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뉴스큐레이션사이트 ‘향이네’가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기획에 참여한 필자들은 “페미니즘이 남성과 여성 모두의 삶에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학문이자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페미니즘이 뭐길래’ 함께 읽어보시죠. 연재글에 대한 의견은 h2@khan.kr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1회 메갈리아의 ‘거울’이 진짜로 비추는 것
■ 인클로저
정식 명칭은 ‘중동호흡기증후군’. 2015년 5월 20일 국내 최초로 환자가 발생한 이래 현재까지 총 186명의 환자와 수천 명의 격리대상자가 나왔고 그 중 37명이 사망하였다. 공포와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학교도 가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았다. 식약청이 인증한 마스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정부의 무능한 대처에 사람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올 초여름 한국사회를 강타한 낯선 질병 ‘메르스’가 남긴 장면들이다.
이 역병의 흔적은,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정부가 메르스 관련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자를 엄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한 5월 마지막 주였다. 디시인사이드에 ‘메르스 갤러리’가 한가롭게 개설되었다. 마침 비슷한 시작, 주로 남성 아이돌 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디시인사이드 모 ‘여초’ 갤러리A에 한 남성이 한밤중에 연애상담 글을 올린다. 본인을 월수입 350만원의 과장이라고 소개한 이 34세의 남성은 20세 신입 여직원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고백을 하려고 하는데 어떨 것 같냐는 글을, ‘여기엔 여자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갤러리A에 올린 것이다..
험한 댓글들이 올라왔다. 발끈한 글쓴이는 “배용준도 13살 어린 박수진과 결혼한다, 고백을 위해 20만 원짜리 아이크림도 준비했다, 결혼하면 생활비로 150만 원을 줄 것이다, 나는 정력도 세다, (그녀는) 이미 나에게 호감이 있을 것이며, 내 아이를 낳아 주고 나만 보며 살 것”이라고 항변했으나, 본전도 찾지 못하고 ‘강된장남’이라는 호칭만 얻었다. 자신이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지 상상도 못한 채 그는 “너희들은 돈 주고도 안 따먹는다”는 저주를 남기고 그 곳을 떠났다.
14살 많은 남자 상사의 고백에 난감해할, 그래서 앞으로의 직장생활이 곤혹스러울, 어쩌면 부담을 못 이겨 직장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를 20세 여직원에 대한 강한 연민과, ‘강된장남’의 뻔뻔함에 대한 분노, 조롱, 이 상황을 패러디한 창작물들로 갤러리A가 들썩였다. 마침 개설된 메르스 갤러리가 ‘털린’ 것은 이때였다. 갤러리A의 유저들은 변방의 메르스 갤러리에 난입해 깃발을 꽂고 홧김에 ‘김치남’들을 ‘패기’ 시작한다.
소문을 들은 남성 이용자들이 몰려왔으나 해당 갤러들의 가공할 ‘싸패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20세 여직원을 유달리 동정하던 갤러리A의 한 유저는 2박 3일간 잠도 자지 않고 메르스 갤러리를 ‘자혐’(남성혐오)으로 도배하며 ‘갤통령’이 되었다.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 아이돌 팬덤 문화의 전쟁 속에서 이른바 ‘패악질’로 악명 높은 갤러리A의 유저들에게 이 정도 전투력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반쯤은 재미 삼아, 여지껏 해왔던대로, 여지껏 ‘써왔던 말투’로 메르스 갤러리를 턴 것 뿐이었다.
■ 메르스 갤러리 3일
어디선가 여자들이 남자들을 신나게 ‘패고 있다’는 이야기는 포털의 카페로, 트위터로, 커뮤니티로 속속 전달되었다. 하루에 500명씩 일정하게 늘어나는 격리대상자, 첫 40대 사망자 발생, 첫 10대 감염 등 메르스에 대한 공포가 절정을 향해가고 있었지만, 한켠에서는 이 질병의 이름이 해방감과 쾌감, 카타르시스와 동의어가 된 기묘한 여름이었다. 섹슈얼리티, 성적주체화의 가능성 문제, 노동, 젠더정체성, 성역할 고정관념 등을 둘러싼 모든 젠더 억압을 완벽히 전복시킨 놀라운 언어가 쏟아져 나왔다. 1분 단위로 수개의 페이지가 쌓였고 수백개의 추천수를 받은 게시물들이 넘쳤다. 온라인 각지에서 입성한 여성들의 열광과 남성들의 반격, 분탕질, 당황한 선비들의 헛기침, 구경꾼들의 숨죽임이 뒤섞인 채 메르스 갤러리는 단숨에 ‘실북갤(실시간 북적 갤러리)’ 1위에 올랐다. 발 빠른 기자들의 보도가 줄을 지었다.
카니발 같았다. 마치 1도씨가 보태져 물이 끓어넘치 듯, 멸시에 지친 여성들이 메르스 갤러리 안에서 폭발했다. 사이버 공간에 뿌리 깊게 스며 있던 여성혐오적 문화를 전복시킨 이 난장 안에서 아이돌 팬과 디시 유저, ‘짹충’과 ‘따봉충’, 서로 앙숙이던 커뮤니티 회원들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온라인 여성 유저들이 일치단결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곳에 대한 열광과 세간의 관심은 디시인사이드 측이 보여준 유례없는 ‘탄압’으로 재확인할 수 있었다. 부랴부랴 코드 입력과 로그인 시스템을 적용했다. 금지어를 만들고 추천수를 제한하는 등 디시답지 않은 황당한 모습이 연출됐다. 주옥같은 ‘드립’들은 대부분 삭제됐다. 메르스 갤러리에 모인 여성들은 동남아갤, 결혼못하는남자갤 등 여러 갤러리를 떠돌며 디시의 탄압과 ‘어그로꾼’들의 분탕질을 끈질기게 버틴 끝에, 두 달여 만인 8월 지금의 ‘메갈리안’ 사이트(http://www.megalian.com)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어리둥절해진 것은 이제 갤러리A의 유저들이었다. 그들의 언어대로 그저 ‘유쾌하게 씹치들이나 좀 패려던’ 당초의 기획은, 메갈리아와 미러링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다른 방향을 향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미러링’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이며 ‘메갈리아’라는 의미 부여는 다 무엇이냐며 갤러리A의 유저들은 짜증을 냈다. 최초의 ‘자혐’ 갤러리 개국공신들이었던 이들은 메르스 갤러리에서 서서히 사라졌고 자신들의 본업, 아이돌을 사랑하는 세계로 돌아갔다. ‘강된장남’의 아이크림과 메르스 갤러리의 영광을 가끔씩 소소한 추억삼아 들춰보기도 하고, ‘씹치’들에 대한 뒷담화도 멈추지 않으면서.
■ 실현된 ‘비더고자’
*이 부분은 “웃겨라 캔디야”(윤보라, 레디앙, 2012, 10)에서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사이버 시민의 상징적 성별은 남성이었고, 남성의 농담만이 주류의 자리를 얻고 횡행했다. 그동안 우리는 이것만을 두고 ‘인터넷 문화’라 칭해왔다. PC통신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20여년간 형성되어 온 사이버 공간에서, 여성의 말하기 실천이 얼마나 고되고 험난했는지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성들은 조금씩 성벽을 치며 여성들만의 안전한 공간, 마음껏 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2000년대 중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커뮤니티들은 ‘여초’와 ‘남초’로 점차 이원화되었고 온라인 공간에는 여자와 남자만이 남았다.
경향신문 2012년 9월8일자 ‘디시, 촛불, 좌좀·우꼴…정보교류서 이념논쟁의 장으로 분화’ 기사. 메갈리안들은 ‘여성혐오’가 편재한 한국사회를 두고 네이버는 ‘녹조일베’, 페이스북은 ‘블루일베’, 네이트는 ‘레드일베’라 부르기도 한다.
메르스 갤러리가 뿜어낸 에너지와 이에 대한 환호는, 여성들이 포르노그래피적 농담을 강도 높게 펼쳤다는 것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이 농담이 여자들만 모인 은밀한 공간이 아니라 공개된 광장에서 향유되었다는 것, 모두가 이 곳을 주목했다는 것에서도 비롯한다. ‘비더고자’, ‘컷더부랄’, ‘번더곧휴’ 같은 농담이 이미 7~8년전부터 높은 진입장벽을 친 일부 여초 커뮤니티 안에서 향유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해보니) 좆이 작아서 모든 것이 좆같아 졌다’는 하소연은 아무리 웃기더라도 성벽 밖에서 발화할 수 있는 농담이 아니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규범이 엄격하면 엄격할수록, 여기서 일탈할 때 생기는 진폭은 남성보다 크기 때문에 여성의 유머는 급진적일 수 밖에 없다. 이 말을 조금 바꿔보자. 남성만이 향유할 수 있고 남성에게만 허락된 쾌락적 언어의 강도가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울수록, 이를 여성이 전복시킬 때 생기는 진폭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진다. 웃음은 그 사회의 강력한 규범을 벗어날 때 가장 폭발적으로 유발된다. 모순적 상황을 발생시켜 웃음을 자아내는 능력은 그 사회의 질서, 규범, 권력과 나 사이의 간극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권력 앞에서 농담을 던질 줄 안다는 것은 나의 우월적 지위를 확인, 또는 과시하는 일이다. 웃기는 것은 곧 세계를 조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메르스 갤러리에서 펼쳐진 웃음의 난장은 정확하게 바로 이 지점에서 시각되었고, 이 순간 웃음의 권력이 여성에게 쥐어지기 시작했다. 유머와 드립이 능력이자 곧 권력인 온라인 세계에서 왜 디시인사이드는 이들을 탄압했는가. 단순히 남성을 정조준한 유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의 농담은 반드시 통제해야 할 것, 계승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담과 웃음이 극적으로 사라지는 지점은 나의 농담을 수신자에게 설명해야 할 때이다. 갤러리A의 유저들이 메르스 갤러리가 ‘노잼’이되었다고 한탄하기 시작한 지점 중 하나는 그곳에 모인 여성들이 ‘우리가 왜 이런 짓을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했을 때였다. 즉 우리는 ‘메갈리아’이며, 우리의 발화는 ‘너희가 해왔던 짓을 똑같이 되돌려주는 미러링’이라고 설명하는 순간, 이것은 더 이상 농담과 놀이가 될 수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농담은 운동이 될 수 없으며, 운동이 된 농담은 농담이 아니라는 것.
메갈리안이 실험한 것은 쾌락의 언어와 농담의 에너지를 운동의 에너지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름모를 갤러리들을 떠돌며 디시의 탄압을 견디고 있을 때, 메갈리안들에게는 ‘너희들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저장소 따위는 만들어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으나 이들은 끝내 메갈리아 건립을 성공시켰다. ‘미러링 스피치’라는 농담이 전복성을 상실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농담에 누가 웃을 수 있으며 어떤 힘을 가졌는지, 더 나아가 패러디는 운동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으로 출발한 셈이다.
우발적인 카니발이 끝난 뒤에도, 이는 운동의 형식으로 지속될 수 있는가.
■ n개의 이야기, n개의 폭로, n개의 사이다
온라인 안에는 언제나 이야기와 ‘썰’ssul이 넘친다. 우리는 이야기꾼들의 서사를 전해들으며 온라인에서 통용되는 윤리 감각을 학습하고, 커뮤니티와 유저들의 정체성을 구성해나간다. 하루에 천개 단위로 올라오는 게시물들 역시 메갈리아를 구동하는 강력한 힘이다. 일상에서 경험한 억압과 차별의 결들을 공유하고 고백하고 도닥인다. 여성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 부모와의 애증 고백, ‘코르셋’ 시절이었던 나의 과거 이야기, ‘탈코르셋’인 지금 만끽하는 자기해방의 경험들을 나눈다. 이를 보노라면, 마치 수십년 전 페미니즘이라는 언어를 쥠으로써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지각변동 한 경험을 나누던 자취방, 세미나실, 허름한 술집, 구석진 운동단체 사무실을 시간을 뛰어넘어 사이버 공간에 옮겨 놓은 것 같다.
현재 젊은 여성들이 처한 비극 중 하나는 ‘한국에서 제일 살기 편한’ 집단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다. 결혼과 섹슈얼리티, 친밀성, 가족구성 등 현재 젠더갈등이 정확하게 안착하고 있는 지점에서 여성들이 어떤 갈등을 겪으며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는 절대 드러나지 않은 채, 그저 ‘취집에 목숨거는 김치녀’라는 표상만이 꽉차게 들어서 있다. 여성표적범죄에 대한 집단적 공포, 실업문제, 사회적 안전망의 붕괴는 여성의 생존을 체계적으로 위협하고 있으나 여성을 둘러싼 엄혹한 현실에 대해서는 기괴한 사회적 침묵이 계속되고 있다. 이 침묵과 고단한 현실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메갈리안의 이야기와 폭로와 통쾌한 ‘사이다’는 n개로 불어날 수 밖에 없다.
메갈리아의 이야기가 여전히 농담이며, 남성들로부터 받은만큼 돌려주는 ‘미러링 스피치’, 즉 패러디라고 가정해보자. 이들이 계승하고자 한 메르스 갤러리와 달리, 메갈리아의 농담에 지속적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제 메갈리안에 한(限)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메갈리아라는 커뮤니티의 정체성과 메갈리아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내부 결의를 강화하는 역할에 그친다는 점에서 사실상 농담의 급진성을 갖지 못한다. 메갈리아의 언어가 지나치게 과격하고 불편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일부 지적은 현상의 본질과 맞지 않는 비판이다. 과격함과 불편함이 세계를 파열시키고 공명하는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늘 아침의 지하철, 직장, 학교, 가정 등 생활세계와 공동체에서 겪은 이야기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점과 만나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급격한 젠더 변동의 혼란은 오롯이 여성이 흡수하고 감당해야 하는 과제로 부과되었다. 사회가 누락시킨 자신들의 고통을 이들은 ‘폭로’와 ‘사이다’로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메갈리아를 사유하기
메갈리아의 언어가 농담이 아니라고 가정해보자. 사실 메르스 갤러리에서 메갈리아로 이전한 순간, 이들은 더 이상 목적없는 농담에만 기대지 않고 이를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셈이었다. 이들이 구상한 프로젝트들은 일상 깊숙한 곳에서 출발하여 생활세계와 온라인 공간을 넘나들며 ‘여성혐오’적 문화들을 바꿔나가려 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돕기 위한 기금 마련, 포털 뉴스 댓글 문화 바꾸기, 기부팔찌 프로젝트, 불법 몰카 근절 캠페인, 포스트잇 프로젝트... 메갈리아가 숨가쁘게 달려온 자취들은 일일이 적기 어렵다. 메갈리아가 탄생한 이후 ‘녹조릴베’(네이버) 댓글도 훨씬 보기 편해졌다는 말도 듣는다.
1898년 촬영된 코르셋을 입은 여성. 당시 허리가 16인치(41㎝)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 위키피디아
메갈리아의 문법에서 여자는 ‘갓치’와 ‘코르셋’으로, 남자는 ‘씹치’와 ‘한남충’으로 표상된다. 이른바 ‘여혐’이라고 불리는 문화 앞에서 여성이 느끼는 감각들은 분노, 불안, 무시, 비웃음, 공포, 내면화 등 다양한 갈래와 결로 나뉜다. 남성들이 느끼는 감각 또한 ‘여혐’ 문화에 대한 동조와 공모만 있을수는 없다. 그러나 ‘씹치’와 ‘갓치’ 이원론이 메갈리아 안에서 농담이 아니라 진담의 언어로 설계된 이상, 이들은 ‘무언가 반여성적인 것이 분명’하다는 하나의 감각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 감각들은 모든 ‘여혐’에 반대하는 ‘갓치’와 ‘여혐’에 동조하는 ‘코르셋’과 ‘씹치’, 이렇게 세 개의 단어로 수렴된다. 성찰해야 할 것, 나누어야 할 것, 아리송한 것들을 모두 하나의 언어로 담아서 ‘갓치’의 이름으로 ‘팬다’. 이 사이에 잔여적으로 남는 여성은 모두 ‘코르셋’으로 불리며 판단이 유보된다.
여기에서 증발되는 맥락들 때문에 메갈리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찬성함으로써 ‘갓치’가 되거나, 반대함으로써 ‘코르셋’과 ‘씹치’가 되거나, 아예 침묵하거나, 단 세 개의 선택지밖에 없다. 하지만 이처럼 완전히 탈색된 ‘무결점의 잘못’들을 단두대에 올리는 것, 여성들을 모두 ‘탈코르셋’ 하도록 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완벽한 ‘무결점의 잘못’과 완벽한 ‘탈코르셋’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의 삶은 그 사이 어딘가에 무수히 존재한다. 메갈리아가 부딪힌 첫 번째 난항은 ‘한남충’과 ‘씹치’라는 농담(미러링) 혹은 진담 구도속에서는 남자편과 여자편 외에, 이 무수한 삶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자들의 말하기를 지식으로 길어올리고, 풍요로운 소통과 그 가능성을 계속 타진함으로써 나의 해방 뿐 아니라 사회의 진보를 이룰 것이라 믿어 왔던 페미니즘의 언어는, 왜 정반대로 소통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되어버렸을까. 메갈리안들은 자신들의 방식에 대한 비판을 ‘예쁜 페미니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고 비난하며, 지금까지의 여성운동은 ‘착하고 조용조용’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은 방법은 메갈리아의 방법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타자성의 윤리를 확산시키려고 했던 페미니즘의 언어는 메갈리아에 가닿지 못했다.
여자인 나의 삶을 옥죄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불확실한 사이에, 갑자기 여자인 내가 벼슬이라고 손가락질 받게 된 이 간극에서 메갈리안들이 메르스 갤러리의 급진성을 통해 타진해보고자 한 가능성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이들이 찾은 방법이 조롱과 폭로와 처단의 구조로만 그치는 것일까.
메갈리아의 거울이 비추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페미니즘이 처한 위기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 안에 무엇이 결여되었으며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묻기 위해, 토론과 이견의 확인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다하다 (여시충+) 메갈리아를 페미니즘과 동일선상에 놓는 건 처음봤네ㅋ
tag : 저러니_짝페_소리가_나오지, 메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