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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역사연구소의 문서고] [삼성언론재단] 슬픈 섬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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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언론재단] 슬픈 섬 '오키나와'

오키나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필자는 그랬다. 일본 가장 남단의 섬, 해변이 아름다운 휴양지, 장수(長壽)촌, 삶은 돼지고기…그리고 기자가 된 이후에는 외신을 통해 미군기지가 많아서 미군의 성폭행 사건과 주민들의 데모가 빈번한 곳… 그냥 ‘아름다운 섬이지만, 미군기지가 많아 골치 아픈 곳’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오키나와는 겉으로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깊은 슬픔을 안고 있는 섬이다. 역사적으로 일본 본토로부터 끊임없이 고통과 희생을 강요 당했고 지금도 계속 차별과 냉대를 받고 있는 곳, 일본이 감추고 싶은 모순과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 그리고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곳’이 오키나와다. 우리와 비슷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의 ‘한(恨)’과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는 섬이다.

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오키나와의 역사를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우선 오키나와는 17세기 초까지 일본이 아니었다. ‘류큐(琉球)’라는 국명을 가지고 중국과 대만, 조선과 일본본토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던 독립된 왕국이었다. 당시의 중국 왕조인 명 나라와 무역을 활발하게 했고 명 나라의 신하(臣下)나라로서 조공을 바치던 나라, 그래서 일본보다는 중국에 가까운 섬 나라였다. 그러나 일본이 통일된 직후인 1609년 일본 본토의 침략을 받고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경제적, 정치적인 일본의 속국으로 근근히 왕조를 이어가던 ‘류큐국’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 시대에는 아예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강제 편입돼 멸망한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힘없는 작은 섬나라로서 겪을 수 있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다. 바로 태평양 전쟁, 그 중 가장 치열했다는 이른바 ‘철(鐵)의 폭풍’ 오키나와 전투(1945년 3월~6월)다. ‘일본 영토 내’ 에서 일어난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최초이자 최후의 유일한 지상전인 오키나와전에서, 오키나와 주민은 공식적인 통계로만 10만 명이 죽는다. 이는 미군(1만)과 일본군 전사자(8만)를 합친 수보다 많은 규모이며,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된다.


<오키나와전 당시 징집된 일본 의용군-10대에서 70대까지>

오키나와 섬에서 배로 강제로 이동되다가 폭격을 맞고 숨진 주민 등을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5만 명에 달해, 전체 현(縣)민의 3분이 1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오키나와 대부분 가정의 기일(忌日)은 4월부터 6월 사이에 집중돼 있다고 한다.

이런 민간인 희생자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희생이 커진 이유와 내용이다. 미군과의 전투보다는“오키나와는 100% 희생해도 괜찮다”는 일본군 수뇌부의 전략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이다. 당시 오키나와 방위 부대인 일본제국 제 32군의 사명은 주민의 안전과 생명이 아니었다. 일본 본토,더 나아가 천황제를 지킨다는 이른바 ‘고쿠타이고지(國體護持:こくたいごじ)’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따라서 애초부터 오키나와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최대한 지구전을 벌인다는 계획이었고, ‘군관민 공생공사(共生共死)’라는 미명 하에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한 것이다.

전 주민을 강제 부역에 동원함은 물론, 수비대인 32군 부대의 3분의 1 가량을 오키나와 주민 의용대로  징집했다.그러다 보니 사진처럼 어린 소년이나 70대 노인까지 마구잡이로 군대에 끌려 갔다. 그럼에도 32군의 병력은 11만, 당시 강력한 화기로 무장한 전투병만 18만에 달하고 해군과 지원부대까지 포함하면 54만이나 됐던 미군의 상대가 결코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목적이 ‘승리’가 아니었던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폭탄을 안고 미군의 탱크로 뛰어들게 하는 등, 민간인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 버틴다. 당시 오키나와 주민은 일본 본토 방위를 위해 ‘버리는 돌’에 불과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광기와 공포에 휩싸인 일본군은 주민들을 미군의 스파이로 몰아 학살하거나, 총칼로 위협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강요한다. 이른바‘집단자결’, 아니 사실상 집단 학살이다. 그래서 오키나와 주민 수천여 명이 동굴 안에서 일본군이 건네준 수류탄을 터트리거나 농약 같은 극약을 먹고 죽는다.

더 비극적인 상황은 이런 방법마저 물품 부족으로 여의치 않으면, 가족과 친구끼리 맨손 또는 흉기-칼이나 몽둥이,농기 등-를 써서 서로의 생명을 빼앗았던 일이다. 부모가 아이를, 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아비규환 같은 처참한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은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이른바 ‘치비치리 가마 사건’-가마는 오키나와말로 천연 동굴-의 경우 생존자 55명 중 20명이 자신의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인 어머니라고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잘 안 되자, 차라리 미군에게 맞아 죽겠다고 동굴 밖으로 나왔는데 살아 남았다고 한다.

또 한 오키나와 노인은 최근 인터뷰에서 자식들과 부인을 교살(絞殺)하고 자신도 죽으려다 실패해 아직까지 살아 남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말 그대로 절절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생존자들은 당시 일본군이 위협하며 자결을 강요한데다, 미군에게 잡히면 탱크 밑에 깔리는 식의 더 처참한 죽음-실제는 일본이 중국에서 자행했던 만행-을 당할 것이라고 극도의 공포심을 불어넣었다고 한다. “일본군에게 죽거나, 미군에게 죽거나, 아니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밖에 없어 자결을 선택했다”고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그럼 왜 일본군은 주민의 죽음을 강요했을까 이유가 기가 막힌다.바로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차별과 불신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일본군 수뇌부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국가 충성도가 너무 약해, 미군의 포로로 잡히면 군사 기밀을 누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주민 대부분이 군 비행장과 진지 구축에 동원됐던 탓에, 군사시설의 위치를 알고 있어 불안해 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군 식량을 축 내지 말고 죽으라고 명령했다고까지 한다. 결국 필요할 때는 충성과 희생을 요구했지만, 실제로 오키나와 사람은 일본 국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끝내는 죽음까지 강요한 것이다. 일본군의 잔학성과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이다.

무수한 희생자를 낸 오키나와전이 끝나고 두 달도 안 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오키나와는 그러나 일본으로 되돌아 가지 못한다.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강제로 합병된 이민족 국가’로 규정하고 미 군정 하에 편입시킨 것이다. 이는 명목상일 뿐 실제로는 오키나와가 가진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미 태평양군 사령관인 맥아더가 오키나와를 중국을 견제하는 ‘천연 방어진’이라고 부른 것에서 보듯이, 오키나와는 미국 입장에서는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당시 천황제 유지가 절대절명의 당면 과제였던 일본 입장에서도 오키나와를 챙길 만한 여유는 없었다. 이후 6.25 전쟁과 중국의 공산화로 오키나와의 중요성은 더 커졌고, 미국은 오키나와에 군사력을 증강시킨다.

점령 이후 27년간 미군 통치를 받던 오키나와는 지난 1972년에야 다시 일본으로 ‘복귀’한다. 물론 미국이 순순히 내놓은 것은 아니다. 1960년대부터 주민들이 시위와 폭동 같은 거센 ‘일본 복귀운동’을 벌인데다,미국과 일본의 역학관계가 변하면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덕분이다.

당시 베트남 전 등으로 미국은 기세가 한 풀 꺾인 데다, 경제력이 커진 일본의 발언권도 세지면서‘오키나와 반환’협의가 가능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오키나와의 땅을 돈으로 사는 기이한 형태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되찾는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질곡의 역사는‘일본 복귀’로 끝나지 않는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모순은 크게 두 가지, 계속되는 일본 본토와의 차별과 역사왜곡의 문제다. 앞서 오키나와전에 나타난 것처럼 뿌리깊은 차별의식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든 면에서 오키나와를 ‘일본의 변방’에 머물게 하고 있다. 또 끈질긴 역사왜곡은 정신적인 면에서 젊은 세대들의 정체성(identity)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차별의 대표적인 것이 미군기지 존속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다. 오키나와는 면적으로 일본의 0.6%에 불과하지만 일본에 있는 미군기지의 75%가 오키나와에 집중돼 있다. 오키나와 전체 면적으로 따지면 10.6%나 되고, 대부분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군사 훈련을 위한 제한구역 등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섬의 균형적인 발전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다.

또 빈발하는 부녀자와 여학생 폭행사건, 전투기 또는 수송기의 이착륙과 각종 훈련으로 인한 소음과 폭음 등은 주민들의 생활에 큰 지장과 고통을 주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오키나와를 여전히 ‘버리는 돌’ 정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오키나와 사람들의 생각이다. 일본 복귀 후 본토 내 미군기지가 1/12로 줄어든 반면 오키나와내 기지는 2배로 늘었고, 최근에도 오키나와 미군기지 면적을 더 늘리는 쪽으로 미국과 협의를 하고 있다고 하니 이런 ‘피해의식’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 같다.

경제적 차별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오키나와인의 인식이다.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소득수준과 완전실업률이 가장 높은데, 일본 정부의 산업정책 탓이라는 것이다. 관광 이외에는 적극적으로 다른 산업을 유치하거나 육성할 의지가 없다 보니, 낙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 정부는 70년대 오키나와의 복귀 이후 투자한 자본 대부분을 해변가 리조트 단지 조성에만 썼다. 지자체가 나서 지난 90년대 후반부터는 IT산업과 국제 회의 유치 등에 온 힘을 쏟고 있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결국 먹고 살 것은 관광과 미군 기지 관련 수입-아이러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밖에 없고, 이 수익마저 상당부분이 본토로 회수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민족도 다르고 가난한 오키나와인’이다 보니 사회적 차별도 크다. 특히 취직이나 결혼 등에서 유무형의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한다.그래서 스포츠와 연예계로 진출하는 사람이 두드러지게 많은데, 지난 90년대 일본 슈퍼스타 중의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는 가수 아무로 나미에를 필두로 영화 ’링’과 드라마 ‘고쿠센’으로 유명한 나카마 유키에, 영화 ’스윙걸스’의 마에하라 에리, 그룹 스피도와 오렌지 레인지 등 수많은 가수와 탤런트, 모델 등이 오키나와 출신이다.

원래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민족인데다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모여있는 이국적인 외모가 유리하다는 속설도 있고, 걸출한 연예인 사관 학교인 ‘오키나와 액터스 스쿨’의 영향이라고도 하지만 취업에 제한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역사왜곡 문제를 보도하는 오키나와 지역 신문>

현재 진행형인 또 다른 오키나와의 모순은 역사왜곡 문제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군의 강요에 의한 ‘집단 자결’에 대한 끊임없는 교과서 왜곡 시도다. 증인들이 살아있고 관련 미군 기록도 남아 있지만, 일본 정부와 우익 세력은 공식적인 ‘일본군 문서 기록’이 아니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시 일본군 방위부대가 궤멸됐고, 군 문서도 다 소각됐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억지논리를 피고 있는 것이다.

'집단 자결' 문제가 교과서에 처음 실린 것은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한 지 10년이 경과된 지난 82년이라고 한다. 일본 문부성이 이 부분만은 교과서에서 빼고 싶었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의 요구가 워낙 거세 마지못해 실었다고 한다. 문부성은 그러나 가해의 주체인 ‘일본군’은 뺀 채 ‘집단적인 자살이 있었다’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얼버무렸다. 이에 주민들은 “오키나와전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며 집단소송을 벌였고, 지난 88년에 승소한다. 문구 하나 바로 잡는데 6년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지난해 3월 일본 문부성은 또 다시 고등학교 교과서 검정에서 ‘일본군 강제’라는 표현을 전면 삭제하라고 수정지침을 내린다. 문부성은 그 이유로 이른바 ‘오에 겐자부로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들었지만, 사실은 일본 우익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11만 명이나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며 거세게 반발하자 ‘일본군 관여’로 문구를 수정하기는 했지만, 직접적인 명령을 나타내는 ‘일본군 강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 소송’은 노벨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를 상대로 오키나와전 당시 일본 주둔군의 장교와 유가족이 지난 2005년 출판금지 청구소송을 건 사건을 말한다. 원고측은 오키나와전의 참상을 그린 겐자부로의 논픽션 <오키나와 노트>가 일본군이 집단자결을 강요한 것처럼 묘사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심 결과가 지난 3월에 나왔는데, 일본 오사카 지법은“일본군이 깊이 관여했다는 합리적인 증거가 있다”며 오에 겐자부로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했다. 현재 원고인 전 일본군 장교측은 법원의 결정에 반발해 항소한 상태이며, 최종심까지 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소송은 종군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최근 일본 우익의 조직적인 ‘역사 왜곡’ 움직임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일본 내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밖에도 오키나와전을 왜곡하려고 하는 우익의 준동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장 상징적인 것이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자료관에 전시된 일본군 마네킹의 모습이다. 당시 주민들이 숨어 살았던 동굴 안의 모습을 재현한 것인데, 사진에서 보듯 일본군이 마치 주민을 보호하는 인상을 주도록 ‘왜곡’된 것이다.

우는 갓난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어머니의 절박한 모습과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일본군의 모습이 모순되고 기이한 느낌을 준다. 자료관 건립 초기에는 주민들의 증언대로 일본군의 총부리가 주민들을 향하고 있었지만, 건립도중 우익성향을 가진 지사가 당선된 뒤 모습이 바뀌었다고 한다.

<'히메유리 의용대' 희생자>

학도병으로 오키나와전에 동원됐다 숨진 130여 명의 여고생, 이른바 ‘히메유리 학도병’에 관한 이미지 조작도 마찬가지다. 천진난만한 여고생들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휩쓸려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을 일본 우익은 젊은이들이 애국심, 아니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식의 이른바 ‘순국미담(殉國美談)’으로 미화하고 있다.

이런 시각은 히메유리를 소재로 일본 본토에서 만들어진 상당수의 소설과 영화에도 투영돼 있는데, 미군의 항복 권유를 ‘의연히’ 거부하고 비장하게 절벽으로 일제히 몸을 던져 산화했다는 식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이런‘기대감’으로 오키나와를 찾는다고 한다.

이런 일본정부와 우익의 오키나와전 왜곡 음모에 맞선 오키나와 주민의 반발과 저항은 필사적이다. 역사왜곡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고, 또 무엇보다‘정신적인 뿌리’를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젊은 세대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 또는 영화의 내용이 부모의 말과 달라 정체성 혼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이를 줄이기 위해 절박하게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에 있는 평화기념 공원과 히메유리 기념관의 전시물 내용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집단적인 반발과 싸움 덕분이라고 한다. 관이 주도한 평화기념관의 경우 개관초기에는 일본군의 기록으로 가득 차는 등 마치 ‘전쟁 기념관’처럼 꾸며졌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강한 요구로, 지금은 상당수 전쟁의 참상과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쪽으로 뜯어 고쳐진 것이라고 한다.

히메유리 기념관도 이 덕분에 죽음을 미화화지 않고, 일제의 무차별적인 주민 동원이 희생의 원인임을 알 수 있게 구성될 수 있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히메유리’ 생존자 할머니들이 “너무 살고 싶었지만, 일본군이 죽음을 강요했다”며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리려 증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영화나 소설의 이미지와 다른 히메유리의 실상을 접하고 혼란을 받는 일본인 관광객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텐노(天皇), 즉 일왕에 대한 인식도 본토와 사뭇 다르다.역사가 다른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키나와전 당시 가해자의 정점에 일왕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지난 1975년 기념관 건립을 축하하러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지금의 텐노)에 대해 오키나와 청년 명이 화염병을 투척한 사건이나, 지난 1990년대 텐노가 초청한 피로연에 참석했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끝내 ‘기미가요(君が代:텐노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의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았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텐노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전쟁의 책임자이기 때문에,그를 존중하거나 찬양하는 것 자체가 고향 오키나와에 대한 모독이라는 인식에서 개인적인 저항을 벌인 것이다. 이외에도 일장기인 ‘히노마루’를 불태우거나 하수구에 처박는 등 일본의 다른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성모독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오키나와다.

오키나와를 돌아다니고 자료를 찾으면서, 우리의 아픈 식민지 역사가 계속 겹쳐졌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만행과 전쟁동원으로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고통을 겪은 현장에서는 울분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사과와 보상은 커녕 지금도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과 날조로 계속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는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재일교포와 더불어 일본사회에서 여전히 차별과 굴욕을 당하고 있다는 설명에서는 동병상련의 정도 느꼈다. 오키나와 평화 기념 공원의 자료관은 우리의 독립기념관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고, 히메유리 기념관의 여고생 학도병 사진에서는 종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젊었을 때 모습이 저러지 않았을까 싶어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실제 오키나와는 그 자체로도 우리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전쟁 막바지에 우리 할아버지 세대 만 여명이 일제에 강제로 징용돼 군사시설 공사장 또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고, 할머니 세대는 일본군의 성 노예로 끌려와 백 곳이 넘는 군 ‘위안소’에 수용됐다고 한다. 당시의 비참한 생활과 죽음에 대한 기록과 증언은 아직 오키나와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끔찍한 몸서리가 쳐지고 분통이 터진다. ”영양 실조(징용)와 성병(위안부)으로 죽은 조선사람이 많았다”고 하니, 얼마나 처참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오키나와를 바라보는 시각은 참 다양하다. 일본인에게, 오키나와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말이다. 대다수 일본인들에게 오키나와는 하와이나 사이판 같은 이색적인 휴양지다. 반면 일본 우익에게 오키나와는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성전(聖戰)’의 순례지이고, 반전 시민단체에게는 전쟁의 교훈을 새길 수 있는 거대한 체험관으로 여겨진다. 편차의 정도는 다르지만, 오키나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오키나와인이 처절한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진실을 알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반면,어떤 오키나와인은 이제 그런 과거사는 적당히 묻어두고 현실과 타협해 ‘진정한 일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인식도 극과 극을 달리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관점의 차이는 오키나와를 가해자인 일본과 동일시하느냐, 아니면 일본 본토와 분리해 우리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피해자로 보느냐 인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이는 오키나와인이 겪은 고통을 ‘가해자의 엄살과 과장’ 정도로 여기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반면, 어떤 이는 우리와 비슷한 일제수탈의 악몽과 역사왜곡 문제를 갖고 있다고 보고 동질감을 느낀다.

필자는 오키나와에 대해 알게 된 최근 몇 달 사이 후자쪽으로 조금씩 바뀌어 같던 것 같다. 또 어느 여행보다 많은 교훈을 얻고, 우리의 과거사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던 것 같다.

<아름다운 오키나와 해안가>

관광객 입장에서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는 오키나와의 바다 빛깔은 다채롭고 강렬하며 매혹적이다. 또 오키나와 사람들은 별 걱정 없이 넉넉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섬이 머금은 아픔을 상기하고 바라보면, 그 모습들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오히려 그 아름다움과 평화로움 때문에, 오키나와의 슬픔이 더 짙고 더 깊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건 정화짤. 해당 정화짤은 본문과 상관있을 수도 있음>



그래서 아무로 나미에(安室 奈美恵 : 1977 ~ )가 기미가요를 안부르는게 다 이유가 있는거임. 문제는 저집이 슬슬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사상검증으로 기미가요라는 소음공해 자랑을 시키는데, 여기서 알기론 아무로 나미에가 현재까지 제창거부자의 마지막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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