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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수뇌부의 관전평] 졸라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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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 이후 쏟아내는 포스팅이라, 시간간격(?)이 졸라 있을 수 있음요ㅋ

[Saint Winterer`s Finitura Freccia] 엔하위키 부마민주항쟁 항목 보소. 진짜 화가 난다.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6%80%EB%A7%88%EB%AF%BC%EC%A3%BC%ED%95%AD%EC%9F%81#s-8

8 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가? ¶

의외로 4.19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과 달리 부마민주항쟁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다. 실제로 위 세 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념식도 가지지만 부마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기념은 드문 편이고 부산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 정도로 알려져 있거나 아예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흔히 부마민주항쟁은 부마사태로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이의 방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데 서강대 손호철 교수는 부산-경남 지역이 1990년 3당 합당 이후 보수화의 길을 걸으면서 상대적으로 잊혀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3당 합당 이후 자연스럽게 박정희를 계승한 정당을 지지하게 되면서 그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대놓고 이를 옹호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연히 묻어버리는 방향으로 갔다는 지적이다. 박정희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가 존재하고 이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이 부산-경남 지역의 주류 집권 세력이 되면서 그를 전면 부정하는 이 항쟁에 대해서 높게 평가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이승만을 끌어내린 4.19와 전두환을 끌어내린 6월 항쟁과는 달리 직접적으로 독재자를 끌어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자면 시민들의 힘으로 박정희를 직접 하야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잊혀졌다는 의견이 있지만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애초부터 '전두환도 끌어내리지 못하고 유혈 사태로 끝난 5.18은 어째서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는가' 를 생각해보면 된다. 부마항쟁 후에 바로 집권한 세력이 전두환이었고 그에 의해서 다시금 강고한 철권 통치가 이어지면서 항쟁을 주목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거니와 부마항쟁이 일어난지 불과 7달 뒤에 광주에서 대학살이 일어났고 민주화를 추구하던 세력은 믿기 어려웠던 대학살에 더 많은 관심과 부채감(서울역 회군)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5.18을 정신적 지주로 삼은 민주주의 지향의 호남계 정치인과 진보 세력에 묻혔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경상도(보다 정확히는 부마 지역)가 보수 진영에 합류한 것은 삼당합당 이후이고, 그 전에는 민주화 진영에 속하고 있었다. 당시 운동권 중에서도 경상도 출신이 많았으며, 그 중에는 직간접적으로 부마 항쟁을 체험한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의식화의 계기가 5.18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부마항쟁과 5.18의 인지도 차이를 진영 논리와 지역감정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현재의 상황에 입각한 시선이다.

결과적으로 전두환의 철권 통치만 단단히 했을 뿐인 5.18보다 유신체제에 철퇴를 가한 부마항쟁 쪽이 더 확실한 업적을 남겼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부마 항쟁은 후대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 했으나 5.18은 6월 항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부마 항쟁보다 5.18이 가치가 없다거나 하지는 않다. 애초에 진보와 호남계는 5.18을 강조하기는 했을지언정 그로써 부마항쟁의 의의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 한 것은 아니다. 부마항쟁의 인지도 문제는 근본적으로 영남 지역의 현 정치성향과 관련된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진보와 호남계 정권이 아니더라도 현재 보수와 영남계 정권의 입장에선 부마민주항쟁은 딜레마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금의 낮은 인지도는 분명 그 역사적인 의의에 비해서 너무 박한 대접이다. 적어도 부마민주항쟁은 유신 체제의 종말에 가장 큰 역할이 되었으며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사에 한 장을 차지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임에 분명하다.

여담으로 노태우의 주장에 따르면 부산, 마산 사람들은 공수부대 무서운 줄을 알아 피해가 크지 않았지만 광주 사람들은 공수부대 무서운 줄을 몰라서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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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건 뭐라 말해야 합니까?

전에도 부마민주항쟁이 임팩트가 5.18 떨어져서 묻히는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나오다가 수정되었던데

지금은 이것보다 더 심한 것 같은 기분은 뭐란 말입니까?

진짜 부마항쟁을 5.18의 하위호환이라 깔고 보는 태도네 이거 진짜..

+ 반박을 좀 하자면.

1.경남 지역은 원래부터 반민중적 경제구조에서 강도 높은 착취와 빈곤 심화. 1979년 들어서 악화되어버린 부-마 지역의 경제상황 등등이 합쳐서 반독재 진영에 속한 겁니다. 물론 유신체제 억압통치는 너무 당연한거니 논외로 치더라도. 거기에서 경남계 운동권의 의식화의 계기는 5.18이 아니라 YH사건과 김영삼 국회제명사태일텐데 왜 부마항쟁 후에 일어난 5.18이 의식화의 계기가 되었습니까? 부마 항쟁 시기에도 경남 운동권 아저씨들이 아직도 의식이 확립되지 않다고 봐야 하나요?

2.부-마 항쟁은 삼당합당 딜레마로 인해 그 뜻을 이어갈 정치세력의 성립이 어려웠을 뿐. 부마항쟁은 5.18과 6월 항쟁과 연결된 민주화 대장정의 분수령이었습니다. 고친 사람은 왜 5.18만 6월 항쟁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부마항쟁을 깎아내리시려는 겁니까?

3.진보와 호남계가 부마항쟁의 의의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 한 건 아니냐구요? 그럼 김영삼 말기라거나(IMF터졌더라도, 아니 애초에 그 전에.) 김대중-노무현 시대때 부마민주항쟁 특별법을 만들어서 적절한 보상처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때도 딜레마에 허덕이거나 무관심속에 있다가 2011년쯤에 겨우 주목받았습니다. 이래도 부정하거나 은폐하려는게 아니라고 하는건가요?



<사진에 왜곡을 가할 수는 없으니, 뽀글이는 일단 제끼고...(...)>

내가 혹시나 해서 이쪽에선

좀(?) 지명도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관련자료(?)를 스샷으로 가져온 결과,

누가 엔하위키를 편집했는지 몰라도,

참 여러사람 피곤하게 하는데 재주가 있는 양반인덧ㅋ


그냥 이런거 없이도, 중고딩때 졸지만 않았어도 그냥 상식선에서 계보를 그을 수 있는...그러니까, 한국현대사에서의 민주화운동을 그냥 단순히 선으로만 이어보자면, 4.19혁명-부마항쟁-5.18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으로 이어지고, 전의 사건이 없었으면, 앞으로의 사건도 없다는 걸 감안하면, 진짜 뭔 생각으로 저렇게 보란듯이 자랑스럽게 써놨는지 궁금함ㅇㅇ

아까 포스팅도 그렇지만, 암만 위키위키 계열이 학술관련 신빙성은 없다고 가정하고 출발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거 아니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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