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아베 정권 폭주 좌시하지 않겠다"...일본 야당, 통합 합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폭주를 더 이상 놔두고 볼 수 없다.”
일본의 야당들이 본격적으로 세력 규합에 나서고 있다. 일본의 제1야당인 민주당과 유신당이 통합에 합의했다. 야권 5개 정당은 7월 참의원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이루기 위한 협의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집단적 자위권을 반영한 안보법을 제·개정한 데 이어 7월 참의원 선거를 계기로 헌법 개정에까지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아베 정권에 맞서기 위해서다.
민주당과 유신당이 3월 중에 합당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24일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했다. 유신당은 민주당이 당명을 바꾼다는 조건으로 유신당을 해산하고 민주당에 합류하기로 했다. 새로 만들어지는 정당의 당수는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민주당 대표가 맡기로 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다.
민주당은 지난 23일 국회 안에서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대표 주재로 간부회의를 열고 유신당과의 합당을 논의했다. 오카다 대표는 이 자리에서 당명과 당의 로고를 변경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며, 이에 대한 추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신당도 같은 날 마쓰노 요리히사(松野賴久) 대표 주재로 간부회의를 열어 민주당과의 합당 방안을 논의했다. 마쓰노 대표는 회의에서 “그동안 주창해 온 100명 규모의 신당이 드디어 탄생하게 됐다”고 통합에 의미를 부여했다.
두 정당은 각각 상임간사회·임시집행임원회의 등을 열어 합당안을 추인받은 뒤 빠르면 25일에라도 합당 안에 정식 합의할 예정이라고 마이니치는 전했다.
민주·유신당은 내달 중에 신당 창당대회를 열고 참의원 선거 체제로 공식 전환할 예정이다.
양당이 통합하면 중의원 93명, 참의원 64명 등 모두 157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린 야당이 탄생하게 된다.
일본공산당도 야권의 세력 규합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공산당 위원장은 정원이 1명인 선거구 가운데 민주당 후보 또는 민주당이 추천하는 무소속 후보와 경쟁하고 있는 21개 선거구에서는 공산당의 후보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역시 아베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야권의 단합이 절실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공산당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민주당의 오카다 대표는 “공산당이 후보자를 내지 않는다면 민주당이 자민당과 싸우는데 매우 좋은 조건이 만들어진다”면서 반겼다.
이와 함께 민주·유신·공산·사민·생활 등 일본의 5개 야당은 23일 간사장·비서국장 등이 회담을 열고 참의원 선거에서의 야권 단일화에 대한 실무적인 협의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들 야당은 공산당의 방침 전환을 바탕으로 전국 32개 ‘1인구’를 중심으로 후보자 조정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야권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여당 측은 ‘야합’ 운운하면서 평가절하하고 있다.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자민당 간사장은 민주·유신당의 합당과 야권 후보 단일화 움직임에 대해 “선거를 위한 야합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폭주를 더 이상 놔두고 볼 수 없다.”
일본의 야당들이 본격적으로 세력 규합에 나서고 있다. 일본의 제1야당인 민주당과 유신당이 통합에 합의했다. 야권 5개 정당은 7월 참의원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이루기 위한 협의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집단적 자위권을 반영한 안보법을 제·개정한 데 이어 7월 참의원 선거를 계기로 헌법 개정에까지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아베 정권에 맞서기 위해서다.
민주당과 유신당이 3월 중에 합당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24일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했다. 유신당은 민주당이 당명을 바꾼다는 조건으로 유신당을 해산하고 민주당에 합류하기로 했다. 새로 만들어지는 정당의 당수는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민주당 대표가 맡기로 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했다.
민주당은 지난 23일 국회 안에서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대표 주재로 간부회의를 열고 유신당과의 합당을 논의했다. 오카다 대표는 이 자리에서 당명과 당의 로고를 변경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며, 이에 대한 추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신당도 같은 날 마쓰노 요리히사(松野賴久) 대표 주재로 간부회의를 열어 민주당과의 합당 방안을 논의했다. 마쓰노 대표는 회의에서 “그동안 주창해 온 100명 규모의 신당이 드디어 탄생하게 됐다”고 통합에 의미를 부여했다.
두 정당은 각각 상임간사회·임시집행임원회의 등을 열어 합당안을 추인받은 뒤 빠르면 25일에라도 합당 안에 정식 합의할 예정이라고 마이니치는 전했다.
민주·유신당은 내달 중에 신당 창당대회를 열고 참의원 선거 체제로 공식 전환할 예정이다.
양당이 통합하면 중의원 93명, 참의원 64명 등 모두 157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린 야당이 탄생하게 된다.
일본공산당도 야권의 세력 규합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공산당 위원장은 정원이 1명인 선거구 가운데 민주당 후보 또는 민주당이 추천하는 무소속 후보와 경쟁하고 있는 21개 선거구에서는 공산당의 후보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역시 아베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야권의 단합이 절실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공산당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민주당의 오카다 대표는 “공산당이 후보자를 내지 않는다면 민주당이 자민당과 싸우는데 매우 좋은 조건이 만들어진다”면서 반겼다.
이와 함께 민주·유신·공산·사민·생활 등 일본의 5개 야당은 23일 간사장·비서국장 등이 회담을 열고 참의원 선거에서의 야권 단일화에 대한 실무적인 협의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들 야당은 공산당의 방침 전환을 바탕으로 전국 32개 ‘1인구’를 중심으로 후보자 조정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야권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여당 측은 ‘야합’ 운운하면서 평가절하하고 있다.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자민당 간사장은 민주·유신당의 합당과 야권 후보 단일화 움직임에 대해 “선거를 위한 야합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경향신문] [부들부들 청년][3부①일본으로 간 ‘헬조선 통신사’]정치 혐오에서 참여로…일본국 청년들이 꿈틀대고 있소
병신년 2월, 전쟁과 같은 삶에 청년들의 시름이 깊어지자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옆 나라 일본국으로 통신사 파견을 결정한다. 정치를 혐오하던 일본 청년 아해들이 왜 갑자기 떼로 나섰는지 알아보라는 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 청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과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터였다. 조선통신사 정사로 임명된 이혜리는 명을 받잡고 일본국 출신 역관 오오쿠사 미노루와 함께 대한해협을 건넜다.
#1. 꿈틀거리는 일본 청년들
소인은 3일 일본국의 심장에 당도하였소. 날이 밝자 역관 오오쿠사를 대동해 도쿄 시부야역 저잣거리로 향했다오. 다방에서 약관을 갓 지난 마사키 준(21)을 만났소. 마사키는 본인의 스마트폰으로 트위터를 보여주더이다. 가입일이 신묘년(2011년) 3월12일. 일본국 동쪽에서 큰 지진이 발생한 다음날이었소. 당시 고등학생이던 마사키는 지진 정보를 얻으려 트위터를 시작했다 하오. 마사키는 소인에게 “동일본 대지진 전에는 고등학생이라 사회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지진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트위터를 하면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소. 마사키는 “시위에 나가는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할 만큼 시위와는 무관한 청년이었소. 그러다 계사년(2013년) 2월에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라는 단체가 헤이트스피치 시위를 하는 걸 보고 화가 나 저자로 나섰다오. 마사키는 처음엔 거리에서 재특회를 향해 “가라, 가라”와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조차 퍽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오. 하지만 마사키는 이내 움직이기로 했소. 잠꼬대로도 구호를 내뱉었다고 하오. 일본 조정이 특정비밀보호법을 강행처리한 계사년, 마사키는 일본 청년단체 ‘실즈(SEALDs)’의 전신인 ‘사스플(SASPL)’에 몸을 담았소.
소인이 보건대, 일본국 청년들이 꿈틀대고 있소이다. 1960년대 전학공투회의(전공투) 폭력 시위 이후 일본국엔 시위의 싹이 없었소. 버블경제가 붕괴한 1990년 이후 일본국 청년들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소. 프리터, 니트, 넷카페난민, 비정규직 등 청년의 고된 노동환경은 부각됐지만 청년이 주체인 적은 여태 없었소. 일본국 청년들은 한때 ‘스스로 뭔가 잘못을 해서 일이 이렇게 됐다’는 자기책임론을 믿었소. 하지만 이제는 다르오. 신묘년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그 계기가 됐소.
실즈의 선언문 첫 문장은 “우리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를 요구합니다”로 시작하오. “민주주의란 게 뭔데?” “헌법을 지켜라!” “평화를 지켜라!” 이들이 저자에서 외치는 구호엔 일본 사회가 그간 간과해 온 가치들이 함축돼 있소. 한 일본국 청년은 “한국에선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자주 쓰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실즈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나온 것은 굉장히 생소한 일”이라 말했소.
최저임금이나 노동문제 등 구체적인 사안에 천착한 청년단체도 잇따라 설립되고 있소. 을미년(2015년) 7월에 만들어진 에키타스(AEQUITAS)가 대표적이오. 소인이 자료를 찾아보니 현재 도쿄 최저임금은 907엔(약 1만원)이외다. 에키타스는 최저임금을 1500엔(약 1만6000원)까지 인상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소. 이들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사회참여를 시작했소. 에키타스에 몸담은 하라다 니키(26)는 원전사고에 충격을 받았다며 “도쿄에도 방사능이 날아왔다고 하니 공포도 느꼈고, 내가 뭔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일렀소. 대지진 당시 중학교 2학년생이던 고바야시슌이치로(19)는 “14살짜리 눈에도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꼈다”며 “사람의 생활과 정치의 연결성을 봤을 때 최저임금이 밀접하다고 생각해 단체를 만들게 됐다”고 했소.
최저임금이나 노동문제 등 구체적인 사안에 천착한 청년단체도 잇따라 설립되고 있소. 을미년(2015년) 7월에 만들어진 에키타스(AEQUITAS)가 대표적이오. 소인이 자료를 찾아보니 현재 도쿄 최저임금은 907엔(약 1만원)이외다. 에키타스는 최저임금을 1500엔(약 1만6000원)까지 인상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소. 이들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사회참여를 시작했소. 에키타스에 몸담은 하라다 니키(26)는 원전사고에 충격을 받았다며 “도쿄에도 방사능이 날아왔다고 하니 공포도 느꼈고, 내가 뭔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일렀소. 대지진 당시 중학교 2학년생이던 고바야시슌이치로(19)는 “14살짜리 눈에도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꼈다”며 “사람의 생활과 정치의 연결성을 봤을 때 최저임금이 밀접하다고 생각해 단체를 만들게 됐다”고 했소.
일본국 고등학생들도 단체를 설립하는 것이 심상치 않소. 실즈의 고등학생 판인 틴즈소울(T-ns Sowl)도 있고 을미년 8월에는 고등학생유니온도 만들어졌소. 수도권청년유니온의 우두머리 진부 아카이(33)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생겨 반원전 시위나 안보법안 시위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자기 생활에 밀접한 부분에도 눈을 돌리게 됐다”며 “시위에 참여했던 청년들이 이후에 사회로 나가 일본 사회의 모순점들과 직접 부딪히게 되면서 최소한 노동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했소.
이것만은 특별히 알려야 할 것 같아 여기 적어보오. 일본국 청년들의 시위하는 꼴이 범상치가 않소. 에키타스의 고바야시는 을미년 12월에 도쿄 신주쿠역 저자에서 한 시위 동영상을 보여줬소. 소인이 보기에는 시위하는 투가 케이블TV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견줄 만하오. “세금 쓰고 빈곤 없애라!” “최저임금 1500엔으로 올려라!”를 랩으로 하오. 운율이 썩 좋소. 시위대 앞쪽에는 트럭에 올라탄 DJ가 음악을 틀고, 그 옆엔 머리를 괴상하게 부풀리고 풍선으로 만든 쇠사슬 목걸이를 걸친 고바야시가 랩을 선창했소. 트럭 양옆에는 금색 풍선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소. 선대 통신사들이 전한 반세기 전 일본국의 시위 문화와 달랐소. 본국의 것과도 차이가 났소.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깃발을 나부끼며 주먹을 치켜드는 모습은 없었소. “빈곤이라고 하면 돈이 없고 불쌍한 행색이 떠오르는데 우리는 너무 비참한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화려한 시위를 기획했다”는 게 이 시위를 기획한 청년들의 설명이었소.
이 젊은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잘 써먹는다오. 시위를 하면 바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고,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시위를 방방곡곡에 알리더이다. 틴즈소울이 21일 트위터에 올린 안보법안 반대시위 전단을 보면 7명의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서 있는데 흡사 광고모델처럼 세련되기 짝이 없소. 시위나 행사 일정은 100명이 넘는 청년들이 참여하는 모바일 메신저 라인(LINE) 대화방에서 공지되오.
이들 단체는 평등하게 운영되더이다. 우두머리도 딱히 없소. 활동은 함께하되 직함은 없고, 모두 ‘회원’이오. 더군다나 실즈는 오는 7월 해체를 계획하고 있소. 실즈의 한 회원은 “실즈의 활동이 특별한 것으로 비치는 것 같아 조직을 해체하기로 했다”며 “일반 청년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고 했소. 역관 오오쿠사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자신도 한 명이라며 거들더이다. “시위에 나오는 건 일본 청년의 극소수지만 이런 시위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위도 안 하면 원전과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정부와 사회에 전달이 안되는 거니까요. 빙산의 꼭대기가 바다 위에 보인다는 건 그 밑에 엄청난 크기의 빙산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잖아요. 시위는 사실 그게 목적인 거죠.”
#2. 잊혀지지 않는 상처, 후쿠시마
동쪽 대지진 직후 행동파가 된 일본국 청년들 중 상당수는 피해지역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소. 소인은 역관을 데리고 변고가 일어난 현장을 찾았소. 소인도 사지가 벌벌 떨리더이다. 원전사고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로 행차를 서둘렀소.
“지금 이 인터뷰를 하면서도 울 것 같아요….” 이시하라 유코(26·가명·여)의 눈은 어느새 빨개져 있었소. 그이는 “원전사고는 아직 제 안에서 해결되거나 극복되지 못한 문제”라며 신묘년 3월11일을 아직 잊지 못한다고 했소. 당시 야마가타현의 대학에 다니던 이시하라는 합창부원들과 연습하다 엄청난 강도의 지진을 느꼈소. 숙소로 돌아가 상황을 파악해보니 고향집에서 6㎞가량 떨어진 후쿠시마 원전에 변고가 있음을 알게 됐다는구려. 이시하라가 가족들과 연락하는 데만 족히 이레가 걸렸소. 이시하라는 “계속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맨날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이 방사능 피해를 입었을지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다”고 했소.
이시하라는 당시 취업활동을 시작해야 할 대학교 3학년이었으나 준비한 겨를도 없었소. 주변 일본인들의 냉담한 반응에 이시하라의 마음엔 상처만 남았소. “같이 뉴스를 보면서도 친구들의 반응이 너무 무관심해서 괴로웠다. 그냥 단순히 ‘심하네~ 무서워~’라고 하더라. 그런 반응이 저는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이다. 이시하라 가족은 변고 이후 여러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여관을 전전했소. 원래 건설업에 종사하던 이시하라 부친은 원전사고 제염 작업 자리를 하나 구했소. 이시하라도 몸이 좋지 않은 모친을 돌보며 고리야마시에서 일을 하고 있소. 소인이 보건대,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앞서는 듯했소.
자원봉사를 왔다가 아예 이 지역에 눌러앉은 청년들에 대해서도 기록할 필요가 있다보오. 처음엔 막연히 뭔가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급하게 후쿠시마로 온 청년들은 이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서 스스로 남을 것을 결정했소. 현재 후쿠시마현 다무라시에는 20~30대 젊은이 12명이 모인 패 ‘다무라시 부흥 응원대’가 있소. 이 패들은 인구 감소를 줄이기 위한 지역 특산품 개발 사업 등에 골몰하고 있소. 후쿠시마 지역 재생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이 단체 ‘빈즈후쿠시마’의 이와사키 다이키(39)는 “지진 이후 실제로 도쿄에서도 전기가 끊겼고 자기들이 쓰는 에너지가 이 지역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들이 오고 있다”며 “버블경제 붕괴 후 격차사회 안에서 자기 진로에 대한 고민에 몰두하던 청년들이 원전사고 이후 사회라는 구조 속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소. 5년째 도쿄에서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로 자원봉사를 가고 있는 대학생 미야시타 유야(23·가명·여)는 “지금 자원봉사를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청년들”이라며 “가서 청소만 해도 도움이 되니까 나도 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고 하더이다.
#3. 청년 위한 정치는 없다
“머리로는 정치가 얼마나 내 생활에 영향이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만 실제로 내가 투표를 해서 생활이 바뀐 적이 없고 바뀔 것 같지가 않아요. 내가 투표를 하는 건 커다란 수영장에 꿀을 한 숟가락 넣는 것 같은, 다 희석돼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인 거죠.”
4일 저녁 도쿄 신바시역 근처 다방에서 만난 일본국 직장인 야마구치 다쿠야(27·가명)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주워 섬겼소. 선거 때마다 야당에 투표해도 천지는 고요하더란 것이오. 그이는 “정책을 하나하나 살펴보거나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다”고 했소. 검은색 양장에 넥타이를 졸라맨 것이 퇴근한 지 얼마 안된 듯했소. 야마구치 왼쪽에 앉은 2년차 대기업 영업직 사원 이노우에 마리나(25·가명·여)도 검은색 양장을 입은 채였소. 썩 말쑥하더이다. 이노우에는 20살 때 첫 선거를 일컫는 ‘기념선거’ 한 번을 제외하곤 투표에 참여해본 적이 없다했소. “선거는 TV 속의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오. “선거가 나한테 어떤 영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나한테 주어진 환경에 사실 불만이 없거든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갈망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앞에 앉아 있던 다카마사 마쓰우라(38)가 말을 보탰소. “아마 이런 의견이 일본 청년의 80%일 거예요.” 다카마사는 청년 비영리민간단체(NPO)법인 블라스트비트의 우두머리요. 이날 만난 두 젊은이들과 소싯적 함께 일을 했다하오.
“한국 청년들은 그래도 저항의 목소리를 역동적으로 내지 않나요? 언론에 나오는 것 보면 정치에 관심이 많고 시위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역관 오오쿠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콱 막혔소. 이 양반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취업준비생인 본국의 죽마고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소. “주변을 봐봐. 학생운동 열심히 했던 애들 다 망했잖아. 다들 취업 안되고 백수다. 그때 시위 안 했던 애들은 학점 관리를 잘해서 삼성 들어가고 끝까지 싸웠던 애들은 지금 다 고생한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무언가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이 되는 것이오.
한 한국 대학생은 “시위의 의제도 마음에 들고 방식도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아무리 말을 해도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학생 신분이니까 최우선이 학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청년 문제를 꼭 청년이 말해야 하는 게 아니라 청년을 위해서 말해줄 사람이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소.
소인이 생각하건대, 청년을 위한 정치가 없소. 본국이나, 일본국이나 마찬가지요. 사료를 보면 1960년대 일본국 고등학생의 시위는 폭력시위로 이미지가 굳혀졌고, 문부과학성은 학교 안에서 정치를 의논하거나 집단행동하는 것을 억제해왔소. 학교 현장에서는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고, 위정자들은 다 나이 든 사람들뿐이오. 소인의 또 다른 친우는 이렇게 말하였소. “돈 있는 것들은 안 나서고, 내가 나서야 되는데 난 사실 집회에 나갈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근데 키보드는 공짜잖아. 그래서 키보드로 헬조선을 치고 있는 거야.” ‘나서봤자…’라는 생각은 한·일 청년 다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더이다.
관찰 결과,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성세대가 조성해놓은 환경에 대한 불만이 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오. 일본도 세대 갈등의 조짐이 보이고 있소. 다카마사는 “기성세대는 대기업에 들어가 문제의식 없이 그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는 게 당연한 세대였지만 버블붕괴 이후 청년들은 이 같은 삶에 의문을 품고 있다”며 “일종의 세대 갈등”이라고 말했소. 을미년에 있던 오사카시 주민투표도 기록할 만한 사건이오. 와세다대 학생 사토 가케루(23·가명)는 “오사카 선거에서 고령자층과 청년층의 의견이 갈라졌고 결국 고령자층이 이겼다”며 “청년층의 의견이 반영되지 못한 것을 보고 우리의 한 표가 이렇게 약한 거구나라는 것을 느낀 사건”이라고 했소.
오는 7월 일본은 참의원 선거를, 4월 한국은 총선을 앞두고 있소. 특히 일본은 올해부터 선거연령이 만 20세 이상에서 만 18세 이상으로 낮춰졌소. 양국 정치권의 청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것이오. 청년을 위한 정치가 없다고 말하는 청년들이 두 선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참으로 기대가 되오.
병신년 2월, 전쟁과 같은 삶에 청년들의 시름이 깊어지자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옆 나라 일본국으로 통신사 파견을 결정한다. 정치를 혐오하던 일본 청년 아해들이 왜 갑자기 떼로 나섰는지 알아보라는 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 청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과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터였다. 조선통신사 정사로 임명된 이혜리는 명을 받잡고 일본국 출신 역관 오오쿠사 미노루와 함께 대한해협을 건넜다.
#1. 꿈틀거리는 일본 청년들
소인은 3일 일본국의 심장에 당도하였소. 날이 밝자 역관 오오쿠사를 대동해 도쿄 시부야역 저잣거리로 향했다오. 다방에서 약관을 갓 지난 마사키 준(21)을 만났소. 마사키는 본인의 스마트폰으로 트위터를 보여주더이다. 가입일이 신묘년(2011년) 3월12일. 일본국 동쪽에서 큰 지진이 발생한 다음날이었소. 당시 고등학생이던 마사키는 지진 정보를 얻으려 트위터를 시작했다 하오. 마사키는 소인에게 “동일본 대지진 전에는 고등학생이라 사회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지진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트위터를 하면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소. 마사키는 “시위에 나가는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고 생각할 만큼 시위와는 무관한 청년이었소. 그러다 계사년(2013년) 2월에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라는 단체가 헤이트스피치 시위를 하는 걸 보고 화가 나 저자로 나섰다오. 마사키는 처음엔 거리에서 재특회를 향해 “가라, 가라”와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조차 퍽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오. 하지만 마사키는 이내 움직이기로 했소. 잠꼬대로도 구호를 내뱉었다고 하오. 일본 조정이 특정비밀보호법을 강행처리한 계사년, 마사키는 일본 청년단체 ‘실즈(SEALDs)’의 전신인 ‘사스플(SASPL)’에 몸을 담았소.
소인이 보건대, 일본국 청년들이 꿈틀대고 있소이다. 1960년대 전학공투회의(전공투) 폭력 시위 이후 일본국엔 시위의 싹이 없었소. 버블경제가 붕괴한 1990년 이후 일본국 청년들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소. 프리터, 니트, 넷카페난민, 비정규직 등 청년의 고된 노동환경은 부각됐지만 청년이 주체인 적은 여태 없었소. 일본국 청년들은 한때 ‘스스로 뭔가 잘못을 해서 일이 이렇게 됐다’는 자기책임론을 믿었소. 하지만 이제는 다르오. 신묘년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그 계기가 됐소.
실즈의 선언문 첫 문장은 “우리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정치를 요구합니다”로 시작하오. “민주주의란 게 뭔데?” “헌법을 지켜라!” “평화를 지켜라!” 이들이 저자에서 외치는 구호엔 일본 사회가 그간 간과해 온 가치들이 함축돼 있소. 한 일본국 청년은 “한국에선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자주 쓰지만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실즈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나온 것은 굉장히 생소한 일”이라 말했소.
최저임금이나 노동문제 등 구체적인 사안에 천착한 청년단체도 잇따라 설립되고 있소. 을미년(2015년) 7월에 만들어진 에키타스(AEQUITAS)가 대표적이오. 소인이 자료를 찾아보니 현재 도쿄 최저임금은 907엔(약 1만원)이외다. 에키타스는 최저임금을 1500엔(약 1만6000원)까지 인상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소. 이들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사회참여를 시작했소. 에키타스에 몸담은 하라다 니키(26)는 원전사고에 충격을 받았다며 “도쿄에도 방사능이 날아왔다고 하니 공포도 느꼈고, 내가 뭔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일렀소. 대지진 당시 중학교 2학년생이던 고바야시슌이치로(19)는 “14살짜리 눈에도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꼈다”며 “사람의 생활과 정치의 연결성을 봤을 때 최저임금이 밀접하다고 생각해 단체를 만들게 됐다”고 했소.
최저임금이나 노동문제 등 구체적인 사안에 천착한 청년단체도 잇따라 설립되고 있소. 을미년(2015년) 7월에 만들어진 에키타스(AEQUITAS)가 대표적이오. 소인이 자료를 찾아보니 현재 도쿄 최저임금은 907엔(약 1만원)이외다. 에키타스는 최저임금을 1500엔(약 1만6000원)까지 인상하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소. 이들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사회참여를 시작했소. 에키타스에 몸담은 하라다 니키(26)는 원전사고에 충격을 받았다며 “도쿄에도 방사능이 날아왔다고 하니 공포도 느꼈고, 내가 뭔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일렀소. 대지진 당시 중학교 2학년생이던 고바야시슌이치로(19)는 “14살짜리 눈에도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꼈다”며 “사람의 생활과 정치의 연결성을 봤을 때 최저임금이 밀접하다고 생각해 단체를 만들게 됐다”고 했소.
일본국 고등학생들도 단체를 설립하는 것이 심상치 않소. 실즈의 고등학생 판인 틴즈소울(T-ns Sowl)도 있고 을미년 8월에는 고등학생유니온도 만들어졌소. 수도권청년유니온의 우두머리 진부 아카이(33)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생겨 반원전 시위나 안보법안 시위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자기 생활에 밀접한 부분에도 눈을 돌리게 됐다”며 “시위에 참여했던 청년들이 이후에 사회로 나가 일본 사회의 모순점들과 직접 부딪히게 되면서 최소한 노동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고 했소.
이것만은 특별히 알려야 할 것 같아 여기 적어보오. 일본국 청년들의 시위하는 꼴이 범상치가 않소. 에키타스의 고바야시는 을미년 12월에 도쿄 신주쿠역 저자에서 한 시위 동영상을 보여줬소. 소인이 보기에는 시위하는 투가 케이블TV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견줄 만하오. “세금 쓰고 빈곤 없애라!” “최저임금 1500엔으로 올려라!”를 랩으로 하오. 운율이 썩 좋소. 시위대 앞쪽에는 트럭에 올라탄 DJ가 음악을 틀고, 그 옆엔 머리를 괴상하게 부풀리고 풍선으로 만든 쇠사슬 목걸이를 걸친 고바야시가 랩을 선창했소. 트럭 양옆에는 금색 풍선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소. 선대 통신사들이 전한 반세기 전 일본국의 시위 문화와 달랐소. 본국의 것과도 차이가 났소.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깃발을 나부끼며 주먹을 치켜드는 모습은 없었소. “빈곤이라고 하면 돈이 없고 불쌍한 행색이 떠오르는데 우리는 너무 비참한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화려한 시위를 기획했다”는 게 이 시위를 기획한 청년들의 설명이었소.
이 젊은이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잘 써먹는다오. 시위를 하면 바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고,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시위를 방방곡곡에 알리더이다. 틴즈소울이 21일 트위터에 올린 안보법안 반대시위 전단을 보면 7명의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서 있는데 흡사 광고모델처럼 세련되기 짝이 없소. 시위나 행사 일정은 100명이 넘는 청년들이 참여하는 모바일 메신저 라인(LINE) 대화방에서 공지되오.
이들 단체는 평등하게 운영되더이다. 우두머리도 딱히 없소. 활동은 함께하되 직함은 없고, 모두 ‘회원’이오. 더군다나 실즈는 오는 7월 해체를 계획하고 있소. 실즈의 한 회원은 “실즈의 활동이 특별한 것으로 비치는 것 같아 조직을 해체하기로 했다”며 “일반 청년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고 했소. 역관 오오쿠사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자신도 한 명이라며 거들더이다. “시위에 나오는 건 일본 청년의 극소수지만 이런 시위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위도 안 하면 원전과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정부와 사회에 전달이 안되는 거니까요. 빙산의 꼭대기가 바다 위에 보인다는 건 그 밑에 엄청난 크기의 빙산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잖아요. 시위는 사실 그게 목적인 거죠.”
#2. 잊혀지지 않는 상처, 후쿠시마
동쪽 대지진 직후 행동파가 된 일본국 청년들 중 상당수는 피해지역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소. 소인은 역관을 데리고 변고가 일어난 현장을 찾았소. 소인도 사지가 벌벌 떨리더이다. 원전사고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후쿠시마현 고리야마시로 행차를 서둘렀소.
“지금 이 인터뷰를 하면서도 울 것 같아요….” 이시하라 유코(26·가명·여)의 눈은 어느새 빨개져 있었소. 그이는 “원전사고는 아직 제 안에서 해결되거나 극복되지 못한 문제”라며 신묘년 3월11일을 아직 잊지 못한다고 했소. 당시 야마가타현의 대학에 다니던 이시하라는 합창부원들과 연습하다 엄청난 강도의 지진을 느꼈소. 숙소로 돌아가 상황을 파악해보니 고향집에서 6㎞가량 떨어진 후쿠시마 원전에 변고가 있음을 알게 됐다는구려. 이시하라가 가족들과 연락하는 데만 족히 이레가 걸렸소. 이시하라는 “계속 집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맨날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이 방사능 피해를 입었을지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다”고 했소.
이시하라는 당시 취업활동을 시작해야 할 대학교 3학년이었으나 준비한 겨를도 없었소. 주변 일본인들의 냉담한 반응에 이시하라의 마음엔 상처만 남았소. “같이 뉴스를 보면서도 친구들의 반응이 너무 무관심해서 괴로웠다. 그냥 단순히 ‘심하네~ 무서워~’라고 하더라. 그런 반응이 저는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하더이다. 이시하라 가족은 변고 이후 여러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여관을 전전했소. 원래 건설업에 종사하던 이시하라 부친은 원전사고 제염 작업 자리를 하나 구했소. 이시하라도 몸이 좋지 않은 모친을 돌보며 고리야마시에서 일을 하고 있소. 소인이 보건대, 분노보다는 허탈감이 앞서는 듯했소.
자원봉사를 왔다가 아예 이 지역에 눌러앉은 청년들에 대해서도 기록할 필요가 있다보오. 처음엔 막연히 뭔가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급하게 후쿠시마로 온 청년들은 이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서 스스로 남을 것을 결정했소. 현재 후쿠시마현 다무라시에는 20~30대 젊은이 12명이 모인 패 ‘다무라시 부흥 응원대’가 있소. 이 패들은 인구 감소를 줄이기 위한 지역 특산품 개발 사업 등에 골몰하고 있소. 후쿠시마 지역 재생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이 단체 ‘빈즈후쿠시마’의 이와사키 다이키(39)는 “지진 이후 실제로 도쿄에서도 전기가 끊겼고 자기들이 쓰는 에너지가 이 지역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들이 오고 있다”며 “버블경제 붕괴 후 격차사회 안에서 자기 진로에 대한 고민에 몰두하던 청년들이 원전사고 이후 사회라는 구조 속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소. 5년째 도쿄에서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로 자원봉사를 가고 있는 대학생 미야시타 유야(23·가명·여)는 “지금 자원봉사를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청년들”이라며 “가서 청소만 해도 도움이 되니까 나도 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고 하더이다.
#3. 청년 위한 정치는 없다
“머리로는 정치가 얼마나 내 생활에 영향이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만 실제로 내가 투표를 해서 생활이 바뀐 적이 없고 바뀔 것 같지가 않아요. 내가 투표를 하는 건 커다란 수영장에 꿀을 한 숟가락 넣는 것 같은, 다 희석돼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인 거죠.”
4일 저녁 도쿄 신바시역 근처 다방에서 만난 일본국 직장인 야마구치 다쿠야(27·가명)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주워 섬겼소. 선거 때마다 야당에 투표해도 천지는 고요하더란 것이오. 그이는 “정책을 하나하나 살펴보거나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다”고 했소. 검은색 양장에 넥타이를 졸라맨 것이 퇴근한 지 얼마 안된 듯했소. 야마구치 왼쪽에 앉은 2년차 대기업 영업직 사원 이노우에 마리나(25·가명·여)도 검은색 양장을 입은 채였소. 썩 말쑥하더이다. 이노우에는 20살 때 첫 선거를 일컫는 ‘기념선거’ 한 번을 제외하곤 투표에 참여해본 적이 없다했소. “선거는 TV 속의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오. “선거가 나한테 어떤 영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나한테 주어진 환경에 사실 불만이 없거든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갈망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앞에 앉아 있던 다카마사 마쓰우라(38)가 말을 보탰소. “아마 이런 의견이 일본 청년의 80%일 거예요.” 다카마사는 청년 비영리민간단체(NPO)법인 블라스트비트의 우두머리요. 이날 만난 두 젊은이들과 소싯적 함께 일을 했다하오.
“한국 청년들은 그래도 저항의 목소리를 역동적으로 내지 않나요? 언론에 나오는 것 보면 정치에 관심이 많고 시위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역관 오오쿠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콱 막혔소. 이 양반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취업준비생인 본국의 죽마고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소. “주변을 봐봐. 학생운동 열심히 했던 애들 다 망했잖아. 다들 취업 안되고 백수다. 그때 시위 안 했던 애들은 학점 관리를 잘해서 삼성 들어가고 끝까지 싸웠던 애들은 지금 다 고생한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무언가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미련한 사람이 되는 것이오.
한 한국 대학생은 “시위의 의제도 마음에 들고 방식도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아무리 말을 해도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학생 신분이니까 최우선이 학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청년 문제를 꼭 청년이 말해야 하는 게 아니라 청년을 위해서 말해줄 사람이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소.
소인이 생각하건대, 청년을 위한 정치가 없소. 본국이나, 일본국이나 마찬가지요. 사료를 보면 1960년대 일본국 고등학생의 시위는 폭력시위로 이미지가 굳혀졌고, 문부과학성은 학교 안에서 정치를 의논하거나 집단행동하는 것을 억제해왔소. 학교 현장에서는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고, 위정자들은 다 나이 든 사람들뿐이오. 소인의 또 다른 친우는 이렇게 말하였소. “돈 있는 것들은 안 나서고, 내가 나서야 되는데 난 사실 집회에 나갈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근데 키보드는 공짜잖아. 그래서 키보드로 헬조선을 치고 있는 거야.” ‘나서봤자…’라는 생각은 한·일 청년 다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더이다.
관찰 결과,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성세대가 조성해놓은 환경에 대한 불만이 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오. 일본도 세대 갈등의 조짐이 보이고 있소. 다카마사는 “기성세대는 대기업에 들어가 문제의식 없이 그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는 게 당연한 세대였지만 버블붕괴 이후 청년들은 이 같은 삶에 의문을 품고 있다”며 “일종의 세대 갈등”이라고 말했소. 을미년에 있던 오사카시 주민투표도 기록할 만한 사건이오. 와세다대 학생 사토 가케루(23·가명)는 “오사카 선거에서 고령자층과 청년층의 의견이 갈라졌고 결국 고령자층이 이겼다”며 “청년층의 의견이 반영되지 못한 것을 보고 우리의 한 표가 이렇게 약한 거구나라는 것을 느낀 사건”이라고 했소.
오는 7월 일본은 참의원 선거를, 4월 한국은 총선을 앞두고 있소. 특히 일본은 올해부터 선거연령이 만 20세 이상에서 만 18세 이상으로 낮춰졌소. 양국 정치권의 청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것이오. 청년을 위한 정치가 없다고 말하는 청년들이 두 선거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참으로 기대가 되오.
(...일단 한국도 지금 남말할 처지는 아니긴 한데)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후쿠시마 문제나 최저임금 문제야 그렇다쳐도, 안보법안이나 '헌법 사수'를 내세운다고는 하는데, 뿌리에 과거사의 망령이라는 괴물이 춤을 추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AGAIN 大正デモクラシー나 안되면 다행이게 'ㅅ'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