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했지만, 조선의 식자계층에서 중시되던 글자는 역시 한문이었습니다.
한문은 진서(眞書)라 불릴 정도로 귀한 취급을 받았죠. 한편으로 언문(言文)이라 불리는 훈민정음도 양반네들이 쏠쏠하게 잘 썼습니다. 정철 같은 양반은 시를 쓰기도 하고,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들은 언문으로 교서를 내렸으며, 임금도 백성들에게 뭔가 널리 알릴 것이 있으면 반드시 언문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지 잘난 맛에 사는 몇몇 병맛들이 감히 선대왕께서 애써 만든 글자를 비하한 것도 사실입니다.
언문? 그거 무식한 상것들이나 계집들이나 쓰는 천한글 아님?
- 출처 : SBS '뿌리깊은나무' -
저런 ㅆㅂㅆ가 죽을라고... 여봐라, 당장 저놈의 주리를 틀라~
- 출처 : SBS '여인천하' -
그런데 중2병 짓도 지나치면 신상털리고 개까임 당하듯이, 조선시대에도 병맛선비 하나가 잘난 체 하다가 작살 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일화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어느 시대 때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사대부라면 오직 한문만을 써야한다고 믿던 무개념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이 놈은 정도가 지나쳐서 일상적으로 하는 말도 꼭 한문을 써서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과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건 그가 처가에 찾아갔을 때였죠.
밤중에 그의 장인이 뒷간에 갔는데, 밤참거리를 찾던 호랭이가 월담해와서 물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놀란 선비는 바로 밖으로 뛰쳐나가 외쳤습니다.
"오인장인吾人丈人을 원산지호遠山之虎가 자근산래自近山來하야 착타거捉打去 하였으니 유창자有槍者는 지대창持帶槍하고 유곤자有棍者는 지대곤持帶棍하고 속속래速速來 하시오!"
동네 사람들의 반응
- 출처 : 웹툰 '이말년 시리즈' -
이것은 해석하자면 '산에서 온 호랭이가 우리 장인을 물어갔으니, 창이 있는 사람은 창을 갖고 오고, 몽둥이가 있는 사람은 몽둥이를 가지고 서둘러 오시오!'...라는 뜻이었습니다.
근데 이렇게 외쳐봤자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그것도 다들 쿨쿨 자는 오밤중에 말입니다.
밤중에 뭔소린가 싶어 깼던 사람들도 그냥 고개 좀 갸웃하다가 다시 자버렸습니다.
이런 동네의 야박한 인심(?)에 분노한 선비는 사또에게 '한문으로' 서신을 적어 '우리 장인께서 호랑이에게 물려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인심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신고를 했습니다.
이 서신을 본 사또가 화가 나서 동네 사람들을 잡아 들였는데, 동네 사람들도 할말이 있었지요.
"아, 그 양반이 뭐라고 하긴 했는데 무슨 소린 지 못 알아 들어서 그냥 잤습니다요."
"뭐 알아 듣게 말해야 도와주던가 하죠."
"근데 그집 식솔들 말론 양반 평소에도 이상하게 말해서 몹시 불편하답니다요."
사정을 들은 사또가 선비를 불러와서 말을 건네보니, 정말 한문으로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던 사또는 한심하고 괘씸한 마음에 이렇게 명을 내렸습니다.
"여봐라, 저 자의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올때까지 매우 쳐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없이 미친놈은 매가 약이죠.
- 출처 : 엔하위키 -
그래서 선비는 볼기를 맞게 되었지요.
근데 몇 대는 버티다가, 나중에는 참지 못했는 지 비명을 지르는데, 입에서 나오는 비명소리가 가관이었습니다.
"통이통야痛而痛也! 통이통야痛而痛也!"
사또 나리, 맞아서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은 뎁쇼.
- 출처 : DC 인사이드 -
저 말을 해석하자면 '아이고 아파라, 아이고 아파라'입니다. 그 마저도 문자를 쓰다니......
기가 막히다 못해 짜증이 났던 사또는 열 받아서 더 때리라고 했지요.
그렇게 피나게 두들겨 맞고, 이 정도면 정신을 차렸다 싶었던 사또는 다시는 쓸때 없이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근데 이 선비놈 말하는 게...
"예, 차후此後로 갱불용更不用 문자文字 하오리다."
(다시는 문자 안 쓰겠습니다.)
- 출처 : 스포츠서울 -
결국 지대로 열받은 사또는 이 진상 선비에게 유배형에 처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선비의 삼촌이 녀석이 유배를 갈 때에 배웅을 나왔습니다. 이 삼촌은 외눈이었는데, 철없긴 해도 조카가 귀양을 간다니 눈물을 흘렸지요. 그러자 선비가 흐느끼면서 하는 말이...
"숙질叔姪 양인兩人이 상포읍相抱泣하니 누삼행淚三行 이로구나."
(삼촌과 조카가 서로 끌어 안고 우니 눈물이 세줄기로 흐르는구나.)
이 말을 들은 삼촌은 "참으로 상종못할 놈이다!"...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는 군요.
유배를 간 선비의 뒷 이야기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밥 달라는 소리도 한문으로 말하다가 결국 굶어죽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