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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정치위원회의 성명서] 오늘은 6.29 선언 주년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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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7년 6월10일 그날 그곳에 있었던 이종훈, 어머니 김정자

1987년 봄 어머니는 몇 번이고 아들이 있는 구치소를 찾아 나섰다. 서울 성동구치소, 경북 청송구치소, 전남 장흥구치소….

거리가 멀어도 상관없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호헌조치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민주화 열망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왔다가 이내 잡혀가곤 했다.

어머니들은 꼭 ‘캔 음료’를 들고 면회를 갔다. 면회는 안됐지만 구치소 밖에서 캔으로 바닥을 두드리면 그 소리를 듣고 젊은이들은 ‘우리 어머니가 오셨구나’ 하며 힘을 얻었다고 한다.

최루탄 맞고 쓰러진 이한열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경찰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함께 시위하던 이종창씨가 부축해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장면은 정태원 전 로이터통신 특파원이 찍었다.



올해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아들과 어머니는 다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아 ‘6월항쟁’을 노래한다. 6월항쟁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종훈씨(46)와 그의 어머니 김정자씨(71)는 10일 서울광장에서 선보일 ‘시민합창단’ 공연에 자원했다.

지난 7일 이씨와 어머니 김씨를 만났다. 이들은 “벌써 25년 전 이야기”라면서도 그때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씨는 “그해 5월23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전두환 정권은 이미 끝났다는 분위기였고 잡혀가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서울 종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고 했다. 그는 “이전까지만 해도 경찰이 오면 시위하다 도망가고 그랬지만 그때는 두려운 게 없었다”며 “경찰서 들어가서도 잘못했다고 하지 않아 혼자 구속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대학 2학년이라 앞장서 시위를 이끌지는 않았지만 민주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말했다.

이씨 가족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의 한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새벽이면 모르는 사람들이 담을 넘어와 이씨의 소재를 묻곤 했다. 김씨는 “경찰이나 정보기관 사람들이 이웃들에게도 우리집 소식을 묻고 가는 걸 보고 처음엔 무서웠다”며 “막상 시위에 나가 보니까 내 아들이 자기 이익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다른 어머니들과 함께 대학에 먹을 것을 배달하거나 구치소 뒷바라지를 했다. 김씨는 거리시위에도 자주 나갔다. 남편은 “호적에서 빼버리겠다”며 아들의 시위를 말렸다. 김씨가 “애들이 옳다”며 쫓아다니자 어느 때부턴가 남편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이씨는 6월항쟁이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지만 많은 부분이 아쉬웠다고 했다. 그는 “군사정권을 바꾸고 국민주권을 실현해야 한다는 열망이 모인 정점이 직선제였다”며 “그런데 막상 직선제는 됐는데 민주화 세력이 분열하고, 권력이양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패배의식 같은 게 남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 모자(母子)는 직선제 이후 6번째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올해까지도 6월항쟁의 과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이씨는 “이전 정권도 최선은 아니었지만 현 정부 들어 많이 망가졌다”며 “말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고 했다.

6월항쟁 25주년을 맞아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시민합창단’ 공연에 함께 참가하는 김정자(왼쪽)·이종훈씨 모자가 7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6월항쟁의 기억을 얘기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씨는 현재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원무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녹색병원에는 직업병 환자나 서민들이 주로 찾는다”며 “최근 몇 년간 이들을 지탱해주는 사회안전망이 해체됐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이 낮은 환자들이 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복지체계가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씨는 “새 국회에 6월항쟁에 참여했던 386세대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며 “25년 전에는 독재에만 저항하면 됐지만 지금은 기대하고 바라는 국민들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부자들에게만 세금 혜택이 돌아가고, 저축은행 사건에서 보듯 서민생활이 점차 힘들어지면서 희망이 사라져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또 “새 국회, 새 정권에선 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시민합창단에서 김씨와 이씨는 각각 소프라노와 베이스 파트를 맡았다.

김씨는 “자식 덕에 내가 사회에 눈을 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한다”며 “그때로 돌아가도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합창단에 들어가 그 시절 노래들을 부르니 가슴 뭉클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날이 오면’을 다시 부른다. 당시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다시 끄집어내야 하는 상황이 된 건 아쉽다”고 했다. 그는 “최소한의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가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시민들은 다시 분노하고 거리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다시피, 오늘은 저 흉악무도한 독재자에게 항복을 받아낸 날이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로운 사회의 한 축을 만들어낸 날이기도 합니다.

당시엔 직선제 하나만 ...

아니, 최규석의 말을 빌자면 백지 한장을 받아낸 것 뿐이지만

지금 이렇게 한국이 발전한 것은 일제강점기때 제국주의자 파시스트들과 맞서싸운 독립운동가들과

'1950년 김일성의 난'때 자신의 이웃과 식구들을 지킨 호국영령들

그리고 독재와 맞서싸운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2]

[경향신문] 전두환, 육사 생도 열병식 ‘사열’ 논란

전두환 전 대통령(81)이 육군사관학교 생도의 열병 행사를 참관하는 과정에서 ‘사열’(부대 훈련 정도, 사기 따위를 열병과 분열을 통하여 살핌)을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을 주도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선고받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 8일 부인 이순자 여사, 손녀를 대동하고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호용 전 내무부 장관 등 5공 핵심인사들과 함께 서울 공릉동 육사를 방문해 사관생도들 퍼레이드를 참관했다. 당시 생도들의 “우로 봐” 구호에 다른 참관자들은 박수만 쳤으나, 전 전 대통령은 거수경례로 답했다.

육사 수뇌부는 전 전 대통령을 ‘임석 상관’인 육사 교장 옆에 앉게 했고, 의전용 테이블까지 마련하는 등 배려했다. 육사 측은 “전 전 대통령이 군 출신이고, 대통령을 지내 습관적으로 (거수경례를) 한 것 같다”고 전했다. 전 전 대통령은 만찬에서 “축배를 한 잔 해야겠다. 여러분의 건강과 소원 성취를 위하여”라고 제의까지 했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8일 육군사관학교 행사에서 육사 생도들이 “우로 봐” 구호를 외치자 거수경례로 화답하고 있다. | jtbc 화면캡처



전 전 대통령의 이 같은 행태는 논란을 불렀다. 더욱이 이런 사실이 알려진 10일은 전두환 정권 독재에 항거한 ‘6·10 민주항쟁’ 25주년이어서 비난 여론이 거셌다. 누리꾼들은 “내란죄 확정 판결을 받은 자가 사열한 것은 반국가행위”라고 비판했고, 5·18기념재단 등 5월단체들도 “5공 부활극이다. 육사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런 일이 재발돼서는 안된다”고 비판했다.

군 수뇌부가 한국 민주주의를 질식시킨 쿠데타 세력으로 하여금 육사 생도의 경례를 받게 했다는 점도 도마에 올랐다. 진보논객인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트위터에 ‘전두환 육사 생도 사열, 일파만파’라는 제목의 글에서 “국군의 수뇌부가 될 사람들이 내란수괴에게 경례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전 전 대통령 일행은 ‘육사발전기금’ 200억원 달성 기념행사에 참석한 뒤 생도 열병식을 봤다. 육사 측은 “전 전 대통령은 1994년 1월부터 1995년 1월까지 총 1000만원의 기금을 냈다”고 전했다. 전 전 대통령은 2003년 재판에서 ‘금융자산이 예금 29만원’이라고 신고한 바 있다. 전 전 대통령은 1997년 대법원이 선고한 뇌물죄 추징금 2205억원 중 1673억원을 내지 않고 있다.

육사 관계자는 “전 전 대통령 등은 사열한 게 아니라 매주 금요일 일반인에게도 공개되는 ‘화랑 의식’을 참관한 것”이라며 “당일 초청자 160명뿐 아니라 시민 등 400명이 같이 지켜봤다”고 해명했다.

민주통합당 박용진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국가반란세력을 초청한 육군사관학교장을 해임조치하고 김관진 국방장관은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밝혔다.

앞서 육사에서 발행하는 신문인 ‘육사신보’는 2006년 6월7일자에서 전 전 대통령이 육사 생도들을 사열하고, 생도 대표들과 간담회를 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경향신문] 전두환, 노태우 국립묘지 안장도 가능하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육군사관학교 ‘사열’이 논란이 되는 가운데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등이 사후에 국립묘지 안장도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 ‘내란죄’ 전과가 있지만 국립묘지 안장대상으로 심사를 받는데는 제약이 없어, 안장대상심의위원회만 통과하면 다른 호국영령들과 나란히 묻히게 된다.

두 전직 대통령은 1996년 대법원에서 군사반란 등 죄명으로 각각 무기징역과 17년형이 확정됐다. 1997년 12월21일 사면·복권됐지만, 2006년에는 다른 12·12 쿠데타 주역들과 함께 서훈도 취소됐다.

그러나 현행 법률상 두 전직 대통령은 사후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 국립묘지법이 별도로 명시한 ‘안장 불허 대상’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국립묘지법상 안장을 불허하는 경우는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 사람, 탄핵이나 징계처분에 따라 파면 또는 해임된 사람, 그 밖에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국립묘지의 영예를 훼손한다’고 인정한 사람, ‘국가 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국가유공자법) 79조 1항 1호 또는 3호에 해당하는 사람 등이다.

이 중 국가유공자법 관련 조항이 문제가 된다. 국가유공자법 제79조 1항은 범죄 행위가 있던 사람을 국가유공자법 적용 대상에서 배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호는 국가보안법 위반, 2호는 내란, 내란 목적 살인, 외환유치, 여적, 간첩, 전시군수계약 불이행 등 형법 위반, 3호는 살인, 존속살해, 미성년자 약취 유인 등 형법 위반, 폭력 등 1년 이상 유기징역 등이다.

국립묘지법 제4항은 국가유공자법 제 79조 1호 또는 3호만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 때문에 2호에 해당하는 내란죄를 저지른 두 전직 대통령은 국가유공자는 될 수 없지만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는 배제되지 않는다. 원래는 반국가행위법 위반자의 국가유공자 지정 불허를 규정했던 79조 2호가 1996년 위헌판결로 사라졌다가 국립묘지법 제정(2005년) 이후에 다시 만들어지면서 허점이 생긴 것이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징역이나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 받은 경우 국립묘지안장심의위원회에서 안장 심사를 할 수 있다”며 “두 전직 대통령 사후 유족이 원한다면 심사대상으로 올라가는 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유공자법 79조 2호 문제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지적이 됐지만 안장심의위원회에서 문제 인물들을 거를 수 있다고 판단해 개정을 추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장심의위원회가 두 전직 대통령 국립묘지 안장을 막을 지는 미지수다. 안장심의위원회는 지난해 사회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제5공화국 경호실장을 지낸 안현태씨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결정한 바 있다. 안씨는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불법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로 1997년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국가보훈처는 “안씨가 특정범죄가중처벌법(뇌물죄)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월남전에 참전했고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내며 국가 안보에 기여한 점, 재향군인회 등이 건의서를 제출한 점을 고려해 안장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두 전직 대통령에게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논리다.


근데, 이런 거 보면, 진짜 걱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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