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문서는, 2차대전 기간 당시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英])의 연구분석부가 1945년 7월30일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 자살'이란 제목으로 내보낸 보고서인데, 이미 한국일보에서 2014년 4월 25일의 기사로 나온 바가 있는 - 정보공개법으로 시한이 풀린 물건을 단독입수한것처럼 들이대는 기사에 나온 원본이 궁금해서 찾아본 결과, 진짜(!!) 있는 문서라, 먼저 보신 분들이 있겠지만, 자료수집 및 보관용으로 포스팅함을 밝힙니다.
원문 주소는 http://www.foia.cia.gov/sites/default/files/document_conversions/89801/DOC_0000709802.pdf이니, 관심있으신 분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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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자살특공대가 불 댕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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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CIA 비밀 문서 입수
"야스쿠니 신사서 영생 믿음이 무모한 가미카제 자살 내몰아
전멸시킬 만한 치명적 무기만이 일본 항복 선택하게 만들 것"
보고서 일주일 만에 원폭 투하
야스쿠니(靖國) 신사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임을 보여주는 2차대전 당시 미군 자료가 24일 공개됐다.
한국일보가 정보공개법(FOIA)에 근거한 정보공개 요구로 중앙정보국(CIA)에서 단독 입수한 2차 대전 비밀문서에 따르면 미군은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군의 정신적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의 연구분석부가 1945년 7월30일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 자살' 보고서를 보면, 먼저 2차 대전 막바지에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일본군이 항복 대신 자살공격과 자살방어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전세가 이미 기울고 독일까지 패망한 상태였지만 일본 군부는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일본군의 이 같은 정신세계 분석에 착수, 그 근원적 배경에 일본 도쿄에 소재한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더구나 일본군 사령부는 병사들에게 죽어서 영생할 수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묻힐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자살공격을 적극 조장하며 이를 전략으로 확대시켰다. 이에 따라 미군은 일본인의 완전소멸 또는 국가존속이 위협받아야만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결국 이 판단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가 작성된 지 일주일 뒤인 8월 6일 미군 폭격기 B-29가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출현, 원자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이다.
자살공격을 군사전략으로
보고서는 미군의 본토 섬 진격을 앞두고 일본이 최후의 1인까지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먼저 자살을 무기로 공격과 방어를 하는 일본군의 정신세계를 분석했다. 분석에 따르면 여기에는 일본군의 명예로운 죽음에 대한 세뇌와 이를 공격무기로 이용한 군부지도자의 판단이 작용했다. 당시 일본군은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서 숨지는 것을 최대 명예로 배우며 죽음에 대비해 훈련을 받았다. 이 같은 세뇌와 함께 전쟁에서 오는 긴장, 포로가 됐을 경우 고문에 대한 공포심, 집단에서 느끼는 의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일본병사들을 압박했다.
그러나 일본군 지도자들은 이런 병사들의 심리를 공격무기로 최대한 이용하려 했다. 보고서는 "당시 일본 군 지도부가 미국의 압도적인 공격에 대항에 맞설 기본적 방어무기로서 일본군의 자살 감행능력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군부는 원래 일본제국의 병사들에게 하나의 전술로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 할복하거나, 일왕 만세를 외치며 적진으로 공격하는 '반자이 돌격'을 하도록 교육했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 군부는 이 같은 개념을 확대 발전시켜 병사들의 자살을 이용한 공격을 새로운 군사전략에 포함시켰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자살공격과 자살방어
OSS는 이 같은 자살 군사전략이 실행된 사례로, 일본 공군 조종사가 전투기를 무기로 삼아 미 군함을 들이 받는 '가미카제'와 폭격기가 투하하는 1톤이 넘는 폭탄에 직접 올라타고 표적을 향해 조종해 돌진해가는 '바카(바보)' 공격을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했다. 당시 일본군은 이외에도 다양한 자살공격 방법을 동원했는데, 해군의 경우 소형보트에 폭발물을 잔뜩 싣고 미 군함과 충돌하거나, 등에 어뢰를 묶고 헤엄쳐 미군 상륙정이나 수송선을 폭파시킨 경우가 있다. 미군은 오키나와 인근 케라마섬에서 폭탄으로 무장된 300개의 일본군 고속정을 확보하기까지 했다. 또 일본 육군은 폭발물을 몸에 지닌 채 미군 탱크를 공격하거나 미군의 진지로 뛰어들어 자폭하는 방법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약 70년 전 일본군이 사용한 이런 무자비한 공격은 현재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자살폭탄 테러와 거의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살을 공격뿐 아니라 방어 수단으로도 이용했다고 OSS는 보고서에서 밝혔다. 전투에서 패배가 확정되기 앞서 장교는 일장도로 배를 가르는 할복자살을 하고, 병사가 아랫배에 수류탄을 터트려 자살하는 게 그런 사례다. 또 일본군 수백 명이 마리아나 섬과 오키나와의 절벽에서 바다로 투신해 자살하거나, 공격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병사들이 죽창을 들고 기관총이 쏟아지는 미군 진지로 진격해 최후를 맞이하는 행위도 마찬가지 방어수단으로서 자살을 이용한 경우라고 보고서는 언급했다.
야스쿠니 영생 약속이 자살 이유
보고서는 일본군이 이처럼 자살의 길로 쉽게 동원되는 배경을 추적한 끝에 야스쿠니 신사가 그 정점에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물론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군사 기초훈련 때부터 죽음을 무사의 길로서 가르치고, 일왕을 위한 죽음을 명예로 세뇌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혼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일본의 수호신으로서 영생한다고 약속했다. 당시 일본의 전쟁장관은 "일왕이 다스리는 우리 제국의 영토와 함께 제국의 조상들의 혼이 모셔진 곳(야스쿠니 신사)은 끝까지 수호해야 한다"면서 "적의 침략을 물리치는데 있어 모든 것을 바치고, 또 죽어서도 혼으로 제국을 지킬 것"을 훈계한 일도 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모로타이섬에서 자살임무를 부여받은 한 병사는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키들을 최대한 많이 죽이고, 나를 파괴해 큰 공을 세우겠다"며 "나를 보고 싶다면 야스쿠니 신사로 오십시오"라고 적었다. 또 다른 병사는 자살임무를 하루 앞두고 쓴 일기장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내 조국을 수호하는 혼 이 될 수 있어 기쁨이 가득하다"고 기록했다.
미군의 카드는 일본전멸 위협
OSS는 일본군이 병사들에게 야스쿠니 신사를 내세워 자살공격으로 내모는 것이 실은 연합군의 희생자를 최대한 늘리기 위한 것이라며 그 피해의 심각성을 고민했다. 더구나 일본군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의 변경을 시도하며, 미군이 본토 섬으로 진격해오면 민간인들도 최후까지 버티는 저항을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보고서는 "일본군 사령부가 자살전략을 최대한 이용키로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OSS는 병사들이 자살공격을 계속하며 일왕과 조국에 목숨을 바치는 전제 가운데 하나가 일본이라는 국가가 계속해 존재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란 사실에 주목했다. 나아가 일본인들이 전멸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어떤 것'에 의해 일본이 국가로서 계속 존속하기 힘들다고 여기게 되면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죽음보다 항복을 선택할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인을 전멸시켜 국가로서 일본이 존속하기 힘들게 만들 '어떤 것'은 당시 이미 개발을 완료한 원자폭탄을 의미했다. 미국은 1945년 7월16일 뉴멕시코주에서 폭파시험을 끝내고 원자탄을 무기로 보유한 상태였다.
보고서 일주일 뒤 원자탄 투하
미군 또는 미 정부가 OSS의 보고서가 내린 결론을 수용했는지는 이번 자료에서 직접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고서 작성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 6일 최초의 원폭이 히로시마에, 다시 3일 뒤에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점에 비춰볼 때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더욱이 OSS의 이 같은 결론이 옳았다는 사실은 8월15일 히로히토 일본 왕의 항복선언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히로히토 왕은 무조건 항복 의사를 밝힌 대국민연설에서 미국의 원폭투하를 겨냥해 "참담한 피해가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할 수 없다"면서 "이대로 전쟁을 계속한다면 마침내는 우리 민족의 멸망을 부를 것"이라고 항복 이유를 설명했다. OSS가 일본의 전멸 위협만이 전쟁을 종식시킬 항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지 2주 만이었다. 결국 일본군 지도부가 병사들에게 혼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영생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 가미카제 등 자살공격과 자살방어를 가져왔고, 이것이 역으로 미군의 원폭 공격 결정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옹호하며 지난해 말 참배를 강행해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다. 비록 이번 봄제사 때는 직접 가진 않았으나 공물을 바쳐 태도가 바뀌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시사주간 타임의 최근호에서도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국가를 위해 무한한 희생을 한 영혼을 기리는 것"이란 논리를 폈다. 그러나 이번 OSS 보고서에 따르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A급 전범을 포함한 당시 일본군 지휘관들은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며 병사들을 자살공격, 자살방어의 용도로 희생시킨 것은 물론 일본 국가의 전멸 위협까지 초래한 장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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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CIA 비밀 문서 입수
"야스쿠니 신사서 영생 믿음이 무모한 가미카제 자살 내몰아
전멸시킬 만한 치명적 무기만이 일본 항복 선택하게 만들 것"
보고서 일주일 만에 원폭 투하
야스쿠니(靖國) 신사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임을 보여주는 2차대전 당시 미군 자료가 24일 공개됐다.
한국일보가 정보공개법(FOIA)에 근거한 정보공개 요구로 중앙정보국(CIA)에서 단독 입수한 2차 대전 비밀문서에 따르면 미군은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군의 정신적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의 연구분석부가 1945년 7월30일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 자살' 보고서를 보면, 먼저 2차 대전 막바지에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일본군이 항복 대신 자살공격과 자살방어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전세가 이미 기울고 독일까지 패망한 상태였지만 일본 군부는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일본군의 이 같은 정신세계 분석에 착수, 그 근원적 배경에 일본 도쿄에 소재한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더구나 일본군 사령부는 병사들에게 죽어서 영생할 수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묻힐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자살공격을 적극 조장하며 이를 전략으로 확대시켰다. 이에 따라 미군은 일본인의 완전소멸 또는 국가존속이 위협받아야만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결국 이 판단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가 작성된 지 일주일 뒤인 8월 6일 미군 폭격기 B-29가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출현, 원자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이다.
자살공격을 군사전략으로
보고서는 미군의 본토 섬 진격을 앞두고 일본이 최후의 1인까지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먼저 자살을 무기로 공격과 방어를 하는 일본군의 정신세계를 분석했다. 분석에 따르면 여기에는 일본군의 명예로운 죽음에 대한 세뇌와 이를 공격무기로 이용한 군부지도자의 판단이 작용했다. 당시 일본군은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서 숨지는 것을 최대 명예로 배우며 죽음에 대비해 훈련을 받았다. 이 같은 세뇌와 함께 전쟁에서 오는 긴장, 포로가 됐을 경우 고문에 대한 공포심, 집단에서 느끼는 의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일본병사들을 압박했다.
그러나 일본군 지도자들은 이런 병사들의 심리를 공격무기로 최대한 이용하려 했다. 보고서는 "당시 일본 군 지도부가 미국의 압도적인 공격에 대항에 맞설 기본적 방어무기로서 일본군의 자살 감행능력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군부는 원래 일본제국의 병사들에게 하나의 전술로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 할복하거나, 일왕 만세를 외치며 적진으로 공격하는 '반자이 돌격'을 하도록 교육했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 군부는 이 같은 개념을 확대 발전시켜 병사들의 자살을 이용한 공격을 새로운 군사전략에 포함시켰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자살공격과 자살방어
OSS는 이 같은 자살 군사전략이 실행된 사례로, 일본 공군 조종사가 전투기를 무기로 삼아 미 군함을 들이 받는 '가미카제'와 폭격기가 투하하는 1톤이 넘는 폭탄에 직접 올라타고 표적을 향해 조종해 돌진해가는 '바카(바보)' 공격을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했다. 당시 일본군은 이외에도 다양한 자살공격 방법을 동원했는데, 해군의 경우 소형보트에 폭발물을 잔뜩 싣고 미 군함과 충돌하거나, 등에 어뢰를 묶고 헤엄쳐 미군 상륙정이나 수송선을 폭파시킨 경우가 있다. 미군은 오키나와 인근 케라마섬에서 폭탄으로 무장된 300개의 일본군 고속정을 확보하기까지 했다. 또 일본 육군은 폭발물을 몸에 지닌 채 미군 탱크를 공격하거나 미군의 진지로 뛰어들어 자폭하는 방법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약 70년 전 일본군이 사용한 이런 무자비한 공격은 현재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자살폭탄 테러와 거의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자살을 공격뿐 아니라 방어 수단으로도 이용했다고 OSS는 보고서에서 밝혔다. 전투에서 패배가 확정되기 앞서 장교는 일장도로 배를 가르는 할복자살을 하고, 병사가 아랫배에 수류탄을 터트려 자살하는 게 그런 사례다. 또 일본군 수백 명이 마리아나 섬과 오키나와의 절벽에서 바다로 투신해 자살하거나, 공격이 무의미한 상황에서 병사들이 죽창을 들고 기관총이 쏟아지는 미군 진지로 진격해 최후를 맞이하는 행위도 마찬가지 방어수단으로서 자살을 이용한 경우라고 보고서는 언급했다.
야스쿠니 영생 약속이 자살 이유
보고서는 일본군이 이처럼 자살의 길로 쉽게 동원되는 배경을 추적한 끝에 야스쿠니 신사가 그 정점에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물론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군사 기초훈련 때부터 죽음을 무사의 길로서 가르치고, 일왕을 위한 죽음을 명예로 세뇌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혼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일본의 수호신으로서 영생한다고 약속했다. 당시 일본의 전쟁장관은 "일왕이 다스리는 우리 제국의 영토와 함께 제국의 조상들의 혼이 모셔진 곳(야스쿠니 신사)은 끝까지 수호해야 한다"면서 "적의 침략을 물리치는데 있어 모든 것을 바치고, 또 죽어서도 혼으로 제국을 지킬 것"을 훈계한 일도 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모로타이섬에서 자살임무를 부여받은 한 병사는 부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키들을 최대한 많이 죽이고, 나를 파괴해 큰 공을 세우겠다"며 "나를 보고 싶다면 야스쿠니 신사로 오십시오"라고 적었다. 또 다른 병사는 자살임무를 하루 앞두고 쓴 일기장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내 조국을 수호하는 혼 이 될 수 있어 기쁨이 가득하다"고 기록했다.
미군의 카드는 일본전멸 위협
OSS는 일본군이 병사들에게 야스쿠니 신사를 내세워 자살공격으로 내모는 것이 실은 연합군의 희생자를 최대한 늘리기 위한 것이라며 그 피해의 심각성을 고민했다. 더구나 일본군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의 변경을 시도하며, 미군이 본토 섬으로 진격해오면 민간인들도 최후까지 버티는 저항을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보고서는 "일본군 사령부가 자살전략을 최대한 이용키로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OSS는 병사들이 자살공격을 계속하며 일왕과 조국에 목숨을 바치는 전제 가운데 하나가 일본이라는 국가가 계속해 존재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란 사실에 주목했다. 나아가 일본인들이 전멸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어떤 것'에 의해 일본이 국가로서 계속 존속하기 힘들다고 여기게 되면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죽음보다 항복을 선택할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일본인을 전멸시켜 국가로서 일본이 존속하기 힘들게 만들 '어떤 것'은 당시 이미 개발을 완료한 원자폭탄을 의미했다. 미국은 1945년 7월16일 뉴멕시코주에서 폭파시험을 끝내고 원자탄을 무기로 보유한 상태였다.
보고서 일주일 뒤 원자탄 투하
미군 또는 미 정부가 OSS의 보고서가 내린 결론을 수용했는지는 이번 자료에서 직접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고서 작성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 6일 최초의 원폭이 히로시마에, 다시 3일 뒤에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점에 비춰볼 때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더욱이 OSS의 이 같은 결론이 옳았다는 사실은 8월15일 히로히토 일본 왕의 항복선언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히로히토 왕은 무조건 항복 의사를 밝힌 대국민연설에서 미국의 원폭투하를 겨냥해 "참담한 피해가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할 수 없다"면서 "이대로 전쟁을 계속한다면 마침내는 우리 민족의 멸망을 부를 것"이라고 항복 이유를 설명했다. OSS가 일본의 전멸 위협만이 전쟁을 종식시킬 항복을 가져올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지 2주 만이었다. 결국 일본군 지도부가 병사들에게 혼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영생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 가미카제 등 자살공격과 자살방어를 가져왔고, 이것이 역으로 미군의 원폭 공격 결정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옹호하며 지난해 말 참배를 강행해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다. 비록 이번 봄제사 때는 직접 가진 않았으나 공물을 바쳐 태도가 바뀌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시사주간 타임의 최근호에서도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국가를 위해 무한한 희생을 한 영혼을 기리는 것"이란 논리를 폈다. 그러나 이번 OSS 보고서에 따르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A급 전범을 포함한 당시 일본군 지휘관들은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며 병사들을 자살공격, 자살방어의 용도로 희생시킨 것은 물론 일본 국가의 전멸 위협까지 초래한 장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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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he Lich....아이씨발, JAPS KING!!!!!
너 이 씨발새끼, 요즘 니 쎅파랑 점호 자주 빠지더라??
tag : 2차대전사, 일본군, 가미가제, 자살공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