모금액이 초반 일주일에 집중됐다가 급감한 것은 지진 피해자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성 물질 유출 위험이 두드러진 데다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 주장이 담긴 역사교과서를 채택할 것이라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월드비전 관계자는 31일 "후쿠시마 원전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지진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 것 같다. 여기에 일본 교과서 문제까지 겹치면서 초반보다 모금액이 급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진 피해 모금액이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은 우리 정부가 일본의 교과서 검정에 우려를 표시하는 등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일본 교과서가 논란이 되기 시작한 지난 20일과 거의 일치한다.
적십자사 관계자는 "모금 첫 주와 비교하면 개인 기부 건수는 크게 줄었으며 이번 주 들어서는 일본에 거액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전화도 걸려오고 있다"고 전했다.
tag : 지랄한다, 내가또속을줄알고?, 뒤통수에_칼맞은게_하루이틀이여야지, 이래서_옆집_병신은_답이업ㅂ다, 일단_야스쿠니부터_뿌시고,우요꾸들_구속시키면_믿어주겠음
[경향신문] [수요시위 1000회]“처음엔 숨기고 싶었지만 더 알려야 한다고 생각”- 피해 증언 길원옥 할머니
지난한 세월이 흘렀다. 창밖에는 또다시 겨울, 찬바람이 분다. 아침부터 ‘박카스’와 ‘판피린’을 한 움큼 입속에 털어넣었는데도 온몸 곳곳 쑤시지 않는 데가 없다.
지난 1일 서울 충정로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쉼터 ‘우리집’에서 길원옥 할머니(84)를 만났다. 길 할머니의 방은 쉼터 2층. 방문 손잡이에는 약 봉지가 매달려 있었다. 골다공증과 당뇨 등 지병이 있어 이날 오전에도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전날엔 998차 수요시위 겸 노수복 할머니의 추모제에 참석했던 터라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모르면 더 많이 당하니까, 많이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할머니는 기자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길 할머니의 고향은 평북 희천이다.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보냈다. 만주로 끌려간 것은 열세살 때다. 할머니는 “첫날 당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하루도 쓰라림을 잊어버리고 편하게 살 수 없었다”고 했다. 70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모진 기억이 할머니를 괴롭힌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마리 클레르’ 영국판이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여성 50인’으로 선정할 만큼 씩씩하게 투쟁해왔다. 일본, 미국, 호주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증언했다. 할머니는 “외국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가도 ‘전쟁 없는 나라, 평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왔다’며 증언하고 나면 표정이 달라지고 대우도 달라지더라”고 전했다. 그는 “우리 문제를 알아주는 그들이 힘을 써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수요시위는 14일로 1000회를 맞는다. 길 할머니는 “1000회라고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 늘 하는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며 “사람이 죄를 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잘못을 깨닫고 사죄할 수 있어야 진짜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제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65명밖에 안 남았어. 한 분 떠나실 때마다 속상해. 무서운 일을 겪고 사죄 한마디 못듣고 가는구나 싶어서….”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65명이 다 죽으면 한이 없어질 줄 알지만 오산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길 할머니의 바람은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는 것”이다.
그는 수요시위에 빠짐없이 나간다. “시민들이 정부를 압박하고 정부가 나서야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다. 수요시위에 정기적으로 참여한 것은 8년 전쯤부터다. 처음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불거졌을 땐 창피해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수요시위에 와서 ‘내 잘못이 아니구나’ 깨달았다. 피해 할머니들을 응원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수요시위에 나가길 잘했구나’ 생각한다. 그러면서 “점심 때 하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밥 한 끼 못 해먹이고 보낼 때는 서운한 마음도 든다”고 했다.
길 할머니는 열여덟 되던 해 인천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론 가지 못했다. 서른한살에 입양한 아들은 목사로 성장했다. 할머니는 “열심히 살아서 빚 안지고, 아들이 목사가 돼 손녀도 잘 키우고 있다. 몸이 쓰러지지 않는 한 집회에 계속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1998년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했고, 2004년 ‘여성과 인권’에 증언 기록을 남겼다. 증언집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나이가 먹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자서 밤에 잠이 안 온다. (중략) 자식도 못 낳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건 하나도 못해봤다. 사람 사는 것같이 살지 못하고 어떻게 그냥 누구 말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다. 세월이.”
지난한 세월이 흘렀다. 창밖에는 또다시 겨울, 찬바람이 분다. 아침부터 ‘박카스’와 ‘판피린’을 한 움큼 입속에 털어넣었는데도 온몸 곳곳 쑤시지 않는 데가 없다.
지난 1일 서울 충정로에 위치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쉼터 ‘우리집’에서 길원옥 할머니(84)를 만났다. 길 할머니의 방은 쉼터 2층. 방문 손잡이에는 약 봉지가 매달려 있었다. 골다공증과 당뇨 등 지병이 있어 이날 오전에도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전날엔 998차 수요시위 겸 노수복 할머니의 추모제에 참석했던 터라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모르면 더 많이 당하니까, 많이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할머니는 기자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길 할머니의 고향은 평북 희천이다.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보냈다. 만주로 끌려간 것은 열세살 때다. 할머니는 “첫날 당한 날부터 오늘날까지 하루도 쓰라림을 잊어버리고 편하게 살 수 없었다”고 했다. 70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모진 기억이 할머니를 괴롭힌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마리 클레르’ 영국판이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여성 50인’으로 선정할 만큼 씩씩하게 투쟁해왔다. 일본, 미국, 호주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증언했다. 할머니는 “외국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가도 ‘전쟁 없는 나라, 평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왔다’며 증언하고 나면 표정이 달라지고 대우도 달라지더라”고 전했다. 그는 “우리 문제를 알아주는 그들이 힘을 써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수요시위는 14일로 1000회를 맞는다. 길 할머니는 “1000회라고 다를 것은 하나도 없다. 늘 하는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며 “사람이 죄를 지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잘못을 깨닫고 사죄할 수 있어야 진짜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제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65명밖에 안 남았어. 한 분 떠나실 때마다 속상해. 무서운 일을 겪고 사죄 한마디 못듣고 가는구나 싶어서….”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65명이 다 죽으면 한이 없어질 줄 알지만 오산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길 할머니의 바람은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는 것”이다.
그는 수요시위에 빠짐없이 나간다. “시민들이 정부를 압박하고 정부가 나서야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다. 수요시위에 정기적으로 참여한 것은 8년 전쯤부터다. 처음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불거졌을 땐 창피해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수요시위에 와서 ‘내 잘못이 아니구나’ 깨달았다. 피해 할머니들을 응원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수요시위에 나가길 잘했구나’ 생각한다. 그러면서 “점심 때 하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밥 한 끼 못 해먹이고 보낼 때는 서운한 마음도 든다”고 했다.
길 할머니는 열여덟 되던 해 인천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론 가지 못했다. 서른한살에 입양한 아들은 목사로 성장했다. 할머니는 “열심히 살아서 빚 안지고, 아들이 목사가 돼 손녀도 잘 키우고 있다. 몸이 쓰러지지 않는 한 집회에 계속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1998년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했고, 2004년 ‘여성과 인권’에 증언 기록을 남겼다. 증언집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나이가 먹어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아침 먹고 자고, 점심 먹고 자고, 저녁 먹고 자서 밤에 잠이 안 온다. (중략) 자식도 못 낳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건 하나도 못해봤다. 사람 사는 것같이 살지 못하고 어떻게 그냥 누구 말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넘어갔다. 세월이.”
[경향신문] [수요시위 1000회]“죽기 전에 일본 사죄 받아야지… 정부 무관심 속상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안식처 ‘나눔의 집’ 르포
지난 6일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시골길을 거쳐 비포장도로를 한참 지나자 나눔의집이 보였다. 이곳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8명이 살고 있다. 앞마당에선 ‘단결이’와 강아지 2마리가 놀고 있었다.
“강아지 예쁘지. 얘들 어미가 ‘단결이’인데, 할머니들끼리 단결하자는 뜻에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
강아지 이름조차 단결로 짓다니…. 20년 동안 매주 수요시위를 해오면서 흔들리지 않으려는 할머니들의 의지가 비쳤다.
나눔의집에는 생활관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국제평화인권센터가 있다. 건물 사이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과거를 형상화한 조형물들과 사망한 할머니들을 기념하는 조각상들이 있었다. 생활관 거실에서 할머니 여섯 분을 만났다.
이옥선 할머니(84)는 “우리 명예와 인권을 누가 짓밟았느냐. 우리는 한국의 딸들인데, 정부에서 해결해야지”라고 했다. 그는 “수요시위에서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구호를 외치지만 변한 것이 없어 힘이 빠진다”면서도 “그래도 ‘오늘은 어떤 새로운 소식이 있으려나’ 기대하며 집회에 나간다”고 말했다.
1998년부터 나눔의집에서 살고 있는 김군자 할머니(85)는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작았다. 침대 하나에 장롱, 냉장고, 작은 TV로 꽉 찼다. 벽에 붙어 있는 빛바랜 흑백 사진에 눈길이 갔다. 20대 때 할머니 모습이다. 그때 할머니는 꿈 많은 처녀였을 것이다. 손자의 초상화도 놓여 있다. “봉사활동을 나온 학생들이 꾸며준 거야.” 김 할머니는 마음이 여리고 착했다. 돈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아름다운재단에 기부도 했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사람을 그리워했다. 배춘희 할머니(88)는 “내가 노래도 잘하고 장구도 잘 치고 그림도 잘 그려서 2000년까지 그림치료를 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요즘 찾아오는 손님이 적어서 심심하다”고 했다.
손녀가 만들어줬다는 노란 털실 실내화를 신은 박옥선 할머니(87)는 “유치원 아이들이나 초등학교 1~2학년생 아이들이 오면 여기서 놀고 학습도 하고 우리 얘기도 듣고 하는데, 정말 예쁘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의 방에도 자식과 손자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할머니들은 월·목요일에는 병원에 진찰받으러 가고, 수요일이면 서울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여한다. 화·금요일에는 한 병원에서 찾아와 ‘치매예방 체조’를 가르쳐 준다. 텃밭에 옥수수·배추·상추 등을 손수 심어 가꾸고, 뒷산을 산책하는 것이 소일거리다.
나눔의집엔 6명의 활동가가 상근하고, 1년에 자원봉사자 7000여명이 찾아온다. 4000명가량이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외국인인데 이 중 2000명 정도가 과거를 참회하는 일본인들이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50)은 “대부분 학생들이 주로 오는데, 일회성인 경우가 많다”며 “일반인들의 자원봉사가 저조한 것이 조금 아쉽다”고 밝혔다.
운영비는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받는 월 1200만원, 소액 후원자 600여명이 내는 1200만원가량 등으로 충당한다. 안 소장은 “지금까지는 민간단체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주도해왔지만 이제는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눔의집이 문을 연 것은 1992년 10월이다. 1990년대 초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부각되면서 나눔의집 건립추진위가 발족했고, 불교계를 중심으로 일반시민들의 후원금을 모아 서교동에서 개소했다. 3년 뒤인 1995년 지금의 나눔의집 터를 기증받아 건물을 지었다.
떠나는 길, 박옥선·배춘희 할머니가 현관까지 따라 나섰다. “언제 또 올 건가. 자주 와.”
나눔의집에선 인생의 황혼녘에 들어선 할머니들이 10대 소녀들보다 더 애절한 소원을 안고 있었다. 죽기 전에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한다”는 한마디를 듣는 것이다.
지난 6일 경기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시골길을 거쳐 비포장도로를 한참 지나자 나눔의집이 보였다. 이곳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8명이 살고 있다. 앞마당에선 ‘단결이’와 강아지 2마리가 놀고 있었다.
“강아지 예쁘지. 얘들 어미가 ‘단결이’인데, 할머니들끼리 단결하자는 뜻에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
강아지 이름조차 단결로 짓다니…. 20년 동안 매주 수요시위를 해오면서 흔들리지 않으려는 할머니들의 의지가 비쳤다.
나눔의집에는 생활관과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국제평화인권센터가 있다. 건물 사이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과거를 형상화한 조형물들과 사망한 할머니들을 기념하는 조각상들이 있었다. 생활관 거실에서 할머니 여섯 분을 만났다.
지난 6일 경기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에 위치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에서 박옥선 할머니(오른쪽)와 이옥선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 동상 앞에 서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할머니들이 토해내는 한마디 한마디에 한이 배어 있었다. 강일출 할머니(83)는 “한일협정을 생각하면 피를 토하고 죽고 싶다”고 했다. “위안부 문제 보상도 그때 다 묻어갔어. 누가 보상 받았나. 아무도 못 받았어”라고 했다. 강 할머니는 경북 상주 출신으로 2000년 중국에서 귀국했다. 강 할머니는 “해방되던 해 중국에서 돌아오려 했는데 함경북도에 있는 다리를 건너지 못해 다시 돌아가야 했다”며 “중국에 사는 조카들도 다 죽었다. (잘 대해줬던 조카들이) 꿈에서 자꾸 보이고, 자고 일어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이옥선 할머니(84)는 “우리 명예와 인권을 누가 짓밟았느냐. 우리는 한국의 딸들인데, 정부에서 해결해야지”라고 했다. 그는 “수요시위에서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구호를 외치지만 변한 것이 없어 힘이 빠진다”면서도 “그래도 ‘오늘은 어떤 새로운 소식이 있으려나’ 기대하며 집회에 나간다”고 말했다.
1998년부터 나눔의집에서 살고 있는 김군자 할머니(85)는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작았다. 침대 하나에 장롱, 냉장고, 작은 TV로 꽉 찼다. 벽에 붙어 있는 빛바랜 흑백 사진에 눈길이 갔다. 20대 때 할머니 모습이다. 그때 할머니는 꿈 많은 처녀였을 것이다. 손자의 초상화도 놓여 있다. “봉사활동을 나온 학생들이 꾸며준 거야.” 김 할머니는 마음이 여리고 착했다. 돈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아름다운재단에 기부도 했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사람을 그리워했다. 배춘희 할머니(88)는 “내가 노래도 잘하고 장구도 잘 치고 그림도 잘 그려서 2000년까지 그림치료를 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요즘 찾아오는 손님이 적어서 심심하다”고 했다.
손녀가 만들어줬다는 노란 털실 실내화를 신은 박옥선 할머니(87)는 “유치원 아이들이나 초등학교 1~2학년생 아이들이 오면 여기서 놀고 학습도 하고 우리 얘기도 듣고 하는데, 정말 예쁘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의 방에도 자식과 손자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할머니들은 월·목요일에는 병원에 진찰받으러 가고, 수요일이면 서울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여한다. 화·금요일에는 한 병원에서 찾아와 ‘치매예방 체조’를 가르쳐 준다. 텃밭에 옥수수·배추·상추 등을 손수 심어 가꾸고, 뒷산을 산책하는 것이 소일거리다.
나눔의집엔 6명의 활동가가 상근하고, 1년에 자원봉사자 7000여명이 찾아온다. 4000명가량이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외국인인데 이 중 2000명 정도가 과거를 참회하는 일본인들이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50)은 “대부분 학생들이 주로 오는데, 일회성인 경우가 많다”며 “일반인들의 자원봉사가 저조한 것이 조금 아쉽다”고 밝혔다.
운영비는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받는 월 1200만원, 소액 후원자 600여명이 내는 1200만원가량 등으로 충당한다. 안 소장은 “지금까지는 민간단체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주도해왔지만 이제는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눔의집이 문을 연 것은 1992년 10월이다. 1990년대 초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부각되면서 나눔의집 건립추진위가 발족했고, 불교계를 중심으로 일반시민들의 후원금을 모아 서교동에서 개소했다. 3년 뒤인 1995년 지금의 나눔의집 터를 기증받아 건물을 지었다.
떠나는 길, 박옥선·배춘희 할머니가 현관까지 따라 나섰다. “언제 또 올 건가. 자주 와.”
나눔의집에선 인생의 황혼녘에 들어선 할머니들이 10대 소녀들보다 더 애절한 소원을 안고 있었다. 죽기 전에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한다”는 한마디를 듣는 것이다.
[경향신문] [수요시위 1000회]20년 전 작은 시위가 세계의 주목 받는 시위로 - “사죄하라, 배상하라.” “잃어버린 내 청춘을 돌려달라.”
7일 정오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선 귀에 익은 구호가 울려퍼졌다. 20년째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 여는 ‘수요시위’ 999번째 행사다. 수요시위는 오는 14일 1000회를 맞는다. 7281일, 만 19년11개월6일간의 투쟁이다.
이날 999차 수요시위에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비롯해 전국철도지하철노동조합, 극단 고래, 원폭2세 환우회 등 시민단체와 일반 시민·학생 등 150여명이 참여했다. 강일출·길원옥·김복동·김순옥·박옥선·이옥선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 6명도 함께했다. 일본 취재진도 보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주최로 7일 서울 수송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999차 수요시위에서 길원옥 할머니(오른쪽에서 두번째) 등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경기 과천고 학생들은 할머니들을 위해 떡을 준비해왔다. 과천고 서영호군(18)은 “위안부 문제가 올바로 해결돼야 한다. 이렇게 집회 현장에 나오는 게 책 10장 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고 의젓하게 말했다. 철도지하철노조 박정규씨(52)는 “20년간 한 가지 주제로 시위를 계속해온 것은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다. 정부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정대협은 “다음주 1000회 수요시위 땐 미국,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에서 연대 집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대협은 14일 정오 일본대사관 앞에서 1000회 수요시위를 연다. 국제앰네스티와 필리핀 세계여성행진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첫 수요시위는 1992년 1월8일 열렸다. 당시 정대협은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위안부 강제연행 인정과 희생자에 대한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선언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1990년대 초반 여성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고,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가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면서 사회적 관심을 모았다.
김 할머니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아왔지만 국민 모두가 과거를 잊은 채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일본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999차례 수요시위가 계속되는 동안 문제 해결을 위한 일련의 성과도 있었다. 1993년 세계인권대회 결의문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포함됐고, 1996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강제노동금지조약에 위배된다고 발표했다. 2003년 7월에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는 일본 정부가 책임질 것을 권고했다. 이제 수요시위는 매주 수많은 시민단체와 어린이·청소년·일반인 등 국내외 시민들이 참여하는 인권·평화교육의 살아있는 현장이 되고 있다. 정대협은 연간 시위 참가 인원을 5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요구사항은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일본 의회 사죄 결의,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등 7가지다. 이 가운데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8월 일제강점기 위안부·원폭 피해자들이 “정부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한 분쟁을 해결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낸 헌법소원 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6(위헌) 대 3(각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당장 정대협에서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해 일본대사관 앞에 ‘평화의 비’를 세우겠다고 하자 일본 정부는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관할 종로구청도 아직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 정대협 측은 “법적으로 ‘비’나 작품은 허가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계획대로 다음주 1000회 수요시위에 맞춰 평화의 비를 세울 것”이라고 밝혔다.
1992년 1월8일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제1차 수요시위’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1992년 2월26일 7차 시위에 처음 참석했다. | 정대협 제공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지난 19년간의 수요시위를 돌이키며 “위안부 피해자와 여성단체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평화를 위한 노력, 여성폭력 예방을 위한 노력에 눈을 뜬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윤 대표는 “일본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변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노조, 여성, 교육단체가 함께 힘을 모으고 정부도 헌재 결정을 존중해 일본 정부에 문제 해결을 촉구할 것으로 본다”며 “이제 일본이 변하는 일만 남았다”고 했다.
국제앰네스티는 2005년 ‘60년 넘도록 계속되는 기다림’이란 보고서를 내고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여성인권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진옥 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 캠페인실장은 “1000회라는 숫자를 보고 오래된 과거사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며 “특히 전쟁 중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은 지금도 진행 중인 문제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해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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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수요시위 1000회]일본 정부는 우회적 보상 검토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당시 청구권 협정 체결로 위안부 배상청구권 문제도 법적으로 최종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후지무라 오사무(藤村修) 관방장관은 지난 10월11일 “지금까지의 방침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일관계 발전에 공을 들여온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은 최근 들어 우회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외상은 7일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은 해산했지만 이후에도 사업은 할 수 있다”며 “(일본) 외교관들이 한 명씩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얘기를 들으려고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위안부 피해자를 개별적으로 만나 아시아여성기금 방식으로 보상하는 방안을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은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 당시 일본 정부가 발족시킨 민간기구로 이를 통해 각국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는 방안을 추진해왔으나 한국 시민단체들이 “배상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편법”이라고 반발해 무산됐다. 아시아여성기금은 2007년 3월 해산했다.
한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1000회를 맞는 날인 오는 14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전국행동 2010’(전국행동) 등 일본 시민단체들은 도쿄 가스미가세키(霞が關)에 있는 외무성을 ‘인간사슬’로 포위하는 행사를 벌인다. 이날 낮 12시부터 600명의 참가자들이 1시간 동안 외무성 건물을 둘러싼 채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행사다. 전국행동 회원인 노히라 신사쿠(野平晉作·47)는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평일 낮에 열리는 행사여서 인간사슬에 필요한 인원을 모으기가 쉽지 않지만 시민들의 양심에 호소해 최대한 참가를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사카(大阪)와 나고야(名古屋), 삿포로(札幌), 하마마쓰(浜松) 등지에서도 연대행사가 열린다.
[연합뉴스] 日 지진성금 급감…"원전·독도 영향"
21일 교과서 논란 시점 맞춰 모금 감소세 반전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 약 1주일 동안 폭발적으로 걷히던 구호성금이 21일 이후 눈에 띄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구호단체들은 아이티 지진이나 인도네시아 쓰나미 등 과거 대형 재난사태 때 꾸준히 성금이 걷히던 것과 비교해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28일까지 19억5천만원을 모금한 월드비전은 15~21일 일주일 모금액이 16억3천만원에 달했다. 하루 평균 2억원이 넘는 성금이 답지했다.
그러나 22일 하루 모금액이 6천800만원으로 줄어들더니 23일 3천700만원, 24일 1천700만원, 25일 2천200만원으로 뚝뚝 떨어졌다.
`기아대책'도 지진발생 첫 주에만 전체 모금액 5억5천만원의 69%인 3억8천만원을 거뒀다. 모금 시작 이틀째인 14일 3천900만원이 모였으며 15~16일에는 각각 7천500만원과 7천200만원이, 17일에는 1억4천200만원을 모았다.
그러나 21~23일은 하루 평균 모금액이 3천만원대로 떨어졌으며 25~28일 하루 평균 모금액은 1천만원대에 불과했다.
대한적십자사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대형 구호단체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났다.
28일 기준 110억1천만원을 모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17일 하루에만 58억5천만원을 모았으며 18일과 21일에도 14억6천만원, 11억2천만원을 모금했다.
그러나 22일 모금액은 5억4천만원으로 떨어졌으며 23일 1억5천만원, 25일 3억1천만원, 28일 3억원으로 지지부진했다.
구호단체 중 가장 많은 213억4천만원을 모금한 대한적십자사 역시 15일부터 17일 사이 하루에 25억~34억원이 걷혔으나 21일 이후로는 하루 모금액이 10억 후반대로 줄었다.
모금액이 초반 일주일에 집중됐다가 급감한 것은 지진 피해자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성 물질 유출 위험이 두드러진 데다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 주장이 담긴 역사교과서를 채택할 것이라는 소식이 국내에 전해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월드비전 관계자는 31일 "후쿠시마 원전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지진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 것 같다. 여기에 일본 교과서 문제까지 겹치면서 초반보다 모금액이 급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진 피해 모금액이 줄어들기 시작한 시점은 우리 정부가 일본의 교과서 검정에 우려를 표시하는 등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일본 교과서가 논란이 되기 시작한 지난 20일과 거의 일치한다.
적십자사 관계자는 "모금 첫 주와 비교하면 개인 기부 건수는 크게 줄었으며 이번 주 들어서는 일본에 거액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전화도 걸려오고 있다"고 전했다.
<해당 포스터의 유래를 알면, 왜 이걸 걸었는지 알거임둥 'ㅅ')>
당은 쨉스 거버먼트와 우요꾸 병신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번엔 무슨 회칼을 꽃으려고요 'ㅅ'?
아...그리고, 노다 양반. 립서비스 좀 그만하시라. 내도 주둥이로는 야스쿠니 대딸방도 뿌시고, 포주 쨉스킹 모가지도 딸수 있음.
내가 크게 양보해서, 야스꾸니 대딸방을 니들 손으로 폭파시키고, 개나발부는 우요꾸들을 '일본국 헌법 위반'으로 제제하는 걸 직접 보여주면, 믿어주겠음ㅇㅇ
※ 이건 '일부 관료' 탓이 아니라, 그냥 저동네가 ㅄ임. 한일관계 발전에 공들인거 좋아하시네 'ㅅ'ㅗ
tag : 지랄한다, 내가또속을줄알고?, 뒤통수에_칼맞은게_하루이틀이여야지, 이래서_옆집_병신은_답이업ㅂ다, 일단_야스쿠니부터_뿌시고,우요꾸들_구속시키면_믿어주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