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한 ㄱ드립에 색칠은 했다만, 다 칠을 할 수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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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2]는 혓바닥만 쓸데없이 길어서 참 문제. 어차피 룸빵에서 냄비(수준에 맞춘 단어선정)끼는 거나 마찬가지라 하였으니 이미 초반에 결론을 깔았네ㅇㅇ (...)
※이러다가 이양반, 윤ㅅㅇ처럼 되는게 아닐까나...
tag : 강신주, 냉장고드립도_모자라_술집드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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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아주 오랜 옛날 똘똘이라는 남자가 공룡을 한 마리 잡았다. 공룡을 잡아 마을로 돌아온 뒤, 그는 고기를 조금 잘라서 가족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미소가 절로 떠오르는 정말 훈훈한 풍경이다. 까마득한 원시시대에는 모두 마음이 너그러워 그랬던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경제체제로 정착되기 전, 그러니까 100여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 어느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다. 산불로 마을에 뛰어내려온 멧돼지 한 마리를 용감한 돌쇠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거대한 멧돼지여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돌쇠는 기꺼이 멧돼지를 골고루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원시시대의 똘똘이와 조선시대의 돌쇠가 자신이 애써 잡은 사냥감을 기꺼이 나누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맛있는 고기라고 해도 너무 많으면 혼자서는 결코 모두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써 잡은 공룡이나 멧돼지가 아까워도 다 먹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해서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 탐욕을 부려 보관하려고 하면 아마 집은 썩은 냄새가 풍기고 아울러 병균의 온상지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항상 싱싱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고, 노쇠한 사람도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냉장고가 문제였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 자, 지금 바로 냉장고를 열어보자. 보통 위가 냉동실이고 아래가 냉장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냉동실을 열어보자. 검은 비닐 봉투가 정체 모를 고기와 함께 붙어 얼어 있는 덩어리를 몇 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아니면 닭고기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심각한 것은 도대체 어느 시절 고기인지 아리송하다. 아니 어쩌면 매머드 고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냉동실에는 냉동만두가 더 냉동되어 방치돼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만두인지 돌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이다. 보통 이런 돌만두는 새로운 냉동만두를 넣으려다가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다음으로 냉장실을 열어보라. 공장에서 오래 보관해서 먹으라고 플라스틱에 담아 포장한 식품들로 가득할 것이다. 플라스틱에 담긴 생수병과 음료수, 병에 담긴 여러 저장식품들. 냉장실에 잘 보관하면 유통기한 정도는 하루 이틀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유통기한은 실온을 기준으로 하니까 말이다. 심지어 호박마저도 진공포장으로 채소 칸에 들어 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냉동실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 대형마트에서 사온 제품들 뒤편에 정체 모를 플라스틱들과 비닐 봉투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냉동실과 냉장실에서 정체 모를 봉투들,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식품들을 꺼내서 없앨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그걸 먹고 탈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한 일 아닌가. 음식물 쓰레기를 담는 종량제 봉투에 그것들을 모두 쓸어담아, 집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 투척한다. 다시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여니 한결 청결해 보인다. 그러나 왠지 허전하다. 냉장고가 비게 되면, 무엇인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즐거운 쇼핑 시간이다. 쾌적한 대형마트에서 가족들의 해맑은 웃음과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며 정말 싱싱한 포장식품들을 그득 사오면 되는데 말이다.
▲ “혼자 다 먹을 수 없었던 원시시대
사냥감을 나눠먹던 풍경
대형마트와 냉장고 사이의 삶
자본주의가 인간을 위태롭게 한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처음 냉장고가 없어졌을 때, 몹시 불편할 것이다. 어떤 습관이라도 고치기는 무척 힘든 법이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재래시장에 들러 싱싱한 식품을 적당량 사서 바로 요리해서 먹는 생활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곧 냉장고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냉장고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냉장고와 대형마트는 공생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냉장고를 대량생산하는 거대한 산업자본,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거대 자본, 그리고 그곳에 진열된 식품들을 대량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산업자본이 도사리고 있다. 묘한 공생 관계 아닌가. 냉장고는 대량생산된 식품들을 전제하고 있고, 대량생산된 식품들은 냉장고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냉장고와 대형마트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던 우리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에 가족들의 건강, 이웃과의 공동체 생활, 생태, 재래시장 그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었고, 거대 자본은 그 덩치를 늘려갔던 것이다. 당연히 대량생산된 식품에는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한 인위적인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건강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과들도 냉장고에 저장하는 순간, 바구니에 담겨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기회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이웃과의 돈독한 관계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냉장고에 방치되어 있는 식품들은 오늘도 엄청나게 버려지고 있고, 동시에 대량생산을 위해 고기나 채소들에는 가혹한 생육 방법이나 유전자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생태 환경인들 무사하겠는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 그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절망한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거대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길들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 아닐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없애라! 한 번에 없앨 자신이 없다면, 냉장고의 용량이라도 줄여라! 가족 건강 문제, 생태 문제, 이웃 공동체 문제, 재래시장 문제가 그만큼 해결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 “여자가 여자에게 추천하는 속이 넓은 냉장고”의 유혹, “살고 먹고 사랑하는 데 필수적인 냉장고”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냉장고의 폐기, 혹은 냉장고 용량 축소!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는가!
아주 오랜 옛날 똘똘이라는 남자가 공룡을 한 마리 잡았다. 공룡을 잡아 마을로 돌아온 뒤, 그는 고기를 조금 잘라서 가족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미소가 절로 떠오르는 정말 훈훈한 풍경이다. 까마득한 원시시대에는 모두 마음이 너그러워 그랬던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경제체제로 정착되기 전, 그러니까 100여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 어느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다. 산불로 마을에 뛰어내려온 멧돼지 한 마리를 용감한 돌쇠가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너무나 거대한 멧돼지여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돌쇠는 기꺼이 멧돼지를 골고루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원시시대의 똘똘이와 조선시대의 돌쇠가 자신이 애써 잡은 사냥감을 기꺼이 나누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맛있는 고기라고 해도 너무 많으면 혼자서는 결코 모두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써 잡은 공룡이나 멧돼지가 아까워도 다 먹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해서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지어 탐욕을 부려 보관하려고 하면 아마 집은 썩은 냄새가 풍기고 아울러 병균의 온상지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항상 싱싱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고, 노쇠한 사람도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냉장고가 문제였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삶의 폐단은 모두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 자, 지금 바로 냉장고를 열어보자. 보통 위가 냉동실이고 아래가 냉장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냉동실을 열어보자. 검은 비닐 봉투가 정체 모를 고기와 함께 붙어 얼어 있는 덩어리를 몇 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아니면 닭고기인지 헛갈리기만 하다. 심각한 것은 도대체 어느 시절 고기인지 아리송하다. 아니 어쩌면 매머드 고기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냉동실에는 냉동만두가 더 냉동되어 방치돼 있을지도 모른다. 이게 만두인지 돌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이다. 보통 이런 돌만두는 새로운 냉동만두를 넣으려다가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다음으로 냉장실을 열어보라. 공장에서 오래 보관해서 먹으라고 플라스틱에 담아 포장한 식품들로 가득할 것이다. 플라스틱에 담긴 생수병과 음료수, 병에 담긴 여러 저장식품들. 냉장실에 잘 보관하면 유통기한 정도는 하루 이틀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유통기한은 실온을 기준으로 하니까 말이다. 심지어 호박마저도 진공포장으로 채소 칸에 들어 있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냉동실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 대형마트에서 사온 제품들 뒤편에 정체 모를 플라스틱들과 비닐 봉투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냉동실과 냉장실에서 정체 모를 봉투들,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식품들을 꺼내서 없앨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그걸 먹고 탈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한 일 아닌가. 음식물 쓰레기를 담는 종량제 봉투에 그것들을 모두 쓸어담아, 집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 투척한다. 다시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여니 한결 청결해 보인다. 그러나 왠지 허전하다. 냉장고가 비게 되면, 무엇인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즐거운 쇼핑 시간이다. 쾌적한 대형마트에서 가족들의 해맑은 웃음과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며 정말 싱싱한 포장식품들을 그득 사오면 되는데 말이다.
▲ “혼자 다 먹을 수 없었던 원시시대
사냥감을 나눠먹던 풍경
대형마트와 냉장고 사이의 삶
자본주의가 인간을 위태롭게 한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처음 냉장고가 없어졌을 때, 몹시 불편할 것이다. 어떤 습관이라도 고치기는 무척 힘든 법이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재래시장에 들러 싱싱한 식품을 적당량 사서 바로 요리해서 먹는 생활이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곧 냉장고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냉장고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냉장고와 대형마트는 공생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냉장고를 대량생산하는 거대한 산업자본,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거대 자본, 그리고 그곳에 진열된 식품들을 대량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산업자본이 도사리고 있다. 묘한 공생 관계 아닌가. 냉장고는 대량생산된 식품들을 전제하고 있고, 대량생산된 식품들은 냉장고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냉장고와 대형마트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던 우리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에 가족들의 건강, 이웃과의 공동체 생활, 생태, 재래시장 그 모든 것이 파괴되고 있었고, 거대 자본은 그 덩치를 늘려갔던 것이다. 당연히 대량생산된 식품에는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한 인위적인 조치가 취해지게 된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건강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과들도 냉장고에 저장하는 순간, 바구니에 담겨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기회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이웃과의 돈독한 관계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냉장고에 방치되어 있는 식품들은 오늘도 엄청나게 버려지고 있고, 동시에 대량생산을 위해 고기나 채소들에는 가혹한 생육 방법이나 유전자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생태 환경인들 무사하겠는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 그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절망한다. 자본주의는 너무나 거대한 체제이기에, 우리가 길들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명 아닐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냉장고를 없애라! 한 번에 없앨 자신이 없다면, 냉장고의 용량이라도 줄여라! 가족 건강 문제, 생태 문제, 이웃 공동체 문제, 재래시장 문제가 그만큼 해결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 “여자가 여자에게 추천하는 속이 넓은 냉장고”의 유혹, “살고 먹고 사랑하는 데 필수적인 냉장고”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냉장고의 폐기, 혹은 냉장고 용량 축소!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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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 2015년 06월] 강신주, 이상용 인터뷰 : 세계의 집, 영화의 기적
강신주와 이상용은 작년 7월부터 6개월간 CGV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 고전 영화 스물다섯 편을 ‘영화-인문학’의 관점에서 읽어내는 수업을 했다. ‘영화-인문학’은 수사에 불과하고, 둘은 고전 영화들을 통해 영화가 시대를 드러내는 방식, 감독들의 세계관이 영화에 투영되는 방식, 장면과 장면에서 현실을 읽어내는 방식에 대해 강의했다.
강신주는 현실의 철학을, 이상용은 영화 제작의 구체적 실재를 이야기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수업이 계속되는 동안 이들은 서로의 임무를 넘나들며, 그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언어들을 털어놓았다. [씨네샹떼]는 이 수업의 이름이며, 그들의 언어를 기록한 책의 제목이다.
갖가지 협업 작품들이 문화 지형 안에 울긋불긋 솟아오르지만, [씨네샹떼]는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훌륭한 협업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와 미래가 의심할 바 없이 영상 매체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 책의 가치는 오래 유효할 것이 분명하다.
영화의 역사는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영화의 발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 기록한 책은 대한민국에서 발행되었다고 적는 게, 과장이 아니다.
저는 [어벤져스]를 좋아합니다. 대중의 평균적인 수준은 저와 비슷할 것 같아요.
강신주 [어벤져스] 보는 건 술집에서 여자랑 노는 거고,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연애를 하는 것과 같죠.
연애요?
강신주 술집 가서 여자랑 노는 게 뭐 발전이 있나요? 영양가 없죠. [어벤져스] 같은 게 그런 거죠. 술집에서 놀면 생각을 안 하는데 연애를 하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두 분이 함께 25주 동안 [씨네쌍떼] 강의를 하셨고, 책까지 출간하셨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협업을 하신 거잖아요. 협업이 많죠… 쓸데없는 협업도 많고. 그런데 [씨네샹떼]는 드물게 관심을 많이 끈 협업 작품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이 점이 흥미로웠고요.
강신주 분야가 다른 두 사람이 한두 번 만나서 이야기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좋은 소설이나 좋은 드라마를 보면 캐릭터가 변하잖아요. 우리도 그랬어요. 내가 이상용 선생님한테, 이 선생님이 나한테 변화에 대한 부분을 열어놓았어요. 처음 강의 시작할 때와 강의가 끝날 때의 우리는 달라요.
이상용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반적인 공동 저작들은 글 쓰는 사람들끼리만 만나서 조율하잖아요. 서로 이야기하고 나서 나중에 각자 원고 보내고, 고치는 방식으로 하죠. 이것이 기존의 공동 저작들이 갖고 있는 한계예요.
이 분야의 전문가, 저 분야의 전문가가 만나서 그들끼리 담론 나누고 끝내버리는 게 태반이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 목표는 그게 아니었어요. 우리끼리 나 이거 알아, 너 이거 알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영화를 오롯이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그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만드는 거였어요.
언어가 여러 형태로 청중을 향해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강 선생님이 어떤 이야기를 해요, 나는 생각도 못해봤는데? 그럼 또 제가 전문적인 이야기를 해요.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 거예요. 이건 책 형식을 봐도 알 수 있어요.
각자 글을 쓰는데, 자연스럽게 우리가 서로 했던 이야기 혹은 상대방에게 귀 기울였던 이야기가 문장 안에, 생각 안에 녹아들어서 글에 드러나는 거예요. 하나의 영화라는 텍스트를 보고 두 사람은 물론 청중을 향해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면서 이합집산되는 과정이 책장 구성 속에 다 있는 겁니다.
강신주, 이상용 인터뷰 이미지 2 확대보기
서로 많이 배우셨겠어요?
강신주 저는 이상용 선생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요. 그래서 매번 이 선생님한테 배우려고 준비를 했어요. 학생이 예습을 안 하면 못 배우잖아요. 이상용이라는 영화 평론가를 만나서 영화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이 선생님은 인문학 책도 많이 읽으시고 철학 책도 많이 읽으시기 때문에 괜찮은데 나는 영화를 몰라요. 현장에서 쓰는 용어들이랄지 뭐 그런 전문적인 것은 모른다고요.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이상용이라는 대학생, 강신주라는 초등학생’ 이렇게 될까봐. 내가 빨리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심지어 청중도 있으니까. 그래서 초기에 내가 힘들었어요.
선생님이 만나는 영화감독들이나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쓰는 용어들을 자연스럽게 알아듣고 쓸 수 있게 된 때가 [씨네샹떼] 수업이 3~5주 지나면서부터였어요. 저는 이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실질적인 공저라고 생각해요.
실질적인 의미의 공저요?
강신주 내가 글 써, 이 사람도 글 써, 그거 모은다고 공저가 되는 게 아니죠. 이 책은 우리 둘이 교류했다는 증거예요. 그러니까 이 선생님을 안 만났으면 이 책이 안 나왔을 거예요. 이상용 선생님은 내가 굉장히 존중하는 분이에요. 나는 한 번도 공저를 한 적이 없는데, 이상용 선생님을 알게 된 후에는, 아, 이 양반하고는 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이상용 내가 강 선생님보다 영화를 더 알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더 알기 때문에 교조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식을 교류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건 그것을 넘어서야 하는 거 같아요. 존중하는 것만이 다는 아니고, 무시하기도 해야 하는 거죠. 나는 강 선생님한테 늘 공격당했어요.
강신주 제가 말했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영화 보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얘기라고.
강연 중에 그런 말 해요? 학생들 다 있는데? 진짜요?
이상용 우리끼리 ‘디스’하는 거예요.
강신주 좋은 관계는 정직해야 돼요.
[씨네샹떼] 책을 보고 좀 당황했어요. 스물다섯 번의 강연을 기록한 건데, 다룬 영화들이 음…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확신이 안 섰어요. 물론 굉장히 주목받은 강연이었지만, 책은 또 다르잖아요.
강신주 하지만 우리는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 책을 많은 독자가 좋아할 거라고 믿어요.
영화 선정은 이상용 선생님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전 영화 말고, 현대적인 영화들, 잘 이해돼서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선정할 생각은 안 하셨어요?
이상용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거 같죠? 안 읽어요. 중요한 건 미지의 영역이에요. 여기 다룬 영화들은 1백 년이 지나도 살아남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다른 현대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중요해요.
강신주, 이상용 인터뷰 이미지 3 확대보기
어릴 때부터 ‘고전은 영원하다’라고 배웠어요. 저 역시 그런 믿음을 갖고 있고요. 그런데 세상이 너무 변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제 잘 모르겠어요. 고전이 정말 영원할까요?
강신주 고전은 커요.
살아남다는 건 사람들이 봐야 된다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앞으로도 고전을 볼까요?
강신주 제가 한 가지 오판한 것은 있어요. 스마트폰이 나오면 기존 매체는 다 죽겠구나 생각했어요. 물론 영화도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살겠더라고요. 스마트폰이 작으니까, 더 큰 화면에서 보려고 하겠구나!
아이러니하게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종이책은 죽었는데, 동영상은 많이 보잖아요. 재미있는 게 그거예요. 영화가 ‘같이 갈 수 있겠구나’라는 거. 영화의 시대는 의외로 오래갈 거 같아요. 영화는 더욱 강력한 매체가 될 거예요. 그럴수록 영화에 대한 인문학적인 접근이 필요한 거죠.
이상용 고전은 원래 재미없어요. 오늘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누가 읽겠어요. 안 읽죠. 그런데 [자본론]을 재해석한 책들은 지금도 계속 나와요. 그 책을 계속 누군가 읽고 있어요. 영화는 책보다 쉽긴 하잖아요. 책은 끝까지 읽는 게 만만치 않지만, 영화는 두 시간이면 보잖아요.
그런데 그 재미없는 고전 영화를 가이드하는 적절한 책이 있느냐, 라고 생각해보면 의외로 없다는 거예요. 수많은 원서를 찾아봐도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설명된 게 없어요. 우리는 그걸 해본 거예요. 해봄으로써 이 책은 그 영화들이 존재하는 한 살아남을 거예요.
강신주 여기 선정된 영화들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향을 받은 영화들이에요. 그게 바로 ‘고전’이고. 그러니 지금 흥행하는 영화도 이게 없었으면 못 만들었을 거라는 소리죠. 어느 유명한 흥행 영화감독에 대해 누가 관심을 갖는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이를테면 ‘수원지’로 가보지 않겠어요? 거기서 계속 물이 흘러내려오고 있으니까.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하나는 강 선생님이 큰일을 하셨다는 거예요. 저는 이 책이 영화의 본질을 세웠다고 생각해요. 유럽이 아니라 한국에서. 훌륭한 영화들을 전문적인 지식과 철학적인 삶으로 해석해낸 책이 드물잖아요. 유연한 철학자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거죠.
강신주 영화 평론가인 이 선생님과 일반 대중 사이에 내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의 구조가 이상용 선생님이 수원지, 내가 중간, 그리고 대중.
이 선생님이 대중에게 가는 그 사이에 뤼미에르 형제부터 스물다섯 명의 감독이 있었던 거예요. 단지 이 선생님이 수원지 쪽으로 너무 가면 내가 잠시 끌어내리고, 내가 너무 대중적으로 가면 이 선생님이 나를 또 끌어올리고.
유럽이나 미국엔 이런 책이 있나요?
강신주 없죠.
번역해야 해요. 이거예요, 제가 두 번째로 생각한 게. 무엇을 흉내 낸 책이 아니라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 애쓴 책이니까요.
강신주 맞아요. 본질이에요.
저는 장 뤽 고다르를 좋아해요. 이름이 예뻐서요. 이 책에 고다르가 한 말이 인용돼 있더라고요. 자신은 영화감독이지만 스스로 비평가라고 생각한다고. 멋있더라고요. 두 분도 스물다섯 명의 감독 중에서 애착이 가는 감독이 있으실 것 같아요. 작가와 작품을 하나로 생각하는 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면 애착이 가는 영화를 말해주셔도 돼요.
이상용 둘 다 좋아했던 건 누벨바그 전후의 1960년대 모더니즘 시대예요. 유럽에서 새로운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이자, 모든 예술이 절정이었던 때잖아요. 강연을 하면서 강 선생님도 저도 느낀다는 말이죠.
우리가 놀라운 작품을 얘기하고 있구나, 라는 걸. 특히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확대] 같은 작품들이 그렇지요. 그런데 저한테는 좋아하는 감독이나 영화를 고르는 게 의미가 없어요.
스물다섯 편의 영화를 제가 선정했으니까요. 당연히 좋아서 골랐어요. 다만 내가 감독에 대해서든 작품에 대해서든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게 됐던 건, 루이스 부뉴엘 감독이에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 대해 수업하면서 이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봤어요.
예전에도 물론 좋아했지만 느낌이 또 다르더라고요. 부뉴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속속들이 들춰내는 감독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어요. 부뉴엘의 영화들을 전부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강연이 끝나고 책 원고를 정리하면서 했어요.
강신주 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꿈꾸는 세계관은 유치해요. 그런데 타르콥스키의 위대함은 그 유치함으로 만든 영상에서 나와요. 그 영상이 기억된다는 거죠. 영화는 영상이니까, 영상이 기억에 남아야 된다는 게 내 지론이거든요. 안토니오니 감독의 [확대]에서 시체가 없어진 그 공허함, 영국식 공원의 바람 부는 허허로운 장면도 기억에 남아요.
이상용 줄거리라는 틀이 있다고 한다면 영화에서는 그걸 어떻게 채워 표현하느냐 혹은 구현하느냐, 아니면 텅 빈 그 자체로 내놓느냐를 중요한 태도로 생각하는데, 그걸 고유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감독이 타르콥스키나 안토니오니 같은 감독들이죠.
강신주 결국 영화의 내용은 다 비슷할 거예요. 그걸 어떤 영상에 담느냐에 따라 우리를 성숙시키잖아요. 칼부림 장면이 서로를 죽이는 거 같은데 사랑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예술가는 기표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기의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기표가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이상용 이성복 시인의 [당신은 짐승, 별]이라는 시는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으로 시작돼요. 우리는 첫 구절을 읽으면서 어떤 연인을 떠올려요.
연인이 짐승처럼 보여, 무섭지, 근데 어느 순간 사랑에 빠져 동경의 대상이 되지, 정작 내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손가락처럼 되고, 그리고 정적이 찾아오는 거예요. 이런 현상은 시니까 한 번에 머릿속, 가슴속에서 이해되는데 영화에서는 바로 직감적으로 느껴져야 한다고요.
여기서는 예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장면과 장면, 쇼트와 쇼트 사이에 존재하는 컷들로 얼마나 놀라운 긴장감과 울림을 줄 수 있는가가 중요한 거죠.
맞아요, 그게 예술이죠.
강신주 새로운 예술 매체가 등장할 때 그 매체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매체들의 특징을 흡수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영화는 앞선 장르들의 특징을 배운 거예요. 장점을 흡수한 거죠.
그러고 나서 거꾸로, 소설은 이거고 시는 이거고 그림은 이거고 음악은 이거다, 라고 이야기해줘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는 영화로는 내면 소설을 충분히 표현해낼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 시대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 같은 것들이었으니까요. 달리는 기차 같은 거나 찍어서 ‘내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어! 생각한 거죠. 그는 영화 같은 소설을 쓰면 영화에 진다고도 말했어요.
영화에 진다고요?
강신주 영화에 지죠, 당연히. 그래서 20세기 초기 소설가들이 모더니즘 기법으로 소설을 쓴 거예요. 영화랑 달라야 하니까. 부르주아들이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소설을 만든 건데, 영화가 나와버렸어요. 소설과 영화가 전쟁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지금도 어쩌면 전쟁 중인지도 모르죠. 9백50만 명이 [어벤져스 2]를 봤다는 건 소설이 정말 안 팔린다는 겁니다. 슬프게도.
그런데 시는… 어차피 너무 안 팔려서 그런 전쟁과 상관이 없죠.
강신주 시인들의 비겁함과 나약함이 거기서 생기는 거예요. 원래 시는 대중을 대상으로 만든 거예요. 하지만 요즘 시는 대중과의 싸움에서 진 걸 인정하고 있어요. 내면적인 얘기나 하는 시를 쓴단 말이에요.
하지만 현대시는 기로에 놓여 있어요.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우선이냐, 독자를 염두에 두는 게 우선이냐로 고민하는 거죠. 시대의 흐름이지 시인의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강신주 자신한테 정직하면 독자를 울리게 돼 있어요. 자기 스스로 거짓말을 하니까 자기도 진정성이 없고 타인에게도 진정성이 없는 거죠.
그 부분은 시인이 고민할 문제로 남겨두죠. 고민 많이 하고 있을 거예요, 시인들도.
강신주 진짜요?
고민 안 하고 어떻게 기표를 만들어요?
이상용 제가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영화감독이나 작가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스타일이 나와요. 감독이 어디에 거주하는 사람인가가 사실은 그 영화에서 드러나야 하는 거고요. 우디 앨런의 영화가 그렇잖아요. 끊임없이 수다스러운 가운데 맨해튼의 풍경이 보이죠.
마치 언어에 압도돼 화면이 가려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디 앨런의 전략인 거죠. 우디 앨런은 평생 뉴요커로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도시의 시끄럽고 산만한 정서가 풍경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사실 별 내용은 없을 수도 있어요.
도시는 이렇게 흘러가는 거야, 라는 기표만 보여주는 거죠. 아까 [어벤져스 2]에 대해 다소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저도 그 영화 좋아해요. 다만 그런 영화들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죠. 장르의 문제는 아니에요. 감독이 어디에 거주하는 인간인지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작가의 목소리가 없는 영화이기 때문에 대중 영화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고다르가 [미치광이 피에로]를 통해서 조르주 페렉 같은 소설가들과 동시대인으로 호흡하며 파리에서부터 남프랑스 지역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보여주잖아요.
프랑스인이라는 게 드러나는 영화예요. 비판적이고 현학적이어도 그 영화는 프랑스 영화라는 거죠. 홍상수 영화도 북촌이 됐든 강원도가 됐든 어딜 자꾸 생각하게 만들잖아요.
즐거운 인터뷰였습니다, 라는 말을 과거에 수십 번 했어요. 인터뷰가 끝날 때 으레 하는 말이죠. 오늘은 고맙습니다, 라고 말할게요. 나라가 미쳐 돌아간다고 너도나도 지적하잖아요. 희망은 언어에 있다는 생각을 오늘 했습니다. 언어는 인간 안에 있지요. 그러니까 결국 인간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어요. 영화도 결국은 언어의 집이고요.
강신주 ‘정신’은 화장을 하는 게 아니라 화장을 벗기는 거예요. 추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우리의 진짜 모습에 가까운 거예요.
강신주와 이상용은 작년 7월부터 6개월간 CGV아트하우스 압구정에서 고전 영화 스물다섯 편을 ‘영화-인문학’의 관점에서 읽어내는 수업을 했다. ‘영화-인문학’은 수사에 불과하고, 둘은 고전 영화들을 통해 영화가 시대를 드러내는 방식, 감독들의 세계관이 영화에 투영되는 방식, 장면과 장면에서 현실을 읽어내는 방식에 대해 강의했다.
강신주는 현실의 철학을, 이상용은 영화 제작의 구체적 실재를 이야기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수업이 계속되는 동안 이들은 서로의 임무를 넘나들며, 그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언어들을 털어놓았다. [씨네샹떼]는 이 수업의 이름이며, 그들의 언어를 기록한 책의 제목이다.
갖가지 협업 작품들이 문화 지형 안에 울긋불긋 솟아오르지만, [씨네샹떼]는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훌륭한 협업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와 미래가 의심할 바 없이 영상 매체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 책의 가치는 오래 유효할 것이 분명하다.
영화의 역사는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영화의 발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 기록한 책은 대한민국에서 발행되었다고 적는 게, 과장이 아니다.
저는 [어벤져스]를 좋아합니다. 대중의 평균적인 수준은 저와 비슷할 것 같아요.
강신주 [어벤져스] 보는 건 술집에서 여자랑 노는 거고,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연애를 하는 것과 같죠.
연애요?
강신주 술집 가서 여자랑 노는 게 뭐 발전이 있나요? 영양가 없죠. [어벤져스] 같은 게 그런 거죠. 술집에서 놀면 생각을 안 하는데 연애를 하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두 분이 함께 25주 동안 [씨네쌍떼] 강의를 하셨고, 책까지 출간하셨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협업을 하신 거잖아요. 협업이 많죠… 쓸데없는 협업도 많고. 그런데 [씨네샹떼]는 드물게 관심을 많이 끈 협업 작품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이 점이 흥미로웠고요.
강신주 분야가 다른 두 사람이 한두 번 만나서 이야기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좋은 소설이나 좋은 드라마를 보면 캐릭터가 변하잖아요. 우리도 그랬어요. 내가 이상용 선생님한테, 이 선생님이 나한테 변화에 대한 부분을 열어놓았어요. 처음 강의 시작할 때와 강의가 끝날 때의 우리는 달라요.
이상용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반적인 공동 저작들은 글 쓰는 사람들끼리만 만나서 조율하잖아요. 서로 이야기하고 나서 나중에 각자 원고 보내고, 고치는 방식으로 하죠. 이것이 기존의 공동 저작들이 갖고 있는 한계예요.
이 분야의 전문가, 저 분야의 전문가가 만나서 그들끼리 담론 나누고 끝내버리는 게 태반이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 목표는 그게 아니었어요. 우리끼리 나 이거 알아, 너 이거 알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영화를 오롯이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그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만드는 거였어요.
언어가 여러 형태로 청중을 향해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강 선생님이 어떤 이야기를 해요, 나는 생각도 못해봤는데? 그럼 또 제가 전문적인 이야기를 해요.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 거예요. 이건 책 형식을 봐도 알 수 있어요.
각자 글을 쓰는데, 자연스럽게 우리가 서로 했던 이야기 혹은 상대방에게 귀 기울였던 이야기가 문장 안에, 생각 안에 녹아들어서 글에 드러나는 거예요. 하나의 영화라는 텍스트를 보고 두 사람은 물론 청중을 향해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면서 이합집산되는 과정이 책장 구성 속에 다 있는 겁니다.
강신주, 이상용 인터뷰 이미지 2 확대보기
서로 많이 배우셨겠어요?
강신주 저는 이상용 선생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요. 그래서 매번 이 선생님한테 배우려고 준비를 했어요. 학생이 예습을 안 하면 못 배우잖아요. 이상용이라는 영화 평론가를 만나서 영화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이 선생님은 인문학 책도 많이 읽으시고 철학 책도 많이 읽으시기 때문에 괜찮은데 나는 영화를 몰라요. 현장에서 쓰는 용어들이랄지 뭐 그런 전문적인 것은 모른다고요.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이상용이라는 대학생, 강신주라는 초등학생’ 이렇게 될까봐. 내가 빨리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심지어 청중도 있으니까. 그래서 초기에 내가 힘들었어요.
선생님이 만나는 영화감독들이나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쓰는 용어들을 자연스럽게 알아듣고 쓸 수 있게 된 때가 [씨네샹떼] 수업이 3~5주 지나면서부터였어요. 저는 이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실질적인 공저라고 생각해요.
실질적인 의미의 공저요?
강신주 내가 글 써, 이 사람도 글 써, 그거 모은다고 공저가 되는 게 아니죠. 이 책은 우리 둘이 교류했다는 증거예요. 그러니까 이 선생님을 안 만났으면 이 책이 안 나왔을 거예요. 이상용 선생님은 내가 굉장히 존중하는 분이에요. 나는 한 번도 공저를 한 적이 없는데, 이상용 선생님을 알게 된 후에는, 아, 이 양반하고는 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이상용 내가 강 선생님보다 영화를 더 알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더 알기 때문에 교조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식을 교류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는 건 그것을 넘어서야 하는 거 같아요. 존중하는 것만이 다는 아니고, 무시하기도 해야 하는 거죠. 나는 강 선생님한테 늘 공격당했어요.
강신주 제가 말했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영화 보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얘기라고.
강연 중에 그런 말 해요? 학생들 다 있는데? 진짜요?
이상용 우리끼리 ‘디스’하는 거예요.
강신주 좋은 관계는 정직해야 돼요.
[씨네샹떼] 책을 보고 좀 당황했어요. 스물다섯 번의 강연을 기록한 건데, 다룬 영화들이 음…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확신이 안 섰어요. 물론 굉장히 주목받은 강연이었지만, 책은 또 다르잖아요.
강신주 하지만 우리는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 책을 많은 독자가 좋아할 거라고 믿어요.
영화 선정은 이상용 선생님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전 영화 말고, 현대적인 영화들, 잘 이해돼서 사람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선정할 생각은 안 하셨어요?
이상용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거 같죠? 안 읽어요. 중요한 건 미지의 영역이에요. 여기 다룬 영화들은 1백 년이 지나도 살아남을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다른 현대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중요해요.
강신주, 이상용 인터뷰 이미지 3 확대보기
어릴 때부터 ‘고전은 영원하다’라고 배웠어요. 저 역시 그런 믿음을 갖고 있고요. 그런데 세상이 너무 변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제 잘 모르겠어요. 고전이 정말 영원할까요?
강신주 고전은 커요.
살아남다는 건 사람들이 봐야 된다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앞으로도 고전을 볼까요?
강신주 제가 한 가지 오판한 것은 있어요. 스마트폰이 나오면 기존 매체는 다 죽겠구나 생각했어요. 물론 영화도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살겠더라고요. 스마트폰이 작으니까, 더 큰 화면에서 보려고 하겠구나!
아이러니하게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종이책은 죽었는데, 동영상은 많이 보잖아요. 재미있는 게 그거예요. 영화가 ‘같이 갈 수 있겠구나’라는 거. 영화의 시대는 의외로 오래갈 거 같아요. 영화는 더욱 강력한 매체가 될 거예요. 그럴수록 영화에 대한 인문학적인 접근이 필요한 거죠.
이상용 고전은 원래 재미없어요. 오늘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누가 읽겠어요. 안 읽죠. 그런데 [자본론]을 재해석한 책들은 지금도 계속 나와요. 그 책을 계속 누군가 읽고 있어요. 영화는 책보다 쉽긴 하잖아요. 책은 끝까지 읽는 게 만만치 않지만, 영화는 두 시간이면 보잖아요.
그런데 그 재미없는 고전 영화를 가이드하는 적절한 책이 있느냐, 라고 생각해보면 의외로 없다는 거예요. 수많은 원서를 찾아봐도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설명된 게 없어요. 우리는 그걸 해본 거예요. 해봄으로써 이 책은 그 영화들이 존재하는 한 살아남을 거예요.
강신주 여기 선정된 영화들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향을 받은 영화들이에요. 그게 바로 ‘고전’이고. 그러니 지금 흥행하는 영화도 이게 없었으면 못 만들었을 거라는 소리죠. 어느 유명한 흥행 영화감독에 대해 누가 관심을 갖는다, 그러면 그 사람의 이를테면 ‘수원지’로 가보지 않겠어요? 거기서 계속 물이 흘러내려오고 있으니까.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하나는 강 선생님이 큰일을 하셨다는 거예요. 저는 이 책이 영화의 본질을 세웠다고 생각해요. 유럽이 아니라 한국에서. 훌륭한 영화들을 전문적인 지식과 철학적인 삶으로 해석해낸 책이 드물잖아요. 유연한 철학자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거죠.
강신주 영화 평론가인 이 선생님과 일반 대중 사이에 내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의 구조가 이상용 선생님이 수원지, 내가 중간, 그리고 대중.
이 선생님이 대중에게 가는 그 사이에 뤼미에르 형제부터 스물다섯 명의 감독이 있었던 거예요. 단지 이 선생님이 수원지 쪽으로 너무 가면 내가 잠시 끌어내리고, 내가 너무 대중적으로 가면 이 선생님이 나를 또 끌어올리고.
유럽이나 미국엔 이런 책이 있나요?
강신주 없죠.
번역해야 해요. 이거예요, 제가 두 번째로 생각한 게. 무엇을 흉내 낸 책이 아니라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 애쓴 책이니까요.
강신주 맞아요. 본질이에요.
저는 장 뤽 고다르를 좋아해요. 이름이 예뻐서요. 이 책에 고다르가 한 말이 인용돼 있더라고요. 자신은 영화감독이지만 스스로 비평가라고 생각한다고. 멋있더라고요. 두 분도 스물다섯 명의 감독 중에서 애착이 가는 감독이 있으실 것 같아요. 작가와 작품을 하나로 생각하는 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면 애착이 가는 영화를 말해주셔도 돼요.
이상용 둘 다 좋아했던 건 누벨바그 전후의 1960년대 모더니즘 시대예요. 유럽에서 새로운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이자, 모든 예술이 절정이었던 때잖아요. 강연을 하면서 강 선생님도 저도 느낀다는 말이죠.
우리가 놀라운 작품을 얘기하고 있구나, 라는 걸. 특히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확대] 같은 작품들이 그렇지요. 그런데 저한테는 좋아하는 감독이나 영화를 고르는 게 의미가 없어요.
스물다섯 편의 영화를 제가 선정했으니까요. 당연히 좋아서 골랐어요. 다만 내가 감독에 대해서든 작품에 대해서든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게 됐던 건, 루이스 부뉴엘 감독이에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 대해 수업하면서 이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봤어요.
예전에도 물론 좋아했지만 느낌이 또 다르더라고요. 부뉴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속속들이 들춰내는 감독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어요. 부뉴엘의 영화들을 전부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강연이 끝나고 책 원고를 정리하면서 했어요.
강신주 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꿈꾸는 세계관은 유치해요. 그런데 타르콥스키의 위대함은 그 유치함으로 만든 영상에서 나와요. 그 영상이 기억된다는 거죠. 영화는 영상이니까, 영상이 기억에 남아야 된다는 게 내 지론이거든요. 안토니오니 감독의 [확대]에서 시체가 없어진 그 공허함, 영국식 공원의 바람 부는 허허로운 장면도 기억에 남아요.
이상용 줄거리라는 틀이 있다고 한다면 영화에서는 그걸 어떻게 채워 표현하느냐 혹은 구현하느냐, 아니면 텅 빈 그 자체로 내놓느냐를 중요한 태도로 생각하는데, 그걸 고유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감독이 타르콥스키나 안토니오니 같은 감독들이죠.
강신주 결국 영화의 내용은 다 비슷할 거예요. 그걸 어떤 영상에 담느냐에 따라 우리를 성숙시키잖아요. 칼부림 장면이 서로를 죽이는 거 같은데 사랑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예술가는 기표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기의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기표가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이상용 이성복 시인의 [당신은 짐승, 별]이라는 시는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으로 시작돼요. 우리는 첫 구절을 읽으면서 어떤 연인을 떠올려요.
연인이 짐승처럼 보여, 무섭지, 근데 어느 순간 사랑에 빠져 동경의 대상이 되지, 정작 내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손가락처럼 되고, 그리고 정적이 찾아오는 거예요. 이런 현상은 시니까 한 번에 머릿속, 가슴속에서 이해되는데 영화에서는 바로 직감적으로 느껴져야 한다고요.
여기서는 예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장면과 장면, 쇼트와 쇼트 사이에 존재하는 컷들로 얼마나 놀라운 긴장감과 울림을 줄 수 있는가가 중요한 거죠.
맞아요, 그게 예술이죠.
강신주 새로운 예술 매체가 등장할 때 그 매체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매체들의 특징을 흡수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영화는 앞선 장르들의 특징을 배운 거예요. 장점을 흡수한 거죠.
그러고 나서 거꾸로, 소설은 이거고 시는 이거고 그림은 이거고 음악은 이거다, 라고 이야기해줘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는 영화로는 내면 소설을 충분히 표현해낼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 시대의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 같은 것들이었으니까요. 달리는 기차 같은 거나 찍어서 ‘내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어! 생각한 거죠. 그는 영화 같은 소설을 쓰면 영화에 진다고도 말했어요.
영화에 진다고요?
강신주 영화에 지죠, 당연히. 그래서 20세기 초기 소설가들이 모더니즘 기법으로 소설을 쓴 거예요. 영화랑 달라야 하니까. 부르주아들이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소설을 만든 건데, 영화가 나와버렸어요. 소설과 영화가 전쟁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지금도 어쩌면 전쟁 중인지도 모르죠. 9백50만 명이 [어벤져스 2]를 봤다는 건 소설이 정말 안 팔린다는 겁니다. 슬프게도.
그런데 시는… 어차피 너무 안 팔려서 그런 전쟁과 상관이 없죠.
강신주 시인들의 비겁함과 나약함이 거기서 생기는 거예요. 원래 시는 대중을 대상으로 만든 거예요. 하지만 요즘 시는 대중과의 싸움에서 진 걸 인정하고 있어요. 내면적인 얘기나 하는 시를 쓴단 말이에요.
하지만 현대시는 기로에 놓여 있어요.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우선이냐, 독자를 염두에 두는 게 우선이냐로 고민하는 거죠. 시대의 흐름이지 시인의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강신주 자신한테 정직하면 독자를 울리게 돼 있어요. 자기 스스로 거짓말을 하니까 자기도 진정성이 없고 타인에게도 진정성이 없는 거죠.
그 부분은 시인이 고민할 문제로 남겨두죠. 고민 많이 하고 있을 거예요, 시인들도.
강신주 진짜요?
고민 안 하고 어떻게 기표를 만들어요?
이상용 제가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영화감독이나 작가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스타일이 나와요. 감독이 어디에 거주하는 사람인가가 사실은 그 영화에서 드러나야 하는 거고요. 우디 앨런의 영화가 그렇잖아요. 끊임없이 수다스러운 가운데 맨해튼의 풍경이 보이죠.
마치 언어에 압도돼 화면이 가려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디 앨런의 전략인 거죠. 우디 앨런은 평생 뉴요커로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도시의 시끄럽고 산만한 정서가 풍경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사실 별 내용은 없을 수도 있어요.
도시는 이렇게 흘러가는 거야, 라는 기표만 보여주는 거죠. 아까 [어벤져스 2]에 대해 다소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저도 그 영화 좋아해요. 다만 그런 영화들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죠. 장르의 문제는 아니에요. 감독이 어디에 거주하는 인간인지 안 나타난다는 거예요.
작가의 목소리가 없는 영화이기 때문에 대중 영화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고다르가 [미치광이 피에로]를 통해서 조르주 페렉 같은 소설가들과 동시대인으로 호흡하며 파리에서부터 남프랑스 지역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보여주잖아요.
프랑스인이라는 게 드러나는 영화예요. 비판적이고 현학적이어도 그 영화는 프랑스 영화라는 거죠. 홍상수 영화도 북촌이 됐든 강원도가 됐든 어딜 자꾸 생각하게 만들잖아요.
즐거운 인터뷰였습니다, 라는 말을 과거에 수십 번 했어요. 인터뷰가 끝날 때 으레 하는 말이죠. 오늘은 고맙습니다, 라고 말할게요. 나라가 미쳐 돌아간다고 너도나도 지적하잖아요. 희망은 언어에 있다는 생각을 오늘 했습니다. 언어는 인간 안에 있지요. 그러니까 결국 인간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어요. 영화도 결국은 언어의 집이고요.
강신주 ‘정신’은 화장을 하는 게 아니라 화장을 벗기는 거예요. 추한 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우리의 진짜 모습에 가까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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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마땅한 게 없어서...>
인류역사에서 신선한 식품을 장기보관하려고 별짓을 다했고
영화 좀 재밌게 만들어보려고 골머리를 싸맨 선대를 빙다리핫바지로 만드는
철학자 나으리를 보고 계십니다ㅇㅇ
영화 좀 재밌게 만들어보려고 골머리를 싸맨 선대를 빙다리핫바지로 만드는
철학자 나으리를 보고 계십니다ㅇㅇ
게다가 [2]는 혓바닥만 쓸데없이 길어서 참 문제. 어차피 룸빵에서 냄비(수준에 맞춘 단어선정)끼는 거나 마찬가지라 하였으니 이미 초반에 결론을 깔았네ㅇㅇ (...)
※이러다가 이양반, 윤ㅅㅇ처럼 되는게 아닐까나...
tag : 강신주, 냉장고드립도_모자라_술집드립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