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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역사연구소] (브금주의) 아는 선에 한해서 오류를 잡아봅니다 : 도해 시리즈 '식문화의 역사'에 관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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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짤방은 특정 상황과 관계업ㅂ읍니다 'ㅅ'a>


학계에서 한 시대나 사건, 혹은 특정 분야에 대해 연구하면, 이를 ‘지식 소매상’들이 축약을 해서 대중들에게 역사적 지식을 알기 쉽게 전달합니다. 이를 통해서 사회의 지식 수준이 높아지고, 이를 기반으로 여러 창작물도 나오는 등, 역사적 지식의 전달은 여러 모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연구를 하면 으레 복잡한 변수나 요소 등의 퍼즐이 튀어나오게 마련이고, 이를 그대로 대중에게 전달하면 흥미를 잃을 것이 뻔한 바,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지식 소매상들’은 적절히 축약하고 생략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지식을 상품으로 취급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여년전의 문물과 관습과 문화도 다른데, 몇십년 몇백년전의 일을 완벽히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이마저도 현대의 문물을 기준으로 ‘축약’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도해 시리즈 중 ‘식문화의 역사’ 편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고대부터의 식문화에 대한 간단한 잡식을 다루는 책자인데, 본인이 전혀 – 혹은 덜 알고 있는 고대나 근세쪽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중세 쪽은 일본 책자의 고질적 문제인 초급 역사서의 동인지화가 심각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선, 눈에 뻔히 보이는 오류들 중

세가지만 잡아서 풀어보려고 합니다.



[1] 중세 초기? 어느 초기??? (No.056 / 122p)

아시다시피 유럽사에서의 중세는 - 물론 특정 분야마다 좀 틀리긴 하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동로마 제국의 멸망 (콘스탄티노플 함락)까지로 치고 있는데, 해당 책자에선 '중세 초기의 식탁에선 손을 씻는 물단지가 있었고, 손으로 먹는 당시 환경상, 물을 자주 교체해줬는데, 여기엔 그냥 물이 아닌 향이 나는 물로, 허브와, 오렌지 껍질, 월계수의 잎이 사용되었다’라고 언급합니다.

일단 손으로 – 정확히는 숟가락/칼과 손으로 먹었던 시대는 맞고, 식사예절이 지금과는 좀 다른 것도 사실이며, 요리가 교체될때마다 손씻는 물이 교체된 건 사실입니다.



문제는 오렌지인데, 당시 오렌지가 지금의 오렌지라는 보장이 어디있나요???


물론, ‘오렌지’는 고대 로마에서 잔칫상에 자주 올랐던 물건이고, 북아프리카에서 흘러들어와 잔칫상에 올라간 물건이긴 합니다. 다만 이당시 오렌지는 우리가 하는 Sweet Orange – 학명으로는 citrus sinencis 가 아닌, 감귤류에 속하는 그 무언가이지, 지금 먹는 오렌지가 아닙니다. 지금 먹는 오렌지는 15세기부터 보급되었지만, 말 그대로 보급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요리책에 등장하는때는 16세기 – 그러니까 1500년대였거든요. 이쯤에서 한 유물을 볼작시면…






플랑드르의 화가인 얀 반 에이크 (1390?~ 1441)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 (Portret van Giovanni Arnolfini en zijn vrouw [네덜란드어] Arnolfini Portrait [英])입니다. 1434년작인데, 저 양반들이 누군지는 지금 당장 알건없고(!?), 창문을 잘 보시면 오렌지(로 추정되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적어도 필사본식 회화가 아닌 사실주의적 회화에서 나오는 오렌지는 저 그림이 대표적인데, 저것만 가지고 당시 오렌지=지금의 오렌지라고 속단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파트의 큰 문제점은 그 중세 초기가 대체 언제인지 얘기조차 안하고 있다는 건데, 이책의 내용대로만 보면 16세기 아니면 시기불명입니다. 본문의 윗 띠지에 보면 ‘16세기 후반에 일본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일본인들이 젓가락으로 식사하는 걸 보고 놀랐지만, 당시 그들은 손으로 식사했다.’라는 말대로라면 1500년대 – 문제는 중세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1500년대에 끝납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혹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인데, 이때쯤되면 사실 중세라고 하기도 뭣합니다. 특정 분야에서 – 예를 들면 정치외교 분야에서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기점으로 해서 중세를 좀 더 길게 잡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중세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1500년을 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글을 떼놓고 봐도 문제는 남는데, 중세 초기라고만 했지, 년도조차도 안나와서, 추적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한마디로, 이 책자의 내용만 보고 ‘중세 초기에는 오렌지가 있었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2] 사족이 붙어있는 잔칫상의 배점기준 (No.057 / 124p)


해당 섹션에선 중세의 궁정요리에서 중요하게 여긴 요소는 ‘양>향과 색>맛’ 이런 순으로 언급하고 나와있는데, 맛이야 뭐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맛의 기준이 현대와 달랐기 때문에 맛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건 틀린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 당시 궁정요리에서 양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오히려 전제조건에 가까웠거든요.


무슨 말인가 하면, 잔칫상 – 특히 그 잔칫상이 봉신들이나 부하들을 대상으로 여는 게 아니라, 자신과 동급은 다른 곳의 정관계 인사 등 정치적으로 열리는 잔치라면 양은 무조건 많아야 합니다. 당시 많은 요리를 차려먹을 수 있다는 건 곧 부의 상징이였기 때문에, 상대방과 부하들에게 보란듯이 펑펑 쓰는게 당시의 미덕 중 하나였거든요.

그리고 이 당시엔 복지제도도 정립되지 않은 시기라 많은 빈민들은 이러한 잔칫상에서 남는 각종 요리들과 빵접시들을 받고 살았습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사후세계에서의 구원을 위해 부유층들에게 자선을 권장했고, 이러한 환경이 맞아떨어져서 잔칫상에서 요리를 많이 차리는 것은 ‘나는 부하들과 가신들과 내 영지의 백성들을 챙겨주는 부자다’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잔칫상에 많은 요리를 차리는 것은 자신의 명예와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였기 때문에, 잔칫상의 중요한 요소가 아닌 전제조건입니다.

사실 제일 중요한 요소는 향과 색입니다. 당시 향신료는 요리의 맛을 살려주는 역할이면서 방부제 – 정확히는 (생고기를 제외하면) 보존식 위주의 먹거리에서 나는 냄새를 가려주는 기능도 있는데, 안그래도 비싼 향신료가 맛과 향을 키워주니,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자리인 잔칫상에서 빠질 수가 없지요. 메나지에 드 파리에서도 ‘향신료는 일찍 넣으면 향이 달아나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넣어야 한다'라고 하거나, '향신료들을 잘 빻되, 체에 거르지 말라'는 것을 두번씩이나 강조한 구절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맛도 맛이지만, 향과 맛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향을 우선적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탓에 맛의 기준도 향신료가 좌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야 특정 컨셉을 잡고 요리를 하지 않는다면, 양념을 세게 할 필요는 없지만, 이 당시의 요리의 기준은, 한두개의 향신료를 적게 넣는다기보단, 여러 향신료를 (양이 적던 많던) 다양하게 사용하여 '향을 살려야' 맛있고 품격있는 고급 요리로 쳐줬습니다. 결국은 요리가 고급이냐 저질이냐는 향과 색이 좌우했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의 이미지는 뭐 이런 정도? (일부 대사에서 뭔가를 떠올리면 지는거임ㅇㅇ)>

그런 의미에서, 당시 궁정요리/고급요리에서 중요한 요소는

향과 색>양>맛(?) 이런 순으로 가야 합니다.


양이 우선이여야 했다면, 굳이 비싼돈 들여서 향신료들을 사와야할 이유도 없거니와, 후추알이 대용화폐가 되고, 정관계 인사들이 충성과 신의의 증표로 향신료들을 보낼 일도 없어야 하니까요.




[3] 접시와 빵접시의 관계 (No.0901 / 190p)


해당 파트에선 ‘빵접시가 종교적 이유로 사용되었고, 그러한 종교적 이유 – 그릇은 더럽다는 이유로 그릇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대사는 최대한 당시 상황에 맞게 구현되었습니다. (진짜로)>


이건 상식으로 봐도, 그리고 이전의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을 감안하더라도,

그당시 요리의 특성을 보더라도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인류는 각지에 문명을 일구면서 땅바닥에 고기나 채소, 나무열매를 땅바닥에 부려놓고 먹는것보다, 뭔가 깨끗해 보이는 물건에 올려놓고 먹는 게 더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오랜 경험끝에 알아냈고, 이렇게 발견된 식기는 좀더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지고, 여러 장식이 더해지면서 발전해갔는데, 이는 요리가, 그 옛날 날고기 부둥켜잡고 살던 그때에서 문화예술적 측면으로 발전한 과정과 일맥상통합니다.

물론 당시 다들 접시들은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농노들이나 빈민층들은 나무판을 불에 그을려서 우묵하게 판 판때기였지만, 높으신 분들과 좀 사는 집들은 제대로 된 접시들을 갖고 있었거든요. 문제는(?) 그 재질이 은이나 금과 같은 귀금속 – 아무리 못해도 주석이라는 겁니다. 안그래도 귀금속인데다가, 대부분 장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격이 상당히 센 물건들이였거든요.

잔칫상에 올라오는 요리들은 대부분 기름진 물건들입니다. 당시 세제 같은 것도 쓸만한 게 없었기 때문에, 귀금속 식기에 기름이 묻으면 당연히 모래로 씻어내야 했는데, 기름이 한두방울도 아니고, 기름투성이가 된 귀금속을 모래를 묻혀서 닦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안봐도 뻔합니다. 그렇다고 싸구려 나무토막(?!)을 잔칫상에 들고가는건, 체면을 중요시했던 당시 높으신 분들에겐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잔치는 대규모로 치러지기 때문에, 초대자 측이 돈이 넘쳐서 주체를 못하거나, 손님들 전부가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면, 당시 자기 식기는 자기가 챙겨오는게 예절이긴 한데, 이마저도 사람이 많으면 답이 없습니다. 한번 쓰고 아랫것들에게 버리는 일회용 빵접시가 매우 쓸모있지요. 게다가 (해당 책자에서도 나왔듯이,) 잔치가 끝나고 접시를 훔쳐가다가 걸려서 손모가지가 날라가는 양반들도 있어서, 도난방지를 위해서는 빵접시는 꼭 필요한 물건이였습니다.




한마디로, 빵접시가 쓰였던 이유는 종교 같은 문제가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 – 음식의 기름기를 흡수해서 요리를 담백하게 하고

귀중한 식기를 보호하는 목적이 컸지, 그까짓 종교 문제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저 파트는 13-15세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파트에서 ‘빵접시는 맛있긴 했지만, 먹는 빵이 따로 있어서 상류층은 먹지 않았다’라고 하는데, 사실 맛은 별로일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당시 상류층들은, 흰빵을 주로 먹었고, 저 빵접시는 흑빵이라서 손을 대기도 뭣했을테니까요. 아니, 사실은 맛은 있었지만이라는 말도, 현대의 시각을 기준으로 반영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과 그때의 빵이 같은 물건이라는 보장은 없거든요. 저번 포스팅에서 얘기한 사항이지만, 현재의 중세 유럽의 요리 레시피는,  식재료의 변화(와 품종의 개량), 그리고 달라진 미각의 기준 등으로 현대적으로 강제적으로 어레인지된 물건이 대부분입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횟집에서 회가 맛있다고 회먹고, 남은걸로 매운탕을 끓이면 끓였지

접시에 깔린 무채까지 먹진 않잖아요!!!!

당시 빵접시를 맛있어도 안먹겠다는건, 현대에서 횟집에서 무채나 전사채까지 먹는 격입니다.


물론 횟집의 무채야 관리만 잘하면, 재활용도 안되고, 먹어도 된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먹진 않잖아요 'ㅅ'


그리고 책자에선 ‘접시는 종교상 더럽다’라고 해놓고 ‘빵접시는 테이블 위에 놓지 않았고, 목판/주석판 위에 올려놓고 먹었고, 그게 위생적이였다’라고 하는걸 보면, 앞뒤도 맞지 않습니다. 해당 파트의 삽화에서는 13-15세기의 상황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선 간단하게 논파가 가능합니다. 당시 필사본 문서들에 있는 세밀화를 보면 되지요. 물론 작화 상태(?)가 시대가 시대인지라 좀 그렇긴(!?) 하지만, 알아보는 데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바이유 테페스트리에서 묘사된 각종 접시들>

<리처드 2세와, 요크 공작, 글로스터 공작, 아일랜드 공작과의 정상회담 (1386>






<기타 다른 필사본 세밀화들>



<뭘봐 시발!? 빵접시가 메탈릭색이라고 존내 무시하냐???? (!?!?!?!?)>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설마 필사본이 거짓말을 하겠어요'ㅅ';;??


아니면 새로운필사본을쓰는모임이라등가 아니면 1333 왕정필사본사태라등가 'ㅅ' (?!?!?!?!?)


[4] 하나로 충분한가? (No.085 / 180p)


해당 파트에선 큰 오류는 없는데, 몇가지 더 보충을 해야 균형(?)이 맞을 겁니다. 해당 책자에선 비앙데 (Le Viandier de Taillevent [彿] : 1300?) – 그러니까, 저번 포스팅에서 기욤 티렐(Guillaume Tirel : 1310? ~ 1395)을 언급하면서 나온 책인데, 이 책 말고 적어도 둘은 더 들어가야 합니다. 예전 연재포스팅에 언급했던 메나지에 드 파리(Le Ménagier de Paris [彿], 1393)와 요리의 형식(The Forme of Cury [英], 1390)이라는 책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비앙데는 당시 프랑스 왕실의 궁정요리 기록이고, 분명히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왕실 내부 문서에 가깝지, (왕가나 귀족 같은 높으신 분들보다) 하류층들에게 보급하기 위한 물건이 아닙니다. 메나지에 드 파리 같은 경우는 이런 틈새를 노린 발간물인데, 당시 높으신 분들을 흉내내서 멋들어지게 살고 싶어했던 ‘신분만 상류층이 아닌 사람들’에게 높으신 분들처럼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자 – 그러니까 당시 고급 요리들의 레시피, 주요 정육점의 위치 등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리의 형식은, 꽤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책자고, 개정판도 400여년이 두어번 정도 있어서, 당시 어떻게 차려먹고 살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물론 해당 파트에서의 지면상 모든 걸 다 실을 수 없지만, 행여나 중세 유럽의 요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적어도 세 책자 정도는 알아두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다행인 건 요리의 형식은 현대 영문판으로 팝니다.)








<비록 링크는 없어졌지만, 목격자가 셋이다ㅇㅇ>


여러분. 벽돌로만 성채를 쌓을 수는 없습니다.

도해 시리즈와 같은 책자와 함께 다른 서적과의 교차검증도 필요합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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