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나도 투표하고 싶다”](1) 50대 철근공 송기옥씨
ㆍ“하루벌어 사는 건설노동자들, 누가 일당 포기하며 투표하나”
경기 광주시에 사는 송기옥씨(57·사진)는 베테랑 철근공이다. 37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골조작업을 했다.
그는 매일 오전 5시 옷깃을 여미고 집을 나선다. 인력시장에 5시30분까지는 가야 일거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을 마치는 시간은 보통 오후 5~6시. 집에 돌아오면 6시가 훌쩍 넘는다.
송씨는 1일 “건설노동자들은 하루 일당을 포기해야 투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라의 지도자가 잘한다, 못한다 비판을 하려면 꼭 투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3분의 1 정도밖에 투표 참여를 못했다”고 말했다.
송씨에겐 휴일이 따로 없다. 눈비가 내리거나 자재가 준비 안돼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면 그날이 곧 휴일이다. 일년 365일 중 일할 수 있는 날은 180~200일 정도. 일당은 15만원 받지만 한 달 소득은 200만원이 채 못 된다.
그래서 더더욱 투표와 일당을 저울질하게 된다.
송씨는 “아침 일찍 나와 하루 종일 일하는데 어떻게 오후 6시까지 투표를 하느냐”고 했다. 그는 “투표 종료시간을 오후 6시까지로 한 것은 건설노동자는 이 나라 국민도 아니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법을 빨리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7대 대선에선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다. 현대건설 출신인 이 대통령이 건설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5년은 송씨가 기대했던 것과 딴판이었다. 그래도 송씨는 올 12월 18대 대선에서도 일당을 포기하고 투표를 하겠다고 했다.
송씨는 “하루 일당을 포기하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건설노동자들을 위해서라도 5년 동안 나라를 아무한테나 맡길 순 없다는 생각에 투표장에 가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송씨는 “건설노동자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며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은 농땡이를 부려도 티가 안 나지만 현장 노동자는 그게 다 티가 나고 금방 잘린다”고 말했다.
1남1녀 두 자녀를 두고 있는 그는 “건설노동자 중 자기 집 있는 사람들을 보았느냐”고 되물었다. 그도 집을 장만하는 데 20년이 걸렸다고 했다. 송씨는 “건설회사나 원청사의 수주가격은 올랐는데 건설노동자 일당은 20년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어 생활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며 “이번에 새롭게 뽑을 대통령이 우리 같은 서민들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주길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ㆍ“하루벌어 사는 건설노동자들, 누가 일당 포기하며 투표하나”
경기 광주시에 사는 송기옥씨(57·사진)는 베테랑 철근공이다. 37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골조작업을 했다.
그는 매일 오전 5시 옷깃을 여미고 집을 나선다. 인력시장에 5시30분까지는 가야 일거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을 마치는 시간은 보통 오후 5~6시. 집에 돌아오면 6시가 훌쩍 넘는다.
송씨는 1일 “건설노동자들은 하루 일당을 포기해야 투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라의 지도자가 잘한다, 못한다 비판을 하려면 꼭 투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3분의 1 정도밖에 투표 참여를 못했다”고 말했다.
송씨에겐 휴일이 따로 없다. 눈비가 내리거나 자재가 준비 안돼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면 그날이 곧 휴일이다. 일년 365일 중 일할 수 있는 날은 180~200일 정도. 일당은 15만원 받지만 한 달 소득은 200만원이 채 못 된다.
그래서 더더욱 투표와 일당을 저울질하게 된다.
송씨는 “아침 일찍 나와 하루 종일 일하는데 어떻게 오후 6시까지 투표를 하느냐”고 했다. 그는 “투표 종료시간을 오후 6시까지로 한 것은 건설노동자는 이 나라 국민도 아니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법을 빨리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7대 대선에선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다. 현대건설 출신인 이 대통령이 건설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5년은 송씨가 기대했던 것과 딴판이었다. 그래도 송씨는 올 12월 18대 대선에서도 일당을 포기하고 투표를 하겠다고 했다.
송씨는 “하루 일당을 포기하는 것이 가슴 아프지만 건설노동자들을 위해서라도 5년 동안 나라를 아무한테나 맡길 순 없다는 생각에 투표장에 가기로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송씨는 “건설노동자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며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은 농땡이를 부려도 티가 안 나지만 현장 노동자는 그게 다 티가 나고 금방 잘린다”고 말했다.
1남1녀 두 자녀를 두고 있는 그는 “건설노동자 중 자기 집 있는 사람들을 보았느냐”고 되물었다. 그도 집을 장만하는 데 20년이 걸렸다고 했다. 송씨는 “건설회사나 원청사의 수주가격은 올랐는데 건설노동자 일당은 20년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어 생활은 더 어려워지고 있다”며 “이번에 새롭게 뽑을 대통령이 우리 같은 서민들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주길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런걸 보면, 궁민핵교(?)에서도 가르치는 국민의 권리가 투표인데,
정략적인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국민의 권리신장(회복?) 차원에서
투표시간 연장은 바람직하다고 보며, 이게 왜 논란거리가 되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1人
정략적인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국민의 권리신장(회복?) 차원에서
투표시간 연장은 바람직하다고 보며, 이게 왜 논란거리가 되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1人
혹시...선관위의 '그날 투표는 그날 끝내야 함ㅇㅇ'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건 아닌 것 같고...'ㅅ')
[경향신문] [북한 인권, 진보와 보수를 넘어]2부 (3) 북한 인권 외면해 온 진보
ㆍ남한 인권에 앞장섰던 진보, 북한 인권엔 무관심·변명 ‘이중성’
“솔직히 진보진영은 북한 인권이라는 이름의 운동을 할 수 없게 돼 버렸죠.”
지난달 만난 한 진보적 인권단체 활동가는 인터뷰 후반 어렵게 고백했다. 독재에 맞서 남한의 민주화를 이뤄내고 이후 민중들이 고통받는 곳마다 현장을 지키며 인권을 돌보던 한국 개혁진보 운동 내에는 ‘북한 인권’이라는 불가사의한 공백이 있다. 한국 진보는 왜 북한 인권 딜레마에 빠졌을까.
남한에 사실상 첫 북한 인권 민간기구로 평가받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이 탄생했던 1996년. 설립자 윤현 이사장(82)은 창립 당시 “우리 사회의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많은 이들이 주사파를 의식해 북한 인권문제에 입을 다물고 있다”며 “통일 후 20만명에 이르는 수용된 정치범과 그 가족이 ‘우리가 죽어갈 때에 당신들은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북한 인권의 실상이 ‘고난의 행군’ 이후 남한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이미 진보진영은 북한 인권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 내에서 북한을 이성적으로 보는 부류보다 역사적, 즉 민족주의적으로 보는 부류가 다수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진보가 추구해 온 이념의 양축이었다.
당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등 이른바 운동권 내부에선 북한의 기근과 아사 상황에 대해 “과장된 이야기”라는 반응이 중론이었다. 한국의 운동권은 분단 상황으로 인해 민족해방(NL)진영이 주류였다. 이명준씨(35·<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저자)는 1990년대 후반 당시 운동권 내 북한 인권 담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씨는 “민족해방진영은 처음에 고난의 행군을 믿지 않았다”며 “이들은 북한이 남한보다 풍족하진 못하지만 사회주의 시스템이 모범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 사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진보의 담론을 점유하고 있던 민족해방 진영은 한국사회를 ‘미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했다. 북한을 해방운동의 정통성을 갖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60년 동안 투쟁하고 있는 우리의 또 다른 민족으로 봤다. 이들에겐 한국이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주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이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북한 인권은 불편한 이슈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 진보진영은 북에 인권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탈북자들의 고문 증언이 과장됐다’ ‘대북 지원 단체들이 국가보조금을 받기 위해 아사자의 수를 늘렸다’는 식이었다. 실제 북한 인권 실상이 전혀 과장과 왜곡 없이 유통된 것은 아니었지만 진보진영은 유독 북한 인권문제만 나오면 결벽증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인권·식량기구들의 조사로 북한 인권이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국제 공론화가 된 후에도 이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보진영은 북의 인권을 건드리지 않을 ‘인권적인’ 논리들을 개발해왔다. 한국이 북한 인권을 지적하는 것은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논리, 북한 정권이 3대 세습을 하는 것은 내부의 그럴 만한 체제적 사정이 있다는 내재적 접근, 남한의 인권 상황도 북한 못지않게 열악하다는 주장, 혹은 평화가 우선이라는 식으로 ‘보편적 인권은 주권에 앞선다’는 원리를 ‘진보적’으로 희석시켜 왔다.
이에 더해 대북 유화책을 펴느라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못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북한 인권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노선 대립은 더 선명해졌다.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을 공격하기 위해 인권 이슈를 더 물고 늘어졌고, 진보는 교류협력과 상호 신뢰구축이 인권을 해결하는 본질적인 방법이라고 대응했다. 또 사회권을 더 중시한 진보는 지원을 통한 생존권 해결을 더 우선하는 인권 과제로 봤다. 대북 포용정책을 통한 점진적인 인권 개선 방법은 실효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지난 8월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이 중국에서 만난 한 함경도 주민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남한의 무상지원과 차관에 대해 “전용이 되기도 하겠지만 물량이 많아진 덕에 쌀값이 내려가 주민들이 전보다 더 수월하게 쌀을 구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지난달 만난 30대 탈북자 김지원씨(가명)는 “법없이 살던 나라 북한에 건국 이래 만들어진 모든 법들보다 개성공단 지구법, 금강산 관광 관련법 등이 더 많았다”며 “포용정책은 실제 북한을 조용히 변화시켰다”고 얘기했다.
진보적 북한 인권 개선운동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연세대 문정인 교수(60)는 “대북 포용정책이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북한체제를 전환해야겠다는 보수적 인권개선 방식은 북한입장에서는 공격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진보진영이 소극적, 우회적 인권개선 방식을 고수하는 사이, 보수진영은 한국의 북한 인권 운동을 서서히 전유해갔다. 진보가 인권운동을 외면하고 보수가 적극 나선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현상이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유엔 인권위의 북한 인권 결의안 표결에 불참하고 2005년엔 기권하자 미국 주재 한국외교관들은 “북한 인권문제를 남북관계의 특수성으로만 설명하면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없다”며 “인권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 인권운동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보수는 진보진영을 ‘종북’으로 몰고 북한 인권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공교롭게도 북한 인권을 소란스럽게 외치는 이들은 과거 민주화운동 때 침묵하고 반공을 지지하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보수의 잘못된 주도가 진보의 나태에 대한 변명이 될 순 없다는 것이 인권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내 한 진보정당의 대표는 진보진영이 그동안 북한 인권운동에 가담하기 힘들었던 이유에 대해 “북한 인권이 국내에선 주로 남한 인권을 짓밟던 사람들에 의해 제기됐다”며 “국내에서는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남북관계는 오히려 악화돼 진보는 같은 운동을 하기가 힘들어졌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인권활동가는 “용산이나 평택 현장에 가면 사람들의 피드백(반응)이 있지만 북한 이슈는 그렇지 않다”며 “인권활동하는 입장에선 동력이 크게 생기기 힘들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인권연구가인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50)는 보수의 인권관 및 동기, 목적, 방법론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에 “일리가 있지만, 진정으로 건설적인 비판이 되려면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개입을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 5년. 북한 인권은 보수 정권과 보수 시민사회가 일방적으로 주도해버렸고, 진보진영은 더 멀리 와버렸다. 북한 인권문제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미 국제적인 현안이 돼버렸다. 올해 3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북한 인권 결의안을 표결 없이 채택했다. 2003년 유엔이 북한 인권 결의를 채택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보 내부에서 더 이상 북인권 문제제기를 유보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조효제 교수는 “인권에 정통한 진보진영이 북한 인권을 훨씬 더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정치부), 송윤경(사회부), 심혜리(국제부) 기자
ㆍ남한 인권에 앞장섰던 진보, 북한 인권엔 무관심·변명 ‘이중성’
“솔직히 진보진영은 북한 인권이라는 이름의 운동을 할 수 없게 돼 버렸죠.”
지난달 만난 한 진보적 인권단체 활동가는 인터뷰 후반 어렵게 고백했다. 독재에 맞서 남한의 민주화를 이뤄내고 이후 민중들이 고통받는 곳마다 현장을 지키며 인권을 돌보던 한국 개혁진보 운동 내에는 ‘북한 인권’이라는 불가사의한 공백이 있다. 한국 진보는 왜 북한 인권 딜레마에 빠졌을까.
남한에 사실상 첫 북한 인권 민간기구로 평가받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이 탄생했던 1996년. 설립자 윤현 이사장(82)은 창립 당시 “우리 사회의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많은 이들이 주사파를 의식해 북한 인권문제에 입을 다물고 있다”며 “통일 후 20만명에 이르는 수용된 정치범과 그 가족이 ‘우리가 죽어갈 때에 당신들은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북한 인권의 실상이 ‘고난의 행군’ 이후 남한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이미 진보진영은 북한 인권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 내에서 북한을 이성적으로 보는 부류보다 역사적, 즉 민족주의적으로 보는 부류가 다수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진보가 추구해 온 이념의 양축이었다.
북한 수재민들을 위해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가 지원하는 밀가루 500t을 실은 트럭들이 지난달 5일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개성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당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등 이른바 운동권 내부에선 북한의 기근과 아사 상황에 대해 “과장된 이야기”라는 반응이 중론이었다. 한국의 운동권은 분단 상황으로 인해 민족해방(NL)진영이 주류였다. 이명준씨(35·<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저자)는 1990년대 후반 당시 운동권 내 북한 인권 담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씨는 “민족해방진영은 처음에 고난의 행군을 믿지 않았다”며 “이들은 북한이 남한보다 풍족하진 못하지만 사회주의 시스템이 모범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 사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진보의 담론을 점유하고 있던 민족해방 진영은 한국사회를 ‘미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했다. 북한을 해방운동의 정통성을 갖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60년 동안 투쟁하고 있는 우리의 또 다른 민족으로 봤다. 이들에겐 한국이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주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이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북한 인권은 불편한 이슈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 진보진영은 북에 인권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탈북자들의 고문 증언이 과장됐다’ ‘대북 지원 단체들이 국가보조금을 받기 위해 아사자의 수를 늘렸다’는 식이었다. 실제 북한 인권 실상이 전혀 과장과 왜곡 없이 유통된 것은 아니었지만 진보진영은 유독 북한 인권문제만 나오면 결벽증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인권·식량기구들의 조사로 북한 인권이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국제 공론화가 된 후에도 이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보진영은 북의 인권을 건드리지 않을 ‘인권적인’ 논리들을 개발해왔다. 한국이 북한 인권을 지적하는 것은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논리, 북한 정권이 3대 세습을 하는 것은 내부의 그럴 만한 체제적 사정이 있다는 내재적 접근, 남한의 인권 상황도 북한 못지않게 열악하다는 주장, 혹은 평화가 우선이라는 식으로 ‘보편적 인권은 주권에 앞선다’는 원리를 ‘진보적’으로 희석시켜 왔다.
이에 더해 대북 유화책을 펴느라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못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북한 인권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노선 대립은 더 선명해졌다.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을 공격하기 위해 인권 이슈를 더 물고 늘어졌고, 진보는 교류협력과 상호 신뢰구축이 인권을 해결하는 본질적인 방법이라고 대응했다. 또 사회권을 더 중시한 진보는 지원을 통한 생존권 해결을 더 우선하는 인권 과제로 봤다. 대북 포용정책을 통한 점진적인 인권 개선 방법은 실효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지난 8월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이 중국에서 만난 한 함경도 주민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남한의 무상지원과 차관에 대해 “전용이 되기도 하겠지만 물량이 많아진 덕에 쌀값이 내려가 주민들이 전보다 더 수월하게 쌀을 구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지난달 만난 30대 탈북자 김지원씨(가명)는 “법없이 살던 나라 북한에 건국 이래 만들어진 모든 법들보다 개성공단 지구법, 금강산 관광 관련법 등이 더 많았다”며 “포용정책은 실제 북한을 조용히 변화시켰다”고 얘기했다.
진보적 북한 인권 개선운동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연세대 문정인 교수(60)는 “대북 포용정책이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북한체제를 전환해야겠다는 보수적 인권개선 방식은 북한입장에서는 공격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진보진영이 소극적, 우회적 인권개선 방식을 고수하는 사이, 보수진영은 한국의 북한 인권 운동을 서서히 전유해갔다. 진보가 인권운동을 외면하고 보수가 적극 나선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현상이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유엔 인권위의 북한 인권 결의안 표결에 불참하고 2005년엔 기권하자 미국 주재 한국외교관들은 “북한 인권문제를 남북관계의 특수성으로만 설명하면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없다”며 “인권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 인권운동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보수는 진보진영을 ‘종북’으로 몰고 북한 인권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공교롭게도 북한 인권을 소란스럽게 외치는 이들은 과거 민주화운동 때 침묵하고 반공을 지지하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보수의 잘못된 주도가 진보의 나태에 대한 변명이 될 순 없다는 것이 인권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내 한 진보정당의 대표는 진보진영이 그동안 북한 인권운동에 가담하기 힘들었던 이유에 대해 “북한 인권이 국내에선 주로 남한 인권을 짓밟던 사람들에 의해 제기됐다”며 “국내에서는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남북관계는 오히려 악화돼 진보는 같은 운동을 하기가 힘들어졌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인권활동가는 “용산이나 평택 현장에 가면 사람들의 피드백(반응)이 있지만 북한 이슈는 그렇지 않다”며 “인권활동하는 입장에선 동력이 크게 생기기 힘들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인권연구가인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50)는 보수의 인권관 및 동기, 목적, 방법론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에 “일리가 있지만, 진정으로 건설적인 비판이 되려면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개입을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 5년. 북한 인권은 보수 정권과 보수 시민사회가 일방적으로 주도해버렸고, 진보진영은 더 멀리 와버렸다. 북한 인권문제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미 국제적인 현안이 돼버렸다. 올해 3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북한 인권 결의안을 표결 없이 채택했다. 2003년 유엔이 북한 인권 결의를 채택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보 내부에서 더 이상 북인권 문제제기를 유보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조효제 교수는 “인권에 정통한 진보진영이 북한 인권을 훨씬 더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정치부), 송윤경(사회부), 심혜리(국제부) 기자
그런걸 보면, 예전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긴 했었지마는....
이 NL새끼들은 도움이 안되는 새끼들임.
이 NL새끼들은 도움이 안되는 새끼들임.
(물론 쌀보내는 건 반대는 안한다만) 쌀만 보내면 뭐함? 좃선로동당이 못믿을 쌍놈인데 'ㅅ'^
저따구 마인드니까 진보진영에 뻘건색 페인트 뒤집어쓰게 도와주고, 통진당 부정선거도 하고....(...)
[경향신문] 정부, 일본대사관 방화범 류모씨 일본에 범죄인 인도 청구
주한 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진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복역 중인 중국인 류창에 대해 법무부가 법원에 범죄인 인도구속 영장을 청구할 것으로 2일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정부는 국내법, 국제법, 인도주의적 원칙을 종합 고려한 끝에 류모씨를 일본 측에 범죄인 인도하는 절차를 밟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면서 “류씨에 대한 범죄인 인도를 위한 구속 여부가 결정되면 정부는 서울고법에 심사 청구를 하게 된다”고 밝혔다.
서울고법은 2개월 이내인 1월6일까지 류씨를 일본 측에 범죄인으로 인도할 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중국 정부는 류씨를 정치범으로 판단하면 범죄인 인도의 예외가 돼서 중국으로 보내줄 수 있다며 한국 정부에 요구해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법무부, 외교부 등이 참여한 관계부처 회의에서 ‘국내법, 국제법, 인도주의적 원칙’을 종합 고려한 끝에 사법부에 범죄인 인도 절차를 청구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고법이 류씨를 정치범으로 판단하면 정부의 판단이 번복될 수도 있다.
류씨는 지난 1월8일 서울 중학동의 주한 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져 구속돼 징역 10월을 선고 받았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그는 지난해 12월26일 일본 야스쿠니신사 출입구를 방화하려 한 것도 자신이라고 자백했다. 일본 정부는 범죄인 인도협약에 따라 한국 사법당국에 류씨의 신병 인도를 요구해왔다.
중국 정부는 지난 7월 멍젠주 공안부장이 방한했을 때 류씨의 중국행을 요청하는 등 고위급이 류씨에 대해 관심을 보여왔다. 류씨는 외조모가 중국인 조부와 결혼한 한국 출생의 일본군 위안부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한 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진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복역 중인 중국인 류창에 대해 법무부가 법원에 범죄인 인도구속 영장을 청구할 것으로 2일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정부는 국내법, 국제법, 인도주의적 원칙을 종합 고려한 끝에 류모씨를 일본 측에 범죄인 인도하는 절차를 밟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면서 “류씨에 대한 범죄인 인도를 위한 구속 여부가 결정되면 정부는 서울고법에 심사 청구를 하게 된다”고 밝혔다.
서울고법은 2개월 이내인 1월6일까지 류씨를 일본 측에 범죄인으로 인도할 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중국 정부는 류씨를 정치범으로 판단하면 범죄인 인도의 예외가 돼서 중국으로 보내줄 수 있다며 한국 정부에 요구해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법무부, 외교부 등이 참여한 관계부처 회의에서 ‘국내법, 국제법, 인도주의적 원칙’을 종합 고려한 끝에 사법부에 범죄인 인도 절차를 청구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고법이 류씨를 정치범으로 판단하면 정부의 판단이 번복될 수도 있다.
류씨는 지난 1월8일 서울 중학동의 주한 일본대사관에 화염병을 던져 구속돼 징역 10월을 선고 받았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그는 지난해 12월26일 일본 야스쿠니신사 출입구를 방화하려 한 것도 자신이라고 자백했다. 일본 정부는 범죄인 인도협약에 따라 한국 사법당국에 류씨의 신병 인도를 요구해왔다.
중국 정부는 지난 7월 멍젠주 공안부장이 방한했을 때 류씨의 중국행을 요청하는 등 고위급이 류씨에 대해 관심을 보여왔다. 류씨는 외조모가 중국인 조부와 결혼한 한국 출생의 일본군 위안부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사관에 화염병 던진 게 국제법상으론 범죄가 맞는데, 자꾸 변호해주고 싶네 'ㅅ')
딴 건 몰라도 야스꾸니 대딸방 화재는 너님이 잘못한 게 맞음. 화염병이 뭐임? 돈이 좀 들더라도 백린탄을 던졌어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