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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역사연구소+당 정치위원회] 과연 동네는 손보기 나름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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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할머니들 힘 모아 ‘쓰레기 동네’ 바꾸자 젊은 이웃이 늘어났다


ㆍ마을공동체 탈바꿈한 서울 시흥5동 ‘암탉 우는 마을’

노후된 주택가인 서울 금천구 시흥5동 218번지 일대는 지난해 ‘암탉 우는 마을’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이곳은 여성들, 특히 60~70대 고령 여성들이 마을을 변화시키는 데 앞장서면서 여성, 아동,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한 서울의 대표적인 동네가 됐기 때문이다.

수년 전만 해도 ‘암탉 우는 마을’은 사람들이 거주하기를 꺼리는 동네였다. 이곳은 2006년 10월 시흥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됐다. 재개발 구역이다 보니 집들을 고치지 않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고, 좁은 골목은 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음식물 찌꺼기와 잡동사니 등도 동네 곳곳에 방치돼 있었다. 특히 공터에는 온갖 쓰레기와 폐자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겨울철에도 파리떼가 윙윙거렸다. 주민들조차 이곳을 ‘소각장’이라고 부르며 지나가기를 꺼렸다.

20년 전 이곳으로 이사왔다는 조화자씨(77)는 “독채 전세가가 1500만~2000만원으로 매우 싸지만 동네가 허름해 젊은 사람들은 잘 살려고 하지 않았다”며 “집주인들은 대부분 타지에 나가 살고, 남은 사람들도 어서 빨리 떠나고 싶어 했던 것이 현실이었다”고 말했다.

지역 환경단체인 숲지기강지기의 김혜숙 대표는 1년 전 우연히 이 동네를 찾았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지난 5일 “1970년대 서울의 달동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서울의 달>의 세트장 같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금천구 시흥5동 218번지 ‘암탉 우는 마을’의 마을텃밭 앞에서 주민들이 동네 이야기를 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 낡고 환경 열악한 달동네… 60~70대 여성들 땀흘리고
시민·학생들이 벽화 그려 안전하고 예쁜 동네 변모
젊은 세입자 속속 이사 와… 서울시 생활녹화 대상에

김 대표는 동네 반장 할머니를 비롯한 여성 노인들을 설득해 마을환경 개선에 나섰다. 먼저 여성 노인 스무명이 앞장섰다. 이들은 지난해 5월 초 회의를 열었다. 가장 먼저 동네 최대의 갈등 요소였던 30년 묵은 쓰레기를 치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낡은 담장에 벽화를 채워 넣어 어두컴컴한 골목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공터에는 공동 텃밭을 만들기로 했다. ‘늙은 암탉’들이 나선 것이다.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마을 구석마다 쑤셔 박혀 있던 쓰레기를 옮기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공터 절반을 차지하는 창고를 치우고 나니 여기서 나온 쓰레기만 1.5t 트럭 두 대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쓰레기와의 전쟁은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렸다.

주민들의 부탁을 받은 자원봉사자들과 인근의 동일여고 미술동아리 학생들은 벽화 그리기 작업을 실시했다. 담장 아래 알록달록한 풀꽃이 피어나고, 모이를 쪼는 암탉과 병아리 등이 곱게 그려졌다.

변화의 핵심은 공동 텃밭이었다. 주민들은 주머니 텃밭 100개를 부지런히 날라 쓰레기가 치워진 공터에 텃밭 울타리를 만들고, 수로를 정비했다. 텃밭에는 상추와 쑥갓, 풋고추, 배추 등의 모종을 심었다.

농작물이 영글어가면서 주민들의 얼굴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무관심했던 주민들은 텃밭에 모여 고구마를 캐고 배추를 수확하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마을 주민 김경남씨(64)는 “쓰레기 앞에서는 냄새나고 모양도 좋지 않아 서로 대화를 못했다”며 “텃밭에서는 뭔가가 쑥쑥 자라는 게 신기해 다들 한마디씩 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서울 금천구 ‘암탉 우는 마을’에서 지난달 28일 어린이들이 벽화가 그려진 담장을 따라 뛰어가고 있다. 벽화는 동일여고 미술반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그렸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돌봐야 할 텃밭이 마련되자 주민들은 욕심이 생겼다. 친환경 농사를 짓기 위해 퇴비를 같이 만들어보고, 꽃과 나무를 가꾸는 화훼 기술을 배웠다. 구청에서 목공 기술을 배워와 텃밭 주변에 놓을 벤치 2개도 주민들이 직접 제작했다.

지역 단체들의 도움을 얻어 할머니들은 한달에 2~3번씩 양말 인형·천연비누·크리스마스 트리 만들기와 같은 문화 강좌를 들었다. 금천 여성복지상담소는 성폭력·가정폭력과 관련한 강좌를 열었고, 봉사단체 푸른금천은 독거노인 생신잔치를 진행했다.

인근 은행나무 어린이도서관에선 골목에서 책을 읽어주는 ‘책수레로 떠나는 골목여행’ 등 모든 세대가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5년째 동네에서 살아온 김정화씨(71)는 “도서관에서 도화지에 색종이를 오려 붙여 그림을 그렸는데 어릴 적에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어서 버리지 않고 갖고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들은 이번 겨울방학 동안 도서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밤 9시에 어르신들을 찾아가 간식을 얻어오라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김현실 도서관장은 “마을은 더불어 사는 곳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라는 뜻이었지만 난생처음 해보는 경험에 일부 아이들은 신발을 바꿔 신고 갈 정도로 긴장했다”며 “서로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동네는 한결 안전해지기 마련”이라고 밝혔다.

열악한 환경을 딛고 주거환경 개선, 다양한 활동 참여 등으로 관계망을 형성해 가는 이 마을은 노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서울시 생활녹화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또 마을공동체 우수 사례로도 선정됐다.

‘암탉 우는 마을’은 이제 다가오는 봄에는 더 많은 사람과 힘을 합쳐 마을 가꾸기에 나설 예정이다. 방범순찰대 초소가 위치한 인근 삼거리에 추가로 텃밭과 화단을 조성, 주민 전체의 광장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회색빛의 굳게 닫힌 방범 초소 역시 협의를 거쳐 낮에도 개방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최근 초소를 밝은 노랑색으로 새 단장하고 동네 소식을 알리는 알림판도 설치했다.

4월부터는 한달에 한번씩 이 광장에서 벼룩시장을 열어 그동안 할머니들이 만든 비누와 양말인형 등을 내다팔 계획이다. 이참에 암탉 로고를 붙여 제품을 브랜드화하는 작업까지 구상하고 있다.

‘암탉 우는 마을’이 생겨난 후 나타난 단적인 변화는 동네의 빈방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예쁜 벽화와 텃밭에 반해 세를 얻는 경우가 많아졌다. 숲지기강지기의 김 대표는 “지난해 한 주민이 몇 년째 1층과 2층 방에 세입자를 구하지 못했다며 하소연했는데 텃밭 조성 직후 모두 세입자를 맞았다”면서 “이는 작고 소박한 것들을 축복이라 믿으며 가슴 열고 함께한 주민들의 힘”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언제 떠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젠 ‘여기서 가야지’라고 생각”


ㆍ시흥동서 43년 거주한 토박이 조남순 할머니

조남순 할머니(81·사진)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만 43년간 거주한 토박이다. 고향은 충남 부여로, 결혼한 후 자녀 교육 등을 위해 상경했다. 산업화·도시화에 쫓겨 서울의 변두리에 정착했지만 이곳에서 먹고사는 문제는 녹록지 않았다.

조 할머니는 시흥동을 ‘제2의 고향’으로 품고 살면서 가족의 죽음과 탄생, 결혼과 같은 큰 일을 수십번 겪었다. 그가 이 마을에서 보낸 세월은 도시의 성장과 공동체의 해체, 그리고 최근 시도되는 공동체 복원 움직임 등 대한민국 도시의 역사와도 궤를 같이 한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대거 유입됐던 1970년 즈음 조 할머니는 남편과 자식 다섯을 데리고 서울에 왔다. 마침 서울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남동생이 있어 시흥2동으로 이사왔다.

“그때 시흥2동은 개천을 따라 판자촌이 즐비했어. 지금이야 개천을 복개해 시흥사거리가 됐지만 그 때는 꽤 큰 하천이었지. 그런데 1977년 큰 물난리가 나 200명쯤 죽었어. 그 물난리 피한다고 다시 이사간 곳이 바로 이곳이야.” 그렇게 해서 그는 1978년 지금의 집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농사 짓던 남편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용직밖에 없었고, 수도 시설이 없어 본인이 직접 물 지게를 지고 산으로 물 길어 다닌 시절이었지만 꽤 행복했다고 조 할머니는 회상했다. 도시에 나와 번 돈으로 난생 처음 집을 샀고, 이웃들과는 소소한 정도 나누며 지냈기 때문이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부동산 붐에 힘입어 동네 여기저기서 헌 집을 부수고 새 집을 짓기 시작했다. 조 할머니는 “앞 집에서 집 짓는 걸 보고 우리도 100㎡가량 되는 터에 현재의 3층짜리 주택을 지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땅이 없어 집을 짓지 못한 이웃들은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났고, 새로 지은 집에는 젊은이들이 들어왔다. 젊은이들은 직장 다니느라 바빴고, 점차 이웃 간 교류가 없어졌다. 특히 할머니 집 앞 공터를 두고 주민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심했다.

집을 짓기에는 부족한 자투리 땅이어서 땅 주인도 버려둔 그곳에 어느 순간 특정인이 사용하는 창고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집을 짓다 남은 폐자재와 음식물 쓰레기 등을 공터 한쪽에 몰래 내다 버렸다. 그렇게 주민들이 모른 척하는 사이 쓰레기 산이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동네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늘 떠나고 싶어했다. 재개발에 적극 찬성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 할머니도 재개발이 확정되면 집을 팔고 깨끗한 동네로 이사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고 했다.

“자식들 다 결혼시키고 남은 방들을 세 놓고 있는데 동네가 지저분하다 보니 싸게 내놔도 사람들이 잘 안 들어오려고 해. 하지만 일단 들어오고 나면 그 전세금 가지고 다른 곳은 못가니 다시 나가지도 못하고 그랬지.” 그러다가 활동가들이 주민들을 찾아와 동네를 바꿔보자고 했을 때 그는 “쓰레기만 치워줘도 소원이 없겠다”며 찬성했다. 주민 회의를 거쳐 공터는 산뜻한 텃밭으로 탈바꿈했고, 벽화가 그려진 동네는 이웃 동네에서 구경을 올 만큼 예뻐졌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텃밭에는 이제 따스한 봄 햇살을 받아 시금치 싹이 조그맣게 움트고 있다. 마치 ‘암탉 우는 마을’의 희망이 된 것처럼. 주민들은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신뢰를 쌓았고, 특히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된 할머니들은 서로 의지하면서 친자매처럼 어울리게 됐다. 텃밭 앞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이제 ‘암탉 우는 마을’의 사랑방이 돼 늘 오후 2시가 넘으면 할머니들이 모이곤 한다. 15년 전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후 생기를 잃었던 할머니 얼굴에는 요즘 말간 웃음이 돈다.

“동네가 깨끗해졌고, 농사 지을 수 있는 땅도 있어서 너무 좋아. 언제 여기 떠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젠 ‘여기서 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재개발되면 땅값이 오른다고 하지만 또다시 정 쌓은 이웃들과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기 힘들잖아. 남은 인생 현재처럼만 지낸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 재작년 첫 손자며느리를 얻었을 때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던 그는 앞으로 태어날 증손자도 이곳에서 안아보고 싶다.




<본 사진은 본문과 관련있을 수도 있고, 업ㅂ을수도 있음. 본인은 건축에 대해 문외한이라...'ㅅ'>


대충 보아하니 1970~80년대양식(?)의 주택인 것 같은데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저런 레트로틱한 주택도 나쁘진 않다는 걸 감안하면,

조금만 손보면 동네도 하기나름이라는 말도 확실함ㅇㅇ




그러고보니, 다음 방한기간때의 개인적 사료채취(?)는 7~80년대 주택이고, 이민오기 전에 관련 가이드북을 샀었었는데, 현재는 소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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