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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기념관] 국내진공작전과 봉오동전투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국내언론의 보도경향
봉오동전투의 전개
1.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1. 독립군단의 전력정비
3·1운동 이후 건립된 항일 독립군단들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면서 전투역량의 강화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독립군은 대체로 연해주에 출병했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암암리에 매각했던 무기를 구입했다. 비용은 주로 이곳 한인사회와 국내에서 군자금으로 헌납된 자금이었다.
독립군의 무기는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일반 군총으로는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미제나 독일제 혹은 일본제 30식 또는 38식 총이 섞여 있었다. 註1) 권총류는 루거식 권총이 가장 흔했으며, 그밖에 7연발식과 남부식南部式 등이 있었다. 중무기는 기관총 및 수류탄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기의 가격은 일정치 않았는데 소총 1정당 탄환 100발을 포함하여 100원 내외였다.
독립군단의 결성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독립군단들은 자체의 무장력을 강화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20년 5월 무렵까지 대한국민회에서는 17만 원을 비롯하여 대한군정서 13만 원, 대한군무독군부 13만 원, 대한신민단 3만 원, 대한광복단 4만 원 등 총 50만 원의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 자금은 대부분 독립전쟁에 사용될 무기구입과 군수품 등에 충당되었다.
무기의 구입과 운반은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위험한 작업이었다. 때문에 대개의 경우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건장한 독립군이 투입되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무기운반대는 보통 1명이 2~3정의 무기와 탄약을 분담하고 대열을 형성하여 이동하였다. 운반 도중 중국관헌의 눈을 피해 먼 길을 우회는 다반사였다. 상황에 따라 중국관헌을 매수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기적으로 공급과 조달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측에게는 중·소 국경지대를 충돌없이 통과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註2)
독립군단은 부대원들에 대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를 통해서 보면, 독립군은 매일 5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집총훈련을 실시하였고, 흙과 모래 6관이 든 무거운 배낭을 메고 군총으로 무장한 채 야산을 오르내리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매일 밤낮으로 2회의 정신교육을 받는 등 강도 높은 훈련이 있었다. 註3)
2.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만주와 연해주지역을 중심으로 각 독립군단이 결성되고 전체적으로 독립군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어 갔다. 항일독립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상해임시정부도 독립전쟁 의지를 천명하는 등 조국광복을 위한 다방면에 걸친 민족역량 결집에 나섰다. 우선 임시정부에서는 군사상 경험이 있는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군사회의를 개최하여 군사계획을 수립할 것과 중국 및 러시아 지역에서 10만 명 이상의 의용지원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독립운동진영의 항일의지를 고양하였다. 註4) 뿐만 아니라 1920년 1월 8일자 『독립신문』에서는 ‘우리의 당면 대문제는 우리의 독립운동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라는 방계를 고쳐 전쟁하려 함이요’·‘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독립에 반대하는 자’라는 취지의 안창호의 연설을 게재하여 재차 독립전쟁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註5)
1920년대 초부터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국경지역의 경찰병력을 대폭 강화하였다. 보통은 1개 군에 1개의 경찰서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국경 3도에는 함경북도 11개 군에 경찰서 19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30개, 출장소 42개소를 두었다. 함경남도에는 16개 군에 경찰서 20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80개, 출장소 12개를 설치하였다. 평안북도 19개 군에는 경찰서 24개, 파출소 5개, 주재소 195개, 출장소 84개를 설치했다. 특히 압록강 연안에는 10리마다 주재소 또는 파출소를 하나씩 설치하여 4~10인의 경비경찰관을 배치하였다. 당시 경비경찰관의 수는 1925년 현재 5,882명이었다.
시설면에서 보면 주재소 주변에는 반드시 참호와 철조망을 설치하였다. 1923년부터는 2척尺 높이의 석벽을 설치하는 등 자체 방어시설을 강화시켰다. 이밖에 압록강 강안江岸에는 기관총을 탑재한 발동선 3척을 배치하였으며, 두만강 강안에는 경비선 1척을 배치할 정도로 독립군 경계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강안 곳곳에는 참호를 설치하는 등 강을 따라 월경하는 독립군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註6) 뿐만 아니라 일제는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경비전화 가설을 크게 늘려 독립군 기습에 신속하게 대응하도록 하였다. 경찰관들에게는 38식 또는 44식의 최신식 총기류를 지급하는 등 공포분위기 조성을 통한 국내와 독립군 사이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강화에도 일제경찰은 수시로 반복되는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으로 ‘촌각도 안심할 수 없었으며, 불시에 대비하기 위해 총기를 목침으로 가면假眠’할 수밖에 없었다. 註7)
대체로 1920년대 전반기의 경우 독립군의 국내진격활동은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독립군은 이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이를 정리하면 〈표 7〉과 같다.
〈표 7〉에서 보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이 있었던 1920년 경우에만 연인원 4,643명의 독립군이 1,651회에 달하는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경찰서와 관공서 37곳을 공격했다.
[註 1] 강덕상·미촌수수, 『現代史資料』 27, 375~376쪽. ☞
[註 2]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115~117쪽. ☞
[註 3] 강덕상·미촌수수, 『현대사자료』 27, 347쪽. ☞
[註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3, 282쪽. ☞
[註 5] 『독립신문』 1920년 1월 8일 「우리 국민이 단절코 실행할 6대사」. ☞
[註 6] 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警察之槪要』, 1925, 123~124쪽. 이 표는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4, 62쪽의 표를 재인용하였다. 이 자료는 일제측에 작성한 자료임으로 독립군의 실제 활동은 이 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註 7] 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警察之槪要』, 118~122쪽. ☞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국내언론의 보도경향
봉오동전투의 전개
1.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1. 독립군단의 전력정비
3·1운동 이후 건립된 항일 독립군단들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면서 전투역량의 강화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독립군은 대체로 연해주에 출병했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암암리에 매각했던 무기를 구입했다. 비용은 주로 이곳 한인사회와 국내에서 군자금으로 헌납된 자금이었다.
독립군의 무기는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일반 군총으로는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미제나 독일제 혹은 일본제 30식 또는 38식 총이 섞여 있었다. 註1) 권총류는 루거식 권총이 가장 흔했으며, 그밖에 7연발식과 남부식南部式 등이 있었다. 중무기는 기관총 및 수류탄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기의 가격은 일정치 않았는데 소총 1정당 탄환 100발을 포함하여 100원 내외였다.
독립군단의 결성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독립군단들은 자체의 무장력을 강화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20년 5월 무렵까지 대한국민회에서는 17만 원을 비롯하여 대한군정서 13만 원, 대한군무독군부 13만 원, 대한신민단 3만 원, 대한광복단 4만 원 등 총 50만 원의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 자금은 대부분 독립전쟁에 사용될 무기구입과 군수품 등에 충당되었다.
무기의 구입과 운반은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위험한 작업이었다. 때문에 대개의 경우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건장한 독립군이 투입되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무기운반대는 보통 1명이 2~3정의 무기와 탄약을 분담하고 대열을 형성하여 이동하였다. 운반 도중 중국관헌의 눈을 피해 먼 길을 우회는 다반사였다. 상황에 따라 중국관헌을 매수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기적으로 공급과 조달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측에게는 중·소 국경지대를 충돌없이 통과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註2)
독립군단은 부대원들에 대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를 통해서 보면, 독립군은 매일 5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집총훈련을 실시하였고, 흙과 모래 6관이 든 무거운 배낭을 메고 군총으로 무장한 채 야산을 오르내리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매일 밤낮으로 2회의 정신교육을 받는 등 강도 높은 훈련이 있었다. 註3)
2.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만주와 연해주지역을 중심으로 각 독립군단이 결성되고 전체적으로 독립군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어 갔다. 항일독립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상해임시정부도 독립전쟁 의지를 천명하는 등 조국광복을 위한 다방면에 걸친 민족역량 결집에 나섰다. 우선 임시정부에서는 군사상 경험이 있는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군사회의를 개최하여 군사계획을 수립할 것과 중국 및 러시아 지역에서 10만 명 이상의 의용지원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독립운동진영의 항일의지를 고양하였다. 註4) 뿐만 아니라 1920년 1월 8일자 『독립신문』에서는 ‘우리의 당면 대문제는 우리의 독립운동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라는 방계를 고쳐 전쟁하려 함이요’·‘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독립에 반대하는 자’라는 취지의 안창호의 연설을 게재하여 재차 독립전쟁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註5)
1920년대 초부터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국경지역의 경찰병력을 대폭 강화하였다. 보통은 1개 군에 1개의 경찰서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국경 3도에는 함경북도 11개 군에 경찰서 19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30개, 출장소 42개소를 두었다. 함경남도에는 16개 군에 경찰서 20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80개, 출장소 12개를 설치하였다. 평안북도 19개 군에는 경찰서 24개, 파출소 5개, 주재소 195개, 출장소 84개를 설치했다. 특히 압록강 연안에는 10리마다 주재소 또는 파출소를 하나씩 설치하여 4~10인의 경비경찰관을 배치하였다. 당시 경비경찰관의 수는 1925년 현재 5,882명이었다.
시설면에서 보면 주재소 주변에는 반드시 참호와 철조망을 설치하였다. 1923년부터는 2척尺 높이의 석벽을 설치하는 등 자체 방어시설을 강화시켰다. 이밖에 압록강 강안江岸에는 기관총을 탑재한 발동선 3척을 배치하였으며, 두만강 강안에는 경비선 1척을 배치할 정도로 독립군 경계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강안 곳곳에는 참호를 설치하는 등 강을 따라 월경하는 독립군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註6) 뿐만 아니라 일제는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경비전화 가설을 크게 늘려 독립군 기습에 신속하게 대응하도록 하였다. 경찰관들에게는 38식 또는 44식의 최신식 총기류를 지급하는 등 공포분위기 조성을 통한 국내와 독립군 사이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강화에도 일제경찰은 수시로 반복되는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으로 ‘촌각도 안심할 수 없었으며, 불시에 대비하기 위해 총기를 목침으로 가면假眠’할 수밖에 없었다. 註7)
<독립군이 전투할 당시 사용하였던 진군기와 나팔>
대체로 1920년대 전반기의 경우 독립군의 국내진격활동은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독립군은 이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이를 정리하면 〈표 7〉과 같다.
〈표 7〉에서 보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이 있었던 1920년 경우에만 연인원 4,643명의 독립군이 1,651회에 달하는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경찰서와 관공서 37곳을 공격했다.
[註 1] 강덕상·미촌수수, 『現代史資料』 27, 375~376쪽. ☞
[註 2]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115~117쪽. ☞
[註 3] 강덕상·미촌수수, 『현대사자료』 27, 347쪽. ☞
[註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3, 282쪽. ☞
[註 5] 『독립신문』 1920년 1월 8일 「우리 국민이 단절코 실행할 6대사」. ☞
[註 6] 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警察之槪要』, 1925, 123~124쪽. 이 표는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4, 62쪽의 표를 재인용하였다. 이 자료는 일제측에 작성한 자료임으로 독립군의 실제 활동은 이 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註 7] 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警察之槪要』, 118~12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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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養錢, 一日用錢] 광복군 작전사-버마전선의 광복군 (작성자 바스통)
광복군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버마와 임팔전선에서 파견되어 영국과 함께 대일 결전을 치뤘다는 예기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몇년 전부터는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그래봐야 꼴랑 2줄 이하) 광복군의 뚜렷한 대일 군사행동이었던 만큼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일인데 문제는 그에 대해 정리된 자료는 적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광복군의 임팔전선 파견지대에대해 배경과 전과등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임팔 파병의 배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제 20차 국무회의에서 미국의 태평양 전쟁 발발을 기점으로 일본에 대일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나라 없는 임시정부가 어떻게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하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러니 저러니해도 대일 선전(宣戰)과 앞으로 알아 볼 임팔전선 파견 두가지는 확실한 임정의 대일 군사활동이었다는 걸 먼저 못 박아 두고 싶다.
아무튼 당시의 임팔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는데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개시된 일본의 동남아에서의 공세적인 행동은 잘 아시다 싶이 연합국에 불리하게 작용하여서 이미 버마가 축출되고 영국군은 인도로 쫒겨났으나 유럽전선이 훨씬 우선순위에 있음으로 인도따위는 우선순위에서 크게 밀려 있어 지원따윈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영국과 미국등 연합국은 전선 유지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는데 여기에서 또 동상이몽을 하게 된다. 미국은 당시 중국 국민당과 중국군을 지원하는데 적극적이었는데 특히나 1943년에 개시된 중국군에 대한 훈련과 미중 연합군 3만5천명의 북부 버마 탈환을 위한 미치나 공격이 미국의 생각을 대변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반대로 영국은 중국이 연합국에 절대 발을 빼지 않을 것이고 그것 이외에는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특히나 중국이 미국과 손잡고 주도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경우 전후 발언권이 커져 과거 동남아 식민지의 유지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계산했다. 때문에 중국군과의 합동작전에서도 미온적이었으며 당연히 지원에 대해서도 미온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중국의 발언권 확대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없지는 않았다.
반면에 임정의 경우 군사적으로는 광복군을 키우면서도 외교적으로 합법 임시 정부로써 각국으로 부터 인정받는 것과 더불어 국민당 정부로 부터 자금과 지원을 벗어나 타 연합국으로 부터 자금 군사물자 유입 경로를 다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고 있었다.(결국 이 노력은 1944년에 가야 물꼬를 트지만 궁극적으로는 광복이 될때까지 실현시키지 못했고 광복군과 임정을 얶메는 족쇄가 되었다.) 이런 양측의 이해관계 속에서 인도 주둔 영국군 사령부는 임정에 광복군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한영 군사상호 협정서과 이후의 과정
당시의 협정을 보다면 정확하게는 영국군과 협상을 맺은 주체는 대한민국 임정이 아니었고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때문에 광복군의 파인 협정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주인(駐印)이 재인 영국군 주인과 같이 찍혀있다. 영국측 협상 대표는 콜린 맥킨지(인명사전 뒤지면 나오는 영국군 그 맥킨지)였고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는 김약산(김원봉)이었다.
협정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요약하자면 영국군내에서의 광복군 파견대의 지위와 인원 그리고 임무등을 명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영어와 일어에 능숙한 간부들을 각 지대에서 선발하여 대장 한지성을 필두로 부대장 문응국, 최봉진·김상준·나동국·박영진·송철·김성호·이동수등으로 구성된 한국 광복군 인면전구 공작대가 편성되고 1943년 8월에 캘카타로 파견되어 GISK(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사령부) 201부대에 배속되게 된다. 파견 인원수와 관련해서는 9명에서 20명까지 기록에서의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조선민족혁명당이 1944년 12월 8일 국무회의에서 인도 공작대에 관한 일체관계를 임시정부로 이관시켰고 그에 따라 영국군과의 재차 협정 체결과 증파의 필요성에 따라서 5명 내외의 인원이 추가 증파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버마전선의 광복군의 파견인원은 14명에서 15명인 것으로 보인다.
[작전과 전과]
제201부대에 배속된 공작대의 임무는 선전공작, 적정수집, 대적 방송 및 선전삐라 살포 등을 전개하였으며 버마 서북방 지역, 임팔, 만테레이, 모뇌로 각각의 조를 이루어 분산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선전 작전으로 기무라 소위등 27명이 영국군측에 항복하기도 했는데 포로들이 광복군이 버마전선에 참전하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에게 적지않은 심리적 타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응국, 최봉진, 나동규,김상준 대원등은 1944년1월 영국군 1개 사단 병력(개인적으론 인도 주둔 영국군17사단이 아닌가 싶다.)이 임팔 방면에서 일본군(개인적으로는 15군 사령부 예하에 31사 15사 33사가 아닌가 싶다.)에게 포위 당할뻔 하였으나 지속적인 적진 탐색과 적 문서등을 통해 이를 모면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는 버마 전선에 파견된 광복군 공작대에게 가장 큰 전공으로 기록된다.
별도로 각 전지에 있던 공작대는 협정 내용에도 있듯 당시 버마전선으로 파견되어 있던 한국 국적의 일본군 포로들을 별도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수는 100명정도 였는데 가장 고위 계급은 15사단 군속 고등관(일제시대때의 관리 등급 칙임관과 주임관을 묶어서 부르는 명칭)이었던 김귀락을 포함하여 100명 내외였다고 하며 이들을 이후에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100명이라면 1945년 당시에 700명 내외의 광복군에게 매우 큰 전력이었을 것이다.)
위의 3개가 당시 버마전선의 전공으로써 상당 부분은 오래전에 대한광복군인회의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추가적인 전공과 관련된 수훈 심지어는 각 조가 배치 된 부대까지도 정확하게 나와있는 관련 자료가 매우 부실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버마전선의 광복군은 1945년 9월 임무를 종료하고 전원 원대 복귀하게 된다.
광복군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버마와 임팔전선에서 파견되어 영국과 함께 대일 결전을 치뤘다는 예기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몇년 전부터는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그래봐야 꼴랑 2줄 이하) 광복군의 뚜렷한 대일 군사행동이었던 만큼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일인데 문제는 그에 대해 정리된 자료는 적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광복군의 임팔전선 파견지대에대해 배경과 전과등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임팔 파병의 배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제 20차 국무회의에서 미국의 태평양 전쟁 발발을 기점으로 일본에 대일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나라 없는 임시정부가 어떻게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하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러니 저러니해도 대일 선전(宣戰)과 앞으로 알아 볼 임팔전선 파견 두가지는 확실한 임정의 대일 군사활동이었다는 걸 먼저 못 박아 두고 싶다.
아무튼 당시의 임팔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는데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개시된 일본의 동남아에서의 공세적인 행동은 잘 아시다 싶이 연합국에 불리하게 작용하여서 이미 버마가 축출되고 영국군은 인도로 쫒겨났으나 유럽전선이 훨씬 우선순위에 있음으로 인도따위는 우선순위에서 크게 밀려 있어 지원따윈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영국과 미국등 연합국은 전선 유지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는데 여기에서 또 동상이몽을 하게 된다. 미국은 당시 중국 국민당과 중국군을 지원하는데 적극적이었는데 특히나 1943년에 개시된 중국군에 대한 훈련과 미중 연합군 3만5천명의 북부 버마 탈환을 위한 미치나 공격이 미국의 생각을 대변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반대로 영국은 중국이 연합국에 절대 발을 빼지 않을 것이고 그것 이외에는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특히나 중국이 미국과 손잡고 주도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경우 전후 발언권이 커져 과거 동남아 식민지의 유지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계산했다. 때문에 중국군과의 합동작전에서도 미온적이었으며 당연히 지원에 대해서도 미온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중국의 발언권 확대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없지는 않았다.
반면에 임정의 경우 군사적으로는 광복군을 키우면서도 외교적으로 합법 임시 정부로써 각국으로 부터 인정받는 것과 더불어 국민당 정부로 부터 자금과 지원을 벗어나 타 연합국으로 부터 자금 군사물자 유입 경로를 다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고 있었다.(결국 이 노력은 1944년에 가야 물꼬를 트지만 궁극적으로는 광복이 될때까지 실현시키지 못했고 광복군과 임정을 얶메는 족쇄가 되었다.) 이런 양측의 이해관계 속에서 인도 주둔 영국군 사령부는 임정에 광복군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한영 군사상호 협정서과 이후의 과정
당시의 협정을 보다면 정확하게는 영국군과 협상을 맺은 주체는 대한민국 임정이 아니었고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때문에 광복군의 파인 협정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주인(駐印)이 재인 영국군 주인과 같이 찍혀있다. 영국측 협상 대표는 콜린 맥킨지(인명사전 뒤지면 나오는 영국군 그 맥킨지)였고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는 김약산(김원봉)이었다.
협정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조선 민족혁명당은 영국군과 합작하고 대일 전투를 역행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혁명당 연락대를 주인도 영국군에 파견한다.
2. 전항 파견된 연락대는 대장을 포함하여 10명 내지 25명으로 정하고 영군과 동일한 군복을 착용하여 조선 민족혁명당 배지를 구별하여 사용한다.
3. 연락대의 주요 임무는 영군의 대일 작전에 응하여 대적선전 및 노획한 적군 문서의 번역을 포함한다.
4. 연락대의 복무 기한은 제 1차로 6개월로 정하고 연속 복무는 쌍방 합의로 연장한다.
5. 전항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조선 민족혁명당의 필요에 의하거나 혹은 영국군의 요구가 있을시는 일부 혹은 전부 인원을 원대 복귀한다.
6. 연락대의 대장은 주인도 영국군 대위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대원 중 특별한 공을 세운 자는 심사 표창하여 특별한 대우를 한다.
7. 조선 민족혁명당의 유효하고 강력한 공작과 영국군과의 긴밀한 합동작전을 위하여 인도에 상주 대표를 파견할 수 있다.
8. 조선 연락대는 영국군이 나포한 한국인 포로를 필요에 따라 훈련한다.
9. 연락대와 상주 대표의 파견 이전 및 소환(召還)에 관한 일체경비는 영국군이 부담한다.
10. 연락대의 이동 및 장비는 영국군 장교와 동등하게 한다.
11.뉴델리에서 공작하는 대원에게는 무료로 숙소를 제공한다. 단, 「호텔」에 거주가 가능하여 제공된다면 월 숙식비로 100루비 이내를 월급에서 공제한다.
12. 조선 민족혁명당 대표와 그 수행 장교는 뉴델리에 상주하며 일체경비는 영국군이 제공한다.
2. 전항 파견된 연락대는 대장을 포함하여 10명 내지 25명으로 정하고 영군과 동일한 군복을 착용하여 조선 민족혁명당 배지를 구별하여 사용한다.
3. 연락대의 주요 임무는 영군의 대일 작전에 응하여 대적선전 및 노획한 적군 문서의 번역을 포함한다.
4. 연락대의 복무 기한은 제 1차로 6개월로 정하고 연속 복무는 쌍방 합의로 연장한다.
5. 전항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조선 민족혁명당의 필요에 의하거나 혹은 영국군의 요구가 있을시는 일부 혹은 전부 인원을 원대 복귀한다.
6. 연락대의 대장은 주인도 영국군 대위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대원 중 특별한 공을 세운 자는 심사 표창하여 특별한 대우를 한다.
7. 조선 민족혁명당의 유효하고 강력한 공작과 영국군과의 긴밀한 합동작전을 위하여 인도에 상주 대표를 파견할 수 있다.
8. 조선 연락대는 영국군이 나포한 한국인 포로를 필요에 따라 훈련한다.
9. 연락대와 상주 대표의 파견 이전 및 소환(召還)에 관한 일체경비는 영국군이 부담한다.
10. 연락대의 이동 및 장비는 영국군 장교와 동등하게 한다.
11.뉴델리에서 공작하는 대원에게는 무료로 숙소를 제공한다. 단, 「호텔」에 거주가 가능하여 제공된다면 월 숙식비로 100루비 이내를 월급에서 공제한다.
12. 조선 민족혁명당 대표와 그 수행 장교는 뉴델리에 상주하며 일체경비는 영국군이 제공한다.
요약하자면 영국군내에서의 광복군 파견대의 지위와 인원 그리고 임무등을 명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영어와 일어에 능숙한 간부들을 각 지대에서 선발하여 대장 한지성을 필두로 부대장 문응국, 최봉진·김상준·나동국·박영진·송철·김성호·이동수등으로 구성된 한국 광복군 인면전구 공작대가 편성되고 1943년 8월에 캘카타로 파견되어 GISK(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사령부) 201부대에 배속되게 된다. 파견 인원수와 관련해서는 9명에서 20명까지 기록에서의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조선민족혁명당이 1944년 12월 8일 국무회의에서 인도 공작대에 관한 일체관계를 임시정부로 이관시켰고 그에 따라 영국군과의 재차 협정 체결과 증파의 필요성에 따라서 5명 내외의 인원이 추가 증파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버마전선의 광복군의 파견인원은 14명에서 15명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임팔지구에 뿌려진 삐라중 하나>
[작전과 전과]
제201부대에 배속된 공작대의 임무는 선전공작, 적정수집, 대적 방송 및 선전삐라 살포 등을 전개하였으며 버마 서북방 지역, 임팔, 만테레이, 모뇌로 각각의 조를 이루어 분산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선전 작전으로 기무라 소위등 27명이 영국군측에 항복하기도 했는데 포로들이 광복군이 버마전선에 참전하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에게 적지않은 심리적 타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응국, 최봉진, 나동규,김상준 대원등은 1944년1월 영국군 1개 사단 병력(개인적으론 인도 주둔 영국군17사단이 아닌가 싶다.)이 임팔 방면에서 일본군(개인적으로는 15군 사령부 예하에 31사 15사 33사가 아닌가 싶다.)에게 포위 당할뻔 하였으나 지속적인 적진 탐색과 적 문서등을 통해 이를 모면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는 버마 전선에 파견된 광복군 공작대에게 가장 큰 전공으로 기록된다.
별도로 각 전지에 있던 공작대는 협정 내용에도 있듯 당시 버마전선으로 파견되어 있던 한국 국적의 일본군 포로들을 별도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수는 100명정도 였는데 가장 고위 계급은 15사단 군속 고등관(일제시대때의 관리 등급 칙임관과 주임관을 묶어서 부르는 명칭)이었던 김귀락을 포함하여 100명 내외였다고 하며 이들을 이후에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100명이라면 1945년 당시에 700명 내외의 광복군에게 매우 큰 전력이었을 것이다.)
위의 3개가 당시 버마전선의 전공으로써 상당 부분은 오래전에 대한광복군인회의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추가적인 전공과 관련된 수훈 심지어는 각 조가 배치 된 부대까지도 정확하게 나와있는 관련 자료가 매우 부실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버마전선의 광복군은 1945년 9월 임무를 종료하고 전원 원대 복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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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養錢, 一日用錢] 광복군 작전사-초모 공작 (작성자 바스통)
광복군은 두가지의 고질적인 문제에 시달렸는데 하나는 제정적인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지원 인원의 부족이었다. 창설 당시에 12명의 장교로 시작한 광복군이지만 사실 광복군 총사령부는 2년내에 3개 사단 규모로 광복군을 확장 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인원 부족으로 결국 광복군 1,2,3,5 지대 밖에 편성 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인원 부족으로 재편성을 해야할 정도로 광복군의 인원 부족은 심각한 상태였다. 사실상 인적자원 대부분이 윤함구(국민당 정부는 45년까지 중국 지역을 윤함구, 대후방, 해방구로 구분했는데 윤함구는 일본군 점령지역, 대후방은 국민당 점령지역 해방구는 공산당 점령지역을 뜻한다.)에 들어가 있었고 한인 교포 대다수가 거주하는 화북지방은 중국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의 활동지역으로 광복군이 활동하기 위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광복군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초모 공작 즉 적지에서 인원을 끌어들이는 공작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공작대의 조직과 활동]
사실 이런 인적 자원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초모 공작은 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기 이전인 1939년 9월 부터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 이들은 서안 방면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서안 공작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적을 5지대의 서안 공작과는 큰 상관은 없다. 아무튼 이들은 조성환을 주임으로 군사특파원 6명을 임명하고 그 다음달부터 서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초모공작을 벌였고 총사령부가 창설 된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였고 최종적으로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하면서 그 다음해 1월에 임정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인력과 물적 자원 미비로 그 성과는 매우 작았다.
한편 광복군 총사령부는 초모 공작의 임무를 첫째는 사병의 모집 둘째는 선전과 정보 수집 셋째는 적정정찰 마지막으로 필요시에 유격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이는 서안이라는 지역이 공작과 작전의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병력확보에도 유리한 지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광복군 사령부는 각지대에 초모 공작대를 설치하고 각 지대장을 징모분처로 임명하여 병력 확보를 크게 독려한다. 다음은 각지대의 공작대와 활동 지역이다.
제1지대/ 노태준등 7명/ 산서성과 하남성 일대에서 활동
제2지대/나태섭등 4명/장가구, 하북성 일대에서 활동
제3지대/이복원등4명/안휘성, 강소, 산동성 일대에서 활동
제5지대/이하우등7명/북만주 일대에서 활동
제6지대/이지일등수명/강서, 남경 그리고 안경 일대에서 활동
이들은 각기 활동구역에서 사병 모집, 선전공작 및 적정 수집 그리고 수차례의 반정 공작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공작의 성과와 그 후]
이들의 이러한 활동에도 뚜렷한 성과는 제 5지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임정 자체의 공작비용이 부족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임정은 중국의 원조금과 동포들의 군자금이나 매달 1500원의 애국 성금으로는 상당히 빠듯한 살림을 살고 있었다. 특히나 미국 지역의 두 한인 단체인 안창호(이미 오래전에 순국하였지만)계열의 연합회와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신나게 싸우던 시기라 임정의 재정난이 가중되는 시점이어서 충분하게 공작금을 지원할 수가 없었다,(쩝....) 또디른 이유는 중국군의 협조가 극히 미미했기 때문인데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장제스와 국민당군은 광복 전까지 광복군에게 꼬장을 많이 피웠는데 이 부분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래도 이러한 초모 공작으로 총사령부 창설 1년만에 광복군의 전력은 창설때보다 10배인 30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대로 1~5지대(6지대는 제대로 편제도....)는 이후에 1지대와 2지대로 재편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김학규가 1942년에 3지대를 창설하고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2지대를 보충함에도 불구하고 1지대와 2지대의 정원은 277명이 미달되었고 3지대도 당시에 70명 내외의 유명무실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태평양 전쟁 개전과 함께 1942년 2월에 김학규를 단장으로 7명의 공작언을 안휘성으로 파견하여 징집과 선전 공작을 벌였지만 이미 대일 항전과 태평양전쟁이 전개되던 시점에서도 보다 싶이 규모면에서 광복군의 애초에 목표였던 정규전을 통한 대일 항전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같은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1943년 10월에 이청천, 김약산, 이복원등 3인은 '군사 정책에 관한 제안'이라는 제목의 제안서를 의정군에 제출하는데 전체 내용을 쓰기는 그렇기 때문에 주요 내용만 간추리자면 광복군의 병력 표준을 30만으로 정하고 이를 위해서 중국으로 부터의 탈피와 군자금 다원화를 추진하고 해외 한인 무장단체 즉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연안파 조선의용군이나 간도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계열의 소규모 무장 단체들과의 연계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중국으로의 부터의 자금 독립과 다변화는 꾸준히 진행되지만 한인 무장단체와의 연계는 사실 이상에 가까운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들은 중국 공산당과 소련으로 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전후 한국의 정치 판도를 형성할 실력있는 세력으로 볼 수 있었던 만큼 비록 임정과 광복군의 한인에 대한 대표성에 대한 자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었으나 현실적으로 3대 세력의 통합이나 연계는 이상에 가까운 제안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악조건적 상황속에서도 김학규의 3지대의 경우 1944년 말에 50명의 한인을 모병하므로써 1945년 3월에 정식적으로 3지대로 승격되어는 등 전력은 꾸준히 보충되었다. 결과적으로 1945년 5월의 광복군의 전력은 1지대와 2지대 그리고 3지대를 주축으로 인도 캘카타에 있던 버마 공작대와 성도 훈련반을 포함하여 574명의 전력을 확보하였다. 초모 공작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본군으로 부터 광복군을 모으기 위한 활동이면서 동시에 중국군으로 부터 광복군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이기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광복군은 두가지의 고질적인 문제에 시달렸는데 하나는 제정적인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지원 인원의 부족이었다. 창설 당시에 12명의 장교로 시작한 광복군이지만 사실 광복군 총사령부는 2년내에 3개 사단 규모로 광복군을 확장 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인원 부족으로 결국 광복군 1,2,3,5 지대 밖에 편성 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인원 부족으로 재편성을 해야할 정도로 광복군의 인원 부족은 심각한 상태였다. 사실상 인적자원 대부분이 윤함구(국민당 정부는 45년까지 중국 지역을 윤함구, 대후방, 해방구로 구분했는데 윤함구는 일본군 점령지역, 대후방은 국민당 점령지역 해방구는 공산당 점령지역을 뜻한다.)에 들어가 있었고 한인 교포 대다수가 거주하는 화북지방은 중국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의 활동지역으로 광복군이 활동하기 위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광복군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초모 공작 즉 적지에서 인원을 끌어들이는 공작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공작대의 조직과 활동]
사실 이런 인적 자원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초모 공작은 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기 이전인 1939년 9월 부터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 이들은 서안 방면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서안 공작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적을 5지대의 서안 공작과는 큰 상관은 없다. 아무튼 이들은 조성환을 주임으로 군사특파원 6명을 임명하고 그 다음달부터 서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초모공작을 벌였고 총사령부가 창설 된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였고 최종적으로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하면서 그 다음해 1월에 임정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인력과 물적 자원 미비로 그 성과는 매우 작았다.
한편 광복군 총사령부는 초모 공작의 임무를 첫째는 사병의 모집 둘째는 선전과 정보 수집 셋째는 적정정찰 마지막으로 필요시에 유격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이는 서안이라는 지역이 공작과 작전의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병력확보에도 유리한 지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광복군 사령부는 각지대에 초모 공작대를 설치하고 각 지대장을 징모분처로 임명하여 병력 확보를 크게 독려한다. 다음은 각지대의 공작대와 활동 지역이다.
제1지대/ 노태준등 7명/ 산서성과 하남성 일대에서 활동
제2지대/나태섭등 4명/장가구, 하북성 일대에서 활동
제3지대/이복원등4명/안휘성, 강소, 산동성 일대에서 활동
제5지대/이하우등7명/북만주 일대에서 활동
제6지대/이지일등수명/강서, 남경 그리고 안경 일대에서 활동
이들은 각기 활동구역에서 사병 모집, 선전공작 및 적정 수집 그리고 수차례의 반정 공작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공작의 성과와 그 후]
이들의 이러한 활동에도 뚜렷한 성과는 제 5지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임정 자체의 공작비용이 부족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임정은 중국의 원조금과 동포들의 군자금이나 매달 1500원의 애국 성금으로는 상당히 빠듯한 살림을 살고 있었다. 특히나 미국 지역의 두 한인 단체인 안창호(이미 오래전에 순국하였지만)계열의 연합회와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신나게 싸우던 시기라 임정의 재정난이 가중되는 시점이어서 충분하게 공작금을 지원할 수가 없었다,(쩝....) 또디른 이유는 중국군의 협조가 극히 미미했기 때문인데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장제스와 국민당군은 광복 전까지 광복군에게 꼬장을 많이 피웠는데 이 부분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래도 이러한 초모 공작으로 총사령부 창설 1년만에 광복군의 전력은 창설때보다 10배인 30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대로 1~5지대(6지대는 제대로 편제도....)는 이후에 1지대와 2지대로 재편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김학규가 1942년에 3지대를 창설하고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2지대를 보충함에도 불구하고 1지대와 2지대의 정원은 277명이 미달되었고 3지대도 당시에 70명 내외의 유명무실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태평양 전쟁 개전과 함께 1942년 2월에 김학규를 단장으로 7명의 공작언을 안휘성으로 파견하여 징집과 선전 공작을 벌였지만 이미 대일 항전과 태평양전쟁이 전개되던 시점에서도 보다 싶이 규모면에서 광복군의 애초에 목표였던 정규전을 통한 대일 항전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같은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1943년 10월에 이청천, 김약산, 이복원등 3인은 '군사 정책에 관한 제안'이라는 제목의 제안서를 의정군에 제출하는데 전체 내용을 쓰기는 그렇기 때문에 주요 내용만 간추리자면 광복군의 병력 표준을 30만으로 정하고 이를 위해서 중국으로 부터의 탈피와 군자금 다원화를 추진하고 해외 한인 무장단체 즉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연안파 조선의용군이나 간도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계열의 소규모 무장 단체들과의 연계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중국으로의 부터의 자금 독립과 다변화는 꾸준히 진행되지만 한인 무장단체와의 연계는 사실 이상에 가까운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들은 중국 공산당과 소련으로 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전후 한국의 정치 판도를 형성할 실력있는 세력으로 볼 수 있었던 만큼 비록 임정과 광복군의 한인에 대한 대표성에 대한 자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었으나 현실적으로 3대 세력의 통합이나 연계는 이상에 가까운 제안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악조건적 상황속에서도 김학규의 3지대의 경우 1944년 말에 50명의 한인을 모병하므로써 1945년 3월에 정식적으로 3지대로 승격되어는 등 전력은 꾸준히 보충되었다. 결과적으로 1945년 5월의 광복군의 전력은 1지대와 2지대 그리고 3지대를 주축으로 인도 캘카타에 있던 버마 공작대와 성도 훈련반을 포함하여 574명의 전력을 확보하였다. 초모 공작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본군으로 부터 광복군을 모으기 위한 활동이면서 동시에 중국군으로 부터 광복군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이기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4] ※해당 블로그의 글이 공식기관 혹은 학술자료의 펌글인지, 독자연구인지는 판독불능
[千日養錢, 一日用錢] 광복군 작전사-국내진공작전 (작성자 바스통)
많은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항일투쟁사 대목은 아무래도 가장 말미를 장식하던 국내 진공작전이 아닌가 싶다. 사실 임정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려 계획했던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1919년에 설립된 의민단이라는 천주교계 무장 독립 단체는 궁극적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고 임정과도 매우 긴밀하게 연락을 유지하면서 청산리 전투등에 참전하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대한 독립군단 자체이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지게 된다. 한마디로 처음은 아니라는 거죠.
들어가기에 앞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국내 진공작전은 대대적인 정규전 형식의 전면전이 아닌 미국의 미육군특전단이나 한국의 특전사와 같이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작전이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후일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미군이 상륙할 것을 대비해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 공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본격적인 침공이 있기 전에 국내 각지에 정보를 수집하고 항일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광복군와 OSS반의 국내 잠입 목적은 시설을 폭파하고 공격하는 직접적인 유격전의 형식보다는 (최소한 일정기간동안)베트남에서 몽족을 반공부대로 만드는 것과 같은 비정규전이었고 정진대(선발대) 인원이 22명이었던 이유도 각 지역에 할당지역을 정하였던 이유도 직접 전투보다는 세력을 구축하려는 의미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미군과의 협력]
1943년경 대내외적인 환경은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었는데 내적으로는 김약산의 광복군에 흡수되었고 외적으로는 서서히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연합국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광복군 사령부의 이청천과 김약산 등은 동년 10월 35차 임시의정원회의에 새로운 군사건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는데 주요 내용은 중, 미, 영, 소등 연합국들과 차관등과 함께 특수군사 교육에 대한 문제도 교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지만 국민당과의 준승등으로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1943년 2월, 임정의 외무부에 있던 안원생이 당시 미주중대사와 주중 미군 사령관들과 긴밀하게 관계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주중 미공군 사령부 정보장교였던 웜스(Clarence B. Weems)와 김구 주석이 임정 청사에서 만나 한미 군사합작에 대한 첫 토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미국과의 군사협력의 시발은 임정이 아닌 미국의 구미위원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이미 1943년 초부터 구미위원회의 추천으로 한인 청년들이 OSS에 들어가 대일 항쟁에 투입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하태씨(전 목원대 총장)가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채용이 거부 되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도 OSS의 한인 채용이 구미위원회의 추천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버마전선등 태평양 전선에 배치되었는데 이유는 당연히 특기상 일본과의 정보전을 위한 목적이었고 후에 광복군과의 합작 작전을 위해 한국 그룹으로도 편성되어 광복군과의 작전에서 다리역활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들은 OSS 소속으로 후에 있을 광복군 정진대와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전적으로 미 OSS소속 한국 그룹이었고 광복군 정진대의 소속은 임시정부 광복군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에 일이지만 해방후에 미군정에 이승만을 적극적 추천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승만쪽 사람이었던 것이다.(어폐가 좋지 않을 수 있지만 1925년 구미위원부는 임정의 철폐 명령을 받고도 이승만의 의해서 존속되었고 이승만이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자 다시 연계 활동을 벌였다.)
다시 광복군으로 돌아와서 임정-미국 간의 1차적인 정보 접촉 활동이 이루어 지는 동안 특수 훈련 계획도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범석이 곤명에 주둔한 제14 미육군 항공대와 접촉하였고 1944년 가을에는 중경의 주중 미군 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중장과 광복군 작전계획과 한미합작에 대한 토의가 오고 갔으며 순차적으로 합의가 도출되면서 서서히 실천 단계로 이행되었다. 그러던 중 12월 제 14항공대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임정 요원과의 면담과 광복군 1, 2지대 본부를 방문하여 시찰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1945년 3월에 김학규가 고명의 제 14 항공단 사령관인 첸놀트와 면담함으로써 한미간의 군사 합작 계획과 그에 따른 세부 계획 그리고 구체적인 실시 방안까지도 합의를 보게 되고 이를 임정과 사령부에 보고하고 공식적으로 제가를 받았다. 물론 중국 군사위원회에도 동의를 얻는다.
<한 ·미 군사합작 합의사항>
① 한 ·미 양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한다.
② 한국 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 기술과 기타 필요한 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 작전에 필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한다.
③ 미군은 공동작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 기재 및 군수물자를 한국 광복군에게 공급한다.
④ 미군은 한국 광복군에게 육·해·공 교통통신의 편의를 제공한다.
⑤ 기타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상호 제공한다.
⑥ 합의된 사항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기 상부의 재가를 받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는데 상호 적극 노력한다.
[작전을 위한 준비]
구체적인 합의 사항이 도출되자 미국과 임정은 빠르게 움직이는데 우선적으로 3월 25일을기해 인도 본부의 윔스대위를 중국 본부로 전속시키고 30일날 윔스와 버치 그리고 김구와 이청천은 양측의 합의사항과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재확인한다. 그리하여 중국 본부내에는 임정과의 합작을 위한 부서인 한국 그룹이 신설되고 윔스 대위가 책임자로 임명 되었으며 5월에는 인도 본부에 있던 한인 OSS요원인 정운수와 이순용이 전속되면서 한국그룹의 토대가 잡혀가게 되었다. 한편 광복군은 4월 5일 이범석이 임정과 총사령부를 방문하여 3지대 인원 외에 2지대 인원에도 군사합동훈련을 받게 할 것을 건의하면서 확정되고(특히나 무전훈련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김우전은 광복군 연락장교와 OSS 중국본부로 파견된다. 또 김학규는 2지대와 3지대에서 총 22명의 훈련 적격자를 선발하고 곧 입황의 OSS 훈련소(이 훈련소는 합의가 이루어진 3월 말에 중국 군사위원회에 건의가 올라갔는데 6월경에 서안과 부양에 광복군 OSS 훈련소 설치 허가가 나왔다)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때가 1945년 6월 초였다. 이와 같이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던 것은 1945년 초 다 아시다 싶이 중국군의 9개항 행동준승이 폐기되면서 광복군의 관할권이 임정으로 넘어온 것도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들의 훈련 기간은 3개월로 윔스대위를 포함한 OSS 특전단에 의해서 미군 장비로 훈련 받게 된다. 훈련 내용은 폭파, 침투, 사격, 요인암살, 무전훈련 및 암호 해독법, 독도법, 첩보 수집 및 분석, 민사작전을 위한 삐라 작성 및 민사전 부분(민중선동파업), 유격훈련, 도피및 야간습격등으로 이들의 작전이 전형적인 비정규전이었음을 암시한다. 8월 초에 훈련을 마친 이범석을 지휘관으로 한 22명은 광복군 정진군 혹은 정진대로 편성되고 곧 진입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작전 계획 그러나 전쟁의 끝, 그후]
앞서 말했듯이 이 정진대는 국내에 항일 투쟁을 벌리기 위한 정보수집과 무장 조직 형성의 성격이 강한데 이미 1945년 봄 총사령부는 국내의 한국민을 동원하여 광복군을 확대 조직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시에 배합전 혹은 독자적인 유격전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정진대는 국내를 3개의 지구로 나누어 제 1지구(평안, 황대, 경기도), 제 2지구(충청, 전라도), 제 3지구(함경, 강원, 경상도)로 각각의 지구 대장을 정해 배정하였고 다시 이 지구내에 도별로 반장을 정해 담당하는 형식이었다. 편성도를 쓰자면
총지휘: 이범석
부관:김성근
제1지구장:안춘생
제2지구장:노태준
제3지구장:노복선
본부요원:이재현,민영수,김석동,이윤장.강일성,오건,최철,한경수,김동걸
제1지구 -평안도 반장: 강정선
-황해도 반장: 송면수
-경기도 반장:장준하
제2지구 -충천도 반장:정일명
-전라도 반장:반훈
제3지구 -함경도 반장: 김용주
-강원도 반장: 김준엽
-경상도 반장: (기록없음)
이들은 상륙 후 8월 20일 안(잠입과 행동 기간을 볼 때 작전 시작일은 8월 16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8월 18일이라고 기록된 곳이 있는 것은 8월 18일날 일제가 항복한 후 실제로 정진대가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으로 함경도에서 부터 시작하여 남해에까지 잠입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한마디로 어디 글에서 처럼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서 뚜들겨 부수다 몰살 당하기 때문에 국내 진공작전은 실패작이라고 하는건 좀 모르고 하는 예기다. 특수전인 비정규전은 화려하게 군장메고 적진뛰어들어가서 폭탄 한번 터트리고 은신처에 돌아가서 와인따라서 유휴~!하는 직접 타격 보다 누더기 입고 무기 들가주면서 그쪽 사람들하고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장기적으로 싸우는 것에 더 가깝다. 미디어가 사람 여럿 베려놨다.)
물론 계획은 그랬다. 하지만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계획은 완전 틀어지게 되는데 결국 임정은 8월18일 정진대인 이범석을 포함해 그 일행과 OSS 대원들과 함께 김포(여의도라는 기록도 있는데 확실하진 않다. 다만 여의도나 김포나 비행장이 있으니 둘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로 출발하여 도착하였지만 일본군의 거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야심하게 준비된 국내 진공 작전은 시작도 못해보고 끝을 내게 된다.
그후 10월 광복군 총사령부는 새로운 국가의 국군을 위해서 한교 선무단을 조직하고 10만의 한적사병을 인수하여 10개 지대로 확대 편성을 목표로(여기에는 해군 간부 양성도 포함되어있다.) 기존 3개 지대와 새로이 7개의 잠편 지대를 편성하는 계획을 가지게 되는데 잠편 지대 구성을 보자면
상해 지대:박시창
항주 지대:김관오
한구 지대:권준
남경 지대:안춘생
북경 지대:최용덕
광주 지대:최덕신
국내 지대:오광선
구성 한인들은 다수가 중국 현지내에 있는 한적 사병을 중심으로 간부진을 인솔하여 지대를 편성하려고 하였다. 예전에 논란이 된 광복 후 광복군 입대자도 이러한 사정의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물론 기회주의자들도 많았다.) 또 남경으로 사령부를 이전하고 남경에 간부훈련반을 설치하고 중국 전구의 한적 사병을 전부, 조직, 훈련 시켜 국내 지대로 편성하기 위해 귀국 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1945년 10월~1946년 5월까지의 광복군의 행적이다. 그러나 알다 싶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후일에 복원선언으로 해체되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항일투쟁사 대목은 아무래도 가장 말미를 장식하던 국내 진공작전이 아닌가 싶다. 사실 임정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려 계획했던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1919년에 설립된 의민단이라는 천주교계 무장 독립 단체는 궁극적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고 임정과도 매우 긴밀하게 연락을 유지하면서 청산리 전투등에 참전하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대한 독립군단 자체이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지게 된다. 한마디로 처음은 아니라는 거죠.
들어가기에 앞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국내 진공작전은 대대적인 정규전 형식의 전면전이 아닌 미국의 미육군특전단이나 한국의 특전사와 같이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작전이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후일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미군이 상륙할 것을 대비해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 공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본격적인 침공이 있기 전에 국내 각지에 정보를 수집하고 항일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광복군와 OSS반의 국내 잠입 목적은 시설을 폭파하고 공격하는 직접적인 유격전의 형식보다는 (최소한 일정기간동안)베트남에서 몽족을 반공부대로 만드는 것과 같은 비정규전이었고 정진대(선발대) 인원이 22명이었던 이유도 각 지역에 할당지역을 정하였던 이유도 직접 전투보다는 세력을 구축하려는 의미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미군과의 협력]
1943년경 대내외적인 환경은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었는데 내적으로는 김약산의 광복군에 흡수되었고 외적으로는 서서히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연합국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광복군 사령부의 이청천과 김약산 등은 동년 10월 35차 임시의정원회의에 새로운 군사건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는데 주요 내용은 중, 미, 영, 소등 연합국들과 차관등과 함께 특수군사 교육에 대한 문제도 교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지만 국민당과의 준승등으로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1943년 2월, 임정의 외무부에 있던 안원생이 당시 미주중대사와 주중 미군 사령관들과 긴밀하게 관계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주중 미공군 사령부 정보장교였던 웜스(Clarence B. Weems)와 김구 주석이 임정 청사에서 만나 한미 군사합작에 대한 첫 토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미국과의 군사협력의 시발은 임정이 아닌 미국의 구미위원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이미 1943년 초부터 구미위원회의 추천으로 한인 청년들이 OSS에 들어가 대일 항쟁에 투입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하태씨(전 목원대 총장)가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채용이 거부 되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도 OSS의 한인 채용이 구미위원회의 추천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버마전선등 태평양 전선에 배치되었는데 이유는 당연히 특기상 일본과의 정보전을 위한 목적이었고 후에 광복군과의 합작 작전을 위해 한국 그룹으로도 편성되어 광복군과의 작전에서 다리역활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들은 OSS 소속으로 후에 있을 광복군 정진대와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전적으로 미 OSS소속 한국 그룹이었고 광복군 정진대의 소속은 임시정부 광복군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에 일이지만 해방후에 미군정에 이승만을 적극적 추천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승만쪽 사람이었던 것이다.(어폐가 좋지 않을 수 있지만 1925년 구미위원부는 임정의 철폐 명령을 받고도 이승만의 의해서 존속되었고 이승만이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자 다시 연계 활동을 벌였다.)
다시 광복군으로 돌아와서 임정-미국 간의 1차적인 정보 접촉 활동이 이루어 지는 동안 특수 훈련 계획도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범석이 곤명에 주둔한 제14 미육군 항공대와 접촉하였고 1944년 가을에는 중경의 주중 미군 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중장과 광복군 작전계획과 한미합작에 대한 토의가 오고 갔으며 순차적으로 합의가 도출되면서 서서히 실천 단계로 이행되었다. 그러던 중 12월 제 14항공대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임정 요원과의 면담과 광복군 1, 2지대 본부를 방문하여 시찰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1945년 3월에 김학규가 고명의 제 14 항공단 사령관인 첸놀트와 면담함으로써 한미간의 군사 합작 계획과 그에 따른 세부 계획 그리고 구체적인 실시 방안까지도 합의를 보게 되고 이를 임정과 사령부에 보고하고 공식적으로 제가를 받았다. 물론 중국 군사위원회에도 동의를 얻는다.
<한 ·미 군사합작 합의사항>
① 한 ·미 양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한다.
② 한국 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 기술과 기타 필요한 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 작전에 필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한다.
③ 미군은 공동작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 기재 및 군수물자를 한국 광복군에게 공급한다.
④ 미군은 한국 광복군에게 육·해·공 교통통신의 편의를 제공한다.
⑤ 기타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상호 제공한다.
⑥ 합의된 사항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기 상부의 재가를 받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는데 상호 적극 노력한다.
[작전을 위한 준비]
구체적인 합의 사항이 도출되자 미국과 임정은 빠르게 움직이는데 우선적으로 3월 25일을기해 인도 본부의 윔스대위를 중국 본부로 전속시키고 30일날 윔스와 버치 그리고 김구와 이청천은 양측의 합의사항과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재확인한다. 그리하여 중국 본부내에는 임정과의 합작을 위한 부서인 한국 그룹이 신설되고 윔스 대위가 책임자로 임명 되었으며 5월에는 인도 본부에 있던 한인 OSS요원인 정운수와 이순용이 전속되면서 한국그룹의 토대가 잡혀가게 되었다. 한편 광복군은 4월 5일 이범석이 임정과 총사령부를 방문하여 3지대 인원 외에 2지대 인원에도 군사합동훈련을 받게 할 것을 건의하면서 확정되고(특히나 무전훈련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김우전은 광복군 연락장교와 OSS 중국본부로 파견된다. 또 김학규는 2지대와 3지대에서 총 22명의 훈련 적격자를 선발하고 곧 입황의 OSS 훈련소(이 훈련소는 합의가 이루어진 3월 말에 중국 군사위원회에 건의가 올라갔는데 6월경에 서안과 부양에 광복군 OSS 훈련소 설치 허가가 나왔다)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때가 1945년 6월 초였다. 이와 같이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던 것은 1945년 초 다 아시다 싶이 중국군의 9개항 행동준승이 폐기되면서 광복군의 관할권이 임정으로 넘어온 것도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들의 훈련 기간은 3개월로 윔스대위를 포함한 OSS 특전단에 의해서 미군 장비로 훈련 받게 된다. 훈련 내용은 폭파, 침투, 사격, 요인암살, 무전훈련 및 암호 해독법, 독도법, 첩보 수집 및 분석, 민사작전을 위한 삐라 작성 및 민사전 부분(민중선동파업), 유격훈련, 도피및 야간습격등으로 이들의 작전이 전형적인 비정규전이었음을 암시한다. 8월 초에 훈련을 마친 이범석을 지휘관으로 한 22명은 광복군 정진군 혹은 정진대로 편성되고 곧 진입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작전 계획 그러나 전쟁의 끝, 그후]
앞서 말했듯이 이 정진대는 국내에 항일 투쟁을 벌리기 위한 정보수집과 무장 조직 형성의 성격이 강한데 이미 1945년 봄 총사령부는 국내의 한국민을 동원하여 광복군을 확대 조직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시에 배합전 혹은 독자적인 유격전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정진대는 국내를 3개의 지구로 나누어 제 1지구(평안, 황대, 경기도), 제 2지구(충청, 전라도), 제 3지구(함경, 강원, 경상도)로 각각의 지구 대장을 정해 배정하였고 다시 이 지구내에 도별로 반장을 정해 담당하는 형식이었다. 편성도를 쓰자면
총지휘: 이범석
부관:김성근
제1지구장:안춘생
제2지구장:노태준
제3지구장:노복선
본부요원:이재현,민영수,김석동,이윤장.강일성,오건,최철,한경수,김동걸
제1지구 -평안도 반장: 강정선
-황해도 반장: 송면수
-경기도 반장:장준하
제2지구 -충천도 반장:정일명
-전라도 반장:반훈
제3지구 -함경도 반장: 김용주
-강원도 반장: 김준엽
-경상도 반장: (기록없음)
이들은 상륙 후 8월 20일 안(잠입과 행동 기간을 볼 때 작전 시작일은 8월 16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8월 18일이라고 기록된 곳이 있는 것은 8월 18일날 일제가 항복한 후 실제로 정진대가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으로 함경도에서 부터 시작하여 남해에까지 잠입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한마디로 어디 글에서 처럼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서 뚜들겨 부수다 몰살 당하기 때문에 국내 진공작전은 실패작이라고 하는건 좀 모르고 하는 예기다. 특수전인 비정규전은 화려하게 군장메고 적진뛰어들어가서 폭탄 한번 터트리고 은신처에 돌아가서 와인따라서 유휴~!하는 직접 타격 보다 누더기 입고 무기 들가주면서 그쪽 사람들하고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장기적으로 싸우는 것에 더 가깝다. 미디어가 사람 여럿 베려놨다.)
물론 계획은 그랬다. 하지만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계획은 완전 틀어지게 되는데 결국 임정은 8월18일 정진대인 이범석을 포함해 그 일행과 OSS 대원들과 함께 김포(여의도라는 기록도 있는데 확실하진 않다. 다만 여의도나 김포나 비행장이 있으니 둘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로 출발하여 도착하였지만 일본군의 거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야심하게 준비된 국내 진공 작전은 시작도 못해보고 끝을 내게 된다.
그후 10월 광복군 총사령부는 새로운 국가의 국군을 위해서 한교 선무단을 조직하고 10만의 한적사병을 인수하여 10개 지대로 확대 편성을 목표로(여기에는 해군 간부 양성도 포함되어있다.) 기존 3개 지대와 새로이 7개의 잠편 지대를 편성하는 계획을 가지게 되는데 잠편 지대 구성을 보자면
상해 지대:박시창
항주 지대:김관오
한구 지대:권준
남경 지대:안춘생
북경 지대:최용덕
광주 지대:최덕신
국내 지대:오광선
구성 한인들은 다수가 중국 현지내에 있는 한적 사병을 중심으로 간부진을 인솔하여 지대를 편성하려고 하였다. 예전에 논란이 된 광복 후 광복군 입대자도 이러한 사정의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물론 기회주의자들도 많았다.) 또 남경으로 사령부를 이전하고 남경에 간부훈련반을 설치하고 중국 전구의 한적 사병을 전부, 조직, 훈련 시켜 국내 지대로 편성하기 위해 귀국 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1945년 10월~1946년 5월까지의 광복군의 행적이다. 그러나 알다 싶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후일에 복원선언으로 해체되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물론 좌익계와 우익계 무장투쟁단체와의 뮝기적거리는 연대,
그리고 소련과 중국의 지랄발광이라는 위험요소는 차치하더라도,
성공했으면 어땠느냐하는 건 가장 큰 떡밥인건 인정ㅇㅇ
그리고 소련과 중국의 지랄발광이라는 위험요소는 차치하더라도,
성공했으면 어땠느냐하는 건 가장 큰 떡밥인건 인정ㅇㅇ
● 일단 여기서 채택하는 루트는 국내진공작전 → 다운폴, 채택할 엔딩 시스템은 (해보신 분은 아실) 폴아웃 뉴베가스식 엔딩인 탓에, 기존 역사와는 좀 달라질 거임. (물론 말'은' 되는 변형역사라는 전제하에서) 사실 공청회를 여는 진짜 목적이 이것때문이기도 하고..'ㅅ')
tag : 한국근현대사, 2차대전사, 군사사, 광복군, 국내진공작전, 1:6_프라모델, 1:72_프라모델, 자료수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