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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역사연구소] (브금있음) 중세유럽인들은 의외로 잘 씻었습니다 - 중세 유럽의 목욕탕 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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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짤방은 특정 상황과 관계업ㅂ습니다 'ㅅ') (!?!?!?)>



흔히 우리가 중세유럽사를 논할 때 흔히 나오는 얘기가 개인위생 – 특히 목욕 얘기입니다. 유럽사에서 중세가 시작되는 로마 제국의 멸망과 ‘암흑 시대’부터, 중세가 끝나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대표되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거의 1000여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을 물론 칼처럼 잘라내기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를 모두 ‘중세’라고 부릅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거듣자하니까저어디유럽에선드럽게안씻고댕겨서옆에서가면냄새나고옷은드럽게입고댕기고목욕도안한다면서아오저드러운야만인새끼들그집은몸근지러워서어떻게살어때는손톱으로밀면그냥나오나


........이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ㅅ'a

대개 목욕에 관해선 세간의 인식으로는 잘쳐줘봐야 한달에 한번, 더쳐주면(?) 평생 세번 – 그러니까 세례받을 때, 시집장가갈 때, 저세상갈 때만 한 탓에 향수산업이 발달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요.

하지만, 아까도 얘기했지만, 유럽의 중세는 거의 천여년에 가까운 세월이였고, 그 사이에 (비록 현대에 비하면야 조약하긴 하지만) 이정도 시간이라면 사회 발전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과연, 그 당시 사람들은,

정말 천여년 동안 정말 평생 세번만 씻고 살았을 정도로

위생개념이 엉망이였을까요???





[1] 너도 그때 한번 살아봐

물론 이런 통념이 나온 것도 아주 이유가 없는 건 아닙니다. '안씻는 중세인'이라는 이미지의 시작은 중세의 시작부터인데,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그간 로마 제국 시기에 닦아놓고 쌓아놓은 사회인프라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물과 관련된 기간시설도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로마 시대 말기쯤 가면 이탈리아 본토에서 떨어진 속주들은 이미 ‘야만인’들의 수중에 떨어진 탓에 기간시설은 통째로 날아가버렸고, 이 ‘야만인들의 침략’ 과정에서 속주의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그간 쌓아뒀던 석조물들을 부수고 장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제국 관련 유적이 대부분 박살난 채로 남아있는 건 세월의 무게와 이민족들의 약탈도 있지만, 이런 사회적 분위기도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랬으니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 – 그러니까 로마 제국 본토의 사회기간시설도 멀쩡할 리는 없지요. 옛날같았으면 때빼고 광내고 향내는게 일이자 사회오락이자 삶의 미덕이였지만, ‘야만인’들이 흉기를 들고 부랄 철렁거리면서 내세상 만났다면서 돌아댕기는데 목욕할 시간이 있을 리는 만무하지요. 이런 탓에 각 지역에 있던 공중목욕탕은 손님들이 뚝 끊겨 자연스럽게 강제폐업(!!) 수순을 밟게 됩니다. 이런 목욕에 대한 관습들은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전 사회적으로 ‘안씻는 게 유행이 되버린’(!!!) 그야말로 유럽의 개인위생업계에서 세기말적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옛날엔 이랬었었다는데...'ㅅ'a>


게다가 기술적 문제도 무시못할 일이였습니다. 옛날같았으면(?) 비록 납파이프로 물을 끌어다쓴 탓에 납중독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더라도 물은 확실히 공급되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그 물을 길어다 쓸 시설도 없고, 특히 온수공급의 문제 때문에 목욕 문화가 강제사장(!!)된 문제도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 중 하나가 수로교 (Aqueduct [英])인데, 이마저도 '야만인들'이 부수고, 이들을 막겠다고 축성재료로 징발당해 개발살난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시설없이 공중목욕탕을 돌릴 정도의 물을 공급하려면 인력이 많아야 하는데, 그당시 그런 인력이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런 탓에 공중목욕탕은 강제폐업을 당하게 되고, 공중목욕이란 것은 그저 ‘옛날에 있었었던’ 관습이 되었습니다.


[2] 아오 저 냄새나는 민간인들 -ㅅ-

하지만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의 어딘가에선 ‘찬란했던 옛 지식’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 한둘쯤은 있기 마련입니다. 동로마 제국이야 어차피 로마 제국 멸망 직전에 가방싸들고 옮겨가서 새로 차린 멀티가 본진이 된 나라인만큼(!?) 이런 목욕문화가 발달해있으니 논외로 칩시다. 이 서유럽 남유럽에서 야만인 천지가 되서 안씻는 드러운 그 뭔가(?)들이 흉기를 휘두르며 해맑게 뛰어놀고 있던 어두컴컴한 암흑천지에서 이런 문명개화를 보존한 청정지대가 있었으니…

바로 부라더후드 오브 스틸…아이씨발, 수도원입니다.


물론 당시 기독교 문화에서 몸을 보인다는 것은 죄악으로 생각한 경향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목욕을 안하고 살았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종교적 동기 – 특히 기독교 경전에 나오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세례의 의미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더 자주 씻고 다녔던 사람들이 바로 수도사였거든요.

당시 몇몇 수도원들은 로마 시대 당시 수문학(水文學) – 그러니까 물의 순환을 연구하는 학문을 연구하고 보존했던 집단이 수도원이였던 탓에, 그들 개인적으로나마 이런 로마의 수도 시설을 재현할 역량이 충분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캔터베리 수도원은 정수시설과 급수시설을 갖춰, 수도시설 복구의 실낱 같은 희망을 보여준 곳이였습니다. 이런 시설이 필요했던 이유는 당시 기독교 의식에 물을 쓸 일이 많았는데, 예를 들자면 세속에 맛을 들여 계율을 어기려는 수도사가 있다면 징벌의 의미로 찬물목욕을 시켰으며, 매년 실시하는 온수목욕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세례에 쓸 깨끗한 물을 위해서라도 물을 쓸 일이 많았거든요.

특히 세례 요한의 축일로 지정된 6월은 맘먹고 조성한 ‘전 유럽 목욕의 달’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며 그간 쌓인 슬픔과 근심을 씻어내는 신성한 행사였으니 최소 1년에 한번은 추가되는 겁니다. 게다가 기사들은 기사 서임식 전에 ‘왕의 기사이기 이전에 신의 기사’가 될 것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기사 서임식 전날 사제들이 목욕을 시켜줘서 옛날의 과오와 죄를 씻어내는 의식이 추가되었습니다. 목욕이란 것은 (현대의 인식보다) 당대 유럽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


[3] 우리라고 안씻은 게 아니라니까?? 못 씻은 거지!!! (!?!?)

사실 고대인 – 특히 로마를 침공한 ‘야만인’들이라고 해서 안씻은 건 아닙니다. 켈트족 양반들이 비누를 만들어서 씻었다는 건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고, 게르만 계통도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이들의 공중목욕 축제는 5월이였는데, 심장마비 걸릴까봐 목욕하기 힘든 겨울이 끝나고 뜨듯해서 목욕하기 좋은 날씨인 봄이 오는 5월이 되면 목욕을 통해 자연에 대해 경의와 예찬을 표하는 풍습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로마와 접촉한 야만인 폭도수괴(!?)들은 목욕탕 문화를 들여오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시몬느 맥키넌 주연의 2001년작 영화인 아틸라를 보면, 아틸라가 로마를 몇번 방문한 이후, 자택에 이따만한(!?) 석조 욕조를 들여놓아 로마의 목욕 풍습을 흉내내려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적어도 정계와 접촉할 기회가 많은 ‘야만족 지도자’들은 되려 문명개화 사회를 따라하려고 했습니다.


<단수사태 끝나면 온다고 했으면서 ;ㅅ; (!?!?!?)>


하지만 로마 제국 멸망 후

이런 사회인프라 및 기간시설이 무너진 탓에

개인적인 목욕으로만 그치게 되었고,

공중목욕은 꿈도 못꿀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목욕을 안한 유럽인들은 외부의 문명개화 사회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샤를마뉴 치세 당시 궁정을 방문했던 이슬람 쪽 외교관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러한 현대의 관념을 부채질합니다. '왕궁 근무자들이 안씻고 빨래도 안하고, 왕이라는 양반(!?)은 비단옷을 안입고 난닝구고쟁이에얼룩말쓰레빠…아이씨발 양모로 짠 옷을 입고 댕겼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오토 대제의 왕궁을 방문한 아랍 외교관도 ‘아오시발저집황제는일년에두번씻는다고자랑질을한대’라는 식으로 흉을 봤거든요. 아랫것들이야 뭐 하루종일 일하고 그래야했으니 그렇다쳐도, 왕이라는 정계 고위급 인사들까지 저랬다는 건 지금이나 당시나 흉보고도 남을 일입니다.

게다가 당시 양모의 가공과정에서 양털을 연하게 하기 위해 쉬(?)를 받아다가 절이는 과정이 있었으니 샤를마뉴가 유럽 천하를 재패한 건 그의 정치군사적인 재능이 아닌 자신을 이동식 생화학병기로 인체개조한 살신성인이라고 봐도 될 그…(!!!!)

<우어엉~ 목욕이 뭐여여? 본인은 그런 거 몰라염 ’ㅅ` (!?!?!?)>

하지만 이런 경향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 계기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4] 문명개화 아랍인들이 말합니다. 씻어 'ㅅ'四

(저번 중세유럽의 요리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십자군 전쟁은 누가 뭐래도 명백한 유럽의 침략전쟁이고, 이 과정에서 안티오크 학살이나 예루살렘 학살 등 인류역사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전체 십자군 전쟁 기간동안 아랍의 선진문물이 옮겨져서 사람구실을 하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이 선진문물 중에는 공중목욕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과정도 향신료 도입 과정과 비슷합니다. 아랍에 파견나가 부임한 기사들에 의해 아랍과 동로마 제국의 공중목욕 문화를 들여오게 됩니다. 동로마 제국이야 옛 로마 제국의 멀티가 본진이 된 곳인만큼 말할 필요도 없고, 당시 아랍에선 하맘 (الحمام [아랍어] Hammam [英]) 이라는 목욕탕이 각 지역에서 성행했는데 , 여기에 맛을 들인 십자군 참전용사들이 유럽에 돌아오면서, 이 맛을 잊지 못해, 본토의 자택에 목욕탕을 옮겨심으려고 골머리를 싸매게 된 게 그 시작입니다.

문제는 역시 온수공급이였는데, 물이야 수로를 다시 만들던지, 할일업ㅂ어 놀고있는 백수들을 잡아다가 물장수를 시키던지 해도 될 일이지만, 뜨거운 물은 가져오는 동안 식을 게 뻔했거든요. 그러던 와중 한 이름없는 양반이 아이디어를 짜낸 모양인데, 그것은 바로 제빵 오븐과 파이프를 연결시켜 온수를 공급하는 방법입니다 'ㅅ'!!!!

<일부 배경에 신경쓰면 지는거임ㅇㅇ (!?!?!?)>


이렇게 해서 온수공급 문제가 해결되었고,

이제 유럽에서 공중목욕문화는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합니다.



[5] 저기 집사. 비누 좀 주워줘 'ㅅ' (!?!?!?!?)


<개인 목욕 관련 세밀화>


이런 목욕문화의 부흥은 관련산업의 부흥으로 이어졌습니다.

향수와 비누 사업 말이지요.


단순히 물만 받아놓은 때와는 달리, 물에 향수를 타거나, 꽃잎, 향신료, 약초 등을 깔아놔서 물에 향이 배게 하여 고급스러움을 살렸습니다. 욕탕도 마찬가지인데, 성이나 자택에 목욕탕을 들일 수 없다면, 목제 욕조라도 만들어서 들일 정도로 목욕에 대한 열망은 뜨거웠습니다. (바로 위에 올린 세밀화에서 보이듯) 이 욕탕에 비단제 천장을 덮어 장식을 하고, 탁자까지 들여놓아 개인위생뿐만 아니라 멋까지 신경쓰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나는 존내 고급스럽게 씻을테야’라는 의지를 보인다면, 바닥에 타일까지 까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을 정도로 상류층에서의 목욕탕 조성은 부와 교양의 척도였습니다. 일례로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of the England : 1312~1377)는 왕궁 내부에 목욕탕을 여럿 설치했는데, 여기에 쓸 청동제 수도꼭지를 아낌없이 썼을 정도였거든요.


<본 장면은 역사적 사실과 상관업ㅂ읍니다 'ㅅ' (!?!?!?)>


게다가 수건제작과 비누제작업도 부활했는데, 특히 이 당시 비누는 단순한 벽돌덩어리가 아닌 장식까지 해서 고급스러움을 살리게 됩니다. 이 당시 이베리아 지역 (현재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비누는 최고급으로 인식되었고, 1200여년경에 잉글랜드 왕국에서도 이 황금알을 낳는 비누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합니다. 물론 현대의 비누에 비하면 빨래비누에 가까운 물건이라 물에 풀어쓰지 않으면 살이 다 까진다는 문제는 남지만요 ‘ㅅ’)

이 당시 목욕이란 것은 (저번 중세 유럽사의 잔칫상 시리즈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목욕만 하는 게 아닌, 정치적/사회적인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입니다.




[6] 엄마. 저 나으리한테서 냄새나 ;ㅅ; (!?!?!?)

이렇게 외부 세계와 접촉해서 문명개화의 맛을 알아버린 유럽에서, 이제 개인위생은 곧 사회적 지위와도 직결됩니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디 저 외국에 파견나가는 외교관이라는 양반이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옷을 입고 파견나간다면 고위인사들이 뒤로 넘어질 일이며, 정상회담하러 온 국가원수의 가까이에 가면 숨을 못쉴 악취가 나면 그야말로 나라망신인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어디 저 농노 나부랭이(!?)도 아닌 지체높은 귀족 나으리라면 특히 더요.



<정치의 요충지인 궁정은 화생방 훈련장이 아닙니다 'ㅅ')>


특히 이 당시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건 종교적 의미로도, 의학적 상식으로도 용납못할 행위였습니다. 당시 구전되는 악마들에 관해서 공통적으로 강력한 찌릉내(?)가 난다는 설정이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이 그 반증이거니와, 질병은 (19세기에나 개념이 정립될)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아닌 냄새 때문으로, 이를 향기로 막을 수 있다는 개념까지 꽉 잡던 시대였으니, 개인위생에 소홀히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개인의 불명예나 다름없었습니다.

높으신 분들을 흉내내서 조금이라도 멋스럽고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한 현상인데, 이 부분도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일반인들의 세탁 개념도 바뀌게 되는데, 예전에는 세탁을 할 때 쉬(!?)를 받아서 세탁할 정도로 훌륭한 위생개념(!?)을 보여줬지만, 아무리 늦게 잡아도 1376년부터는 이런 경향이 사라집니다. 물론 양모 가공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소변에 담그는 게 필수였지만, 연화과정이 끝나면 반드시 세탁을 해서 냄새를 빼야 했습니다. 특히 양모를 염색하려면 특히 더요. 당시 염색가공과정은 날마다 염색할 수 있는 색이 달랐는데, 만에하나 높으신 분들이 자주 쓰는 진홍이나 자주같은 색에 냄새가 배면 무슨일이 벌어질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겁니다. 실제로 이 당시에 대량세탁을 위한 원시적인 형태의 액체비누도 있었습니다. 물론 일반 비누보다 더 비쌌지만요.

일단 이당시에 중상류층을 기준으로 하루 목욕횟수를 대층 계산해보자면...

아침 : 간단히 세수만. 난방시설의 한계로 인해 물이 식어버리는 탓에…
낮 : 없음. 일하느라 바빠서...'ㅅ'
저녁 : 집사. 비누 좀 주워줘 'ㅅ') (!?!?!?!?)


특히 교회가기 전날이나, 축제기간 전날, 혹은 정관계 인사와 만날 일이 있다면 횟수는 더 늘어나니 목욕 횟수만 놓고보자면 고대 로마시대에 근접할 수치입니다. 이때쯤 되면 아무리 못해도 1주일에 한번은 목욕을 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높으신 분들을 흉내내서 조금이라도 멋스럽고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이랬으니, 제아무리 농노 나부랭이라도 안씻을 수가 없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 하루에 다섯번 – 최소한 아침점심저녁식사 전에 세번은 손을 씻었고, 냄새가 난다 싶으면 일이 끝나자마자 강물로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똥ㅍ…아이씨발, 분뇨수거노동자 (Gongfarmer [英])같은 경우는 일끝나면 방호복과 국자(!?)를 내던지고 근처 강에 몸을 담그고 북북 씻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오거든요.

위생에 대한 개념도 다시 발달했습니다. 당대의 의사였던 존 가데스덴 (John of Gaddesden : 1280?~1361)은 ‘소금물이나 유황을 탄 물에 목욕을 하면 기생충을 죽여 건강에 도움이 된다’라며 목욕을 권장했는데, 지금으로 보면 온갖 의료적 병크와 무식으로 점철되었다는 시대였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당시에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대량세탁 과정에서도 소금물과 비누를 이용한 세탁도 다시 부활했고요.

[7] 대목욕시대.




이러한 목욕 부흥의 시대로 인해, 개인목욕뿐만 아니라 공중목욕탕이 부활하게 됩니다. 강제휴업에 들어갔(었)던 옛 목욕탕 터에 새로운 업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특히 각 지역의 온천은 당시에서도 알아주는 명소였습니다. 이러한 대중목욕탕은 목욕탕은 종합진료센터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었고, 실제로 이 당시에는 골절, 신경쇠약, 심장질환, 폐질환, 뇌질환, 운수대통 복권당첨(!?!?) 등을 치료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일례로 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 [獨])의 온천에는 '세례 요한 축일에 한번 목욕하면, 다른 때에 아홉번 목욕하는 거랑 같음ㅇㅇ'이라고 광고를 할 정도였고, 몇몇 온천들은 특정 질병에 특효라는 인식을 지닌 탓에, 이런 온천들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의료관광스팟'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당시 공중목욕탕은 개인위생도 위생이지만, 그보다는 질병 치료와 오락과 사교의 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몇몇 공중목욕탕들은 악사들과 요리사들을 고용해서 요리까지 대접하기도 했는데, (물론 높으신 분들의 개인목욕도 이러긴 했지만) 이는 하나의 대중오락산업으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7] 안씻을 양반은 안씻는다



이렇게 목욕에 대한 인식이 올라가더라도, 꽉막힌(?) 집단은 있기 마련입니다.

일부는 이러한 목욕문화를 ‘마귀정모’라고 흉보면서

'옛 목욕횟수'를 고집하는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수도원이였습니다.


물론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목욕에 관한 옛 기술을 가장 많이 보존했던 곳이 수도원이라고 했던 걸 기억하신다면 앞뒤가 안맞느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이 당시 종교계가 목욕을 (남들보다) 안하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12세기 이후 기준으로) 목욕이 개인위생이 아닌 오락과 쾌락의 의미가 덧칠해진 후 이에 대한 자성의 움직임으로 안씻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타가 공인하는 인격자이자 사회봉사가인 엘리자베트 튀링엔 (Heilige Elisabeth von Thüringen [獨] Elizabeth of Hungary [英] : 1207 ~ 1231)이 한번 목욕을 하긴 해야겠다고 결심하긴 했다고 하는데, 결국 실행에 옮기진 않았습니다.


<15세기에 그려진 엘리자베트 튀링엔의 목욕봉사와 관련된 그림>


이는 위생관념의 문제라기보다는 종교적 의미 – 그러니까 쾌락을 멀리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겠다는 의미가 앞섰을 뿐

위생관념의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엘리자베트 튀링엔을 묘사한 당대 세밀화나 후대의 그림들, 그리고 일화들을 보면 (당시 종교적 봉사단체가 그랬듯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환자, 장애인들을 씻겨주는 그림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거든요. 진짜 목욕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의미였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8] 안되!!! 목욕하지마!!!!!


<본 짤방도 특정한 상황과 상관업ㅂ읍니다 'ㅅ' (!?!?!?)>


사실 교회측의 이러한 인식이 아주 이유없는 건 아닙니다. 14세기부터는 이러한 공중목욕탕 중 일부가 성매매업소로 변질되어 ‘남녀가빤쓰벗고운동하는(!?!?)’ 미성년자 출입금지업소가 되었고, 이는 교회가 '(공중)목욕은 곧 죄악'이라고 공격할 거리를 만들어준 측면도 있었거든요. 실제로 이 혼욕 목욕탕에 개인침실까지 있는 곳이 많았고, 이로 인한 사생아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교회 측은 비판의 칼날을 세워갑니다.


<14세기의 목욕탕 중 성매매업소로 변질된 곳은 한두군데가 아니였으니...>


물론 일반 대중목욕탕도 이런 생각을 안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름의 자정노력을 했는데, 예를 들면 일정 시간마다 종소리를 신호로 각 성별마다 목욕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해두기도 했습니다만, 잘 지켜지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흑사병이 터져 인구가 줄어버리자, 많은 대중목욕탕은 문을 닫게 되었고, 어찌어찌해서 살아남은 업소들은 성매매업소화되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혼욕이 사회문제를 일으키자 각국의 정부들은 법령을 통해 이러한 성매매업소화된 목욕탕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프랑스 왕국의 프랑수아 1세 (François d'Orléans [彿] Francis I of France [英] : 1494~1547)는 1538년에 자국 내의 모든 성매매업소형 목욕탕을 강제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잉글랜드 왕국의 헨리 8세 Henry VIII of England [英] : 1491~1547)는 혼욕을 금지시키는 왕령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이 당시에는 매독이 유행해서 사람 여럿 잡는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공중목욕탕업계도 나름의 자정을 위해 노력은 했지만...>


이렇게 다시 공중목욕 문화는 후퇴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일이였을 뿐입니다. 예전과 달리 목욕 자체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거든요. 물론 근현대에 비하면야 수도시설이 좀 쒵이였던 까닭에 지금과 같은 의미는 여전히 아니였지만, 18세기 즈음에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John Wesley [英] : 1703~1791)이 '청결은 신성함의 다음으로 중요한 덕목'이라는 미명하에 목욕을 치료방식으로 권장하면서 다시 부활합니다. 물론 이 이후에 벌어진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적 발전이 공중목욕에 적용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의 업적은 높이 살 수 있습니다.



[9] 그래도 한계는 있다. 세균이라등가 수도시설이라등가…

물론 이 당시는 맑은 물=깨끗한 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안에 숨어있는 (1급수 전용) 기생충 알이라든가, 세균에 대한 인식이라든가 하는 수질 문제도 있고, 상수도 시설도 (지금에 비하면야) 영 아닌 탓에 명백한 한계는 존재했지만, 비판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닙니다. 세균이나 미생물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려면 이때로부터 적어도 600여년을 기다려야 했거든요.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Ignaz Philipp Semmelweis [獨] : 1818~1865)가 그렇게 19세기에 손좀씻어라이드러운의사새끼들아(!?!?)고 강조를 했어도 루이 파스퇴르 거사 (Louis Pasteur : 1822~1895) 가 미생물을 증명해내기까지 청결무용론이 한동안 기승을 부린 것도 아직 세균이나 미생물에 대한 개념과 증명이 덜 되었던 탓이였는데, 더 옛날인 중세라면 말할 것도 없지요.....물론 고대 로마의 의사들은 손에 피 좀 묻었다면 무조건 손을 씻었다는 건 안자랑 ‘ㅅ’)





[결론]



<아마도 목욕탕의 최종진화형(?)의 현대판일 것 같은 그...'ㅅ')>

물론 현대에 비해서 중세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고, 위생 개념이 현대와 좀(?) 많이 다른 탓에 더러운 시대로 인식되긴 하고, 아주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암흑 시대’를 지나서 옛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그들 나름대로 위생에 신경쓴 흔적 또한 분명히 있었습니다. 물론 언급했듯이 기술적 문제나 당대의 의학적 관념, 또는 변질된 업종 때문에 쇠퇴기를 맞기도 했지만, 옛 사람들의 노력 덕택에 많은 문화가 보존 및 발전되었고, 이는 목욕 문화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금의 목욕 문화가 있기까지는 현대의 기술도 기술이지만, 과거의 피나는 노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브금정보 : 2-05. 黄金時代 ~Golden Age~ (英雄*戦姫GOLD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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