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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수뇌부] 갑자기 포스팅용 짤찾다가 생각이 났네...(...)


[당 수뇌부의 안건] 어차피 어디선가 시작하겠지만, 이번 대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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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이나 핑백으로 투표인증을 릴레이로 해보는게 어떻겠심?




[선관위 2011] 선거일 투표 인증샷 10문 10답

※다른 링크는 http://nec1963.tistory.com/1178 나 http://news.i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5671 참고

선거일의 투표인증샷에 대한 10문10답

1. 선거일에 누구든지 투표인증샷을 트위터 등에 게시 할 수 있나 ?
➢ 투표를 한 사람이 “여기는 ○○투표소입니다.” “투표했습니다” 등의 투표인증샷을 단순하게 게시하는 것은 가능
➢ 다만 특정후보자에게 투표를 권유·유도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경우 처벌됨.
※ 손가락 등으로 특정 후보자의 기호를 연상할 수 있는 표시를 하여 게시하는 것은 그 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권유하는 행위로서 불가

2. 선거일에 어느 후보자에게 투표하라고 권유할 수 있나 ?
➢ 누구든지 선거일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고 특정후보자에게 투표를 권유·유도하는 행위는 선거운동에 해당되므로 불가
※ 선거일의 선거운동은 보통의 사전선거운동보다 그 위법성이 중하기 때문에 사전선거운동보다 무겁게 처벌하고 있음.
※ 공직선거법 제254조 제1항⇨ 선거일에 투표마감시각전까지 선거운동을 한 자는 3년이하의 징역 또는 6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함

3. 투표지 인증샷 할 수 있나 ?
➢ 투표지를 촬영하면 공개여부를 불문하고 처벌됨
※ 기표하지 아니한 투표용지 촬영도 금지됨

4. 투표소안에서 투표인증샷 찍을 수 있는가 ?
➢ 투표소의 질서를 해하는 행위이므로 불가
➢ 투표소 앞에서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도록 투표인증샷을 찍는 것은 가능

5. 선거일에 단순한 투표참여 권유를 할 수 있나 ?
➢ 일반인이 특정후보자에 대한 지지․반대를 권유·유도하는 내용이 아닌 단순한 투표참여 권유 행위 가능
➢ 다만, 투표참여를 권유·유도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권유·유도하려는 것으로 의도되거나 인식될 수 있는 사람이나 정당·단체는 불가
※ 예 : 후보자, 정당·선거운동단체 및 그들의 대표자, 선거캠프에 참여하는 주요인사가 투표참여를 권유·유도하는 경우 등

6. 선거일에 투표인증샷과 함께 “누구를 찍었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릴 수 있나 ?
➢ 그 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권유·유도하는 행위로서 불가

7. 선거일에 특정후보자의 선거벽보가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어“투표 하세요”라는 등의 문구를 포함한 투표인증샷을 게시하면 처벌받나 ?
➢ 특정 후보자의 선거벽보가 현출 되는 경우에는 그 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권유·유도하는 행위로서 불가

8. 선거일에 후보자, 정당대표자, 선거캠프에 참여하는 주요인사 등과 함께 사진을 찍어“투표하세요”라는 등의 문구를 포함한 투표인증샷도 처벌받나 ?
➢ 특정 후보자에게 투표하도록 권유·유도하는 행위로서 불가

9. 투표인증샷을 올리는 사람에게 서적·CD제공, 음식값·상품할인공연무료입장 등의 재산상의 이익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거나 그 약속을 트위터에 올리면 처벌받나?
➢ 정당이나 후보자와 연계하여 하거나, 후보자 거주·출신지역 등 선거구민만을 대상으로 하거나, 특정 연령층이나 특정 집단·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는 불가

10. 선거일에 특히 유의할 사항은?
➢ 선거일 당일에는 일체의 선거운동이 금지되므로 누구든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으므로 이점 특별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람
➢ 투표는 평온한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져야 하므로 투표소 내외에서 투표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모두 금지되므로 자제하시기 바람
➢ 법이 지켜지는 가운데 평온한 분위기에서 유권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투표권 행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를 당부드림






최소한 맛폰이나 핸폰의 카메라는 있을테고, 투표용지만 안찍으면 된다고 하니, 사상검증용(?)으로도 적당할덧ㅇㅇ

어떤 정당이나 세력을 까건 핥던 일단 투표는 해야 깜권리는 획득된다는 걸 감안하면, 해볼만한덧.

[당 역사연구소의 잡담] 근대_유럽(?)의_흔한_자빠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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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국립과학박물관 (National Science Museum)이 소장중인 우체국용 카트마차와...>






<이건 적당히 뺑끼칠(?)좀 한 그..(...)>


[2]








다시한번 잘 생각해봐요.

정말 便들이 굴러댕기고, 해맑은 미소로 말들이 오락가락하고

정겨운 인사를 나누면서 자빠링을 하고

하수도가 터져서(?) ㄸ물이 풍족하게 흐르는 그 시대에 가서 살고 싶어요? (!?!?!?)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하십시오 'ㅅ' (!?!?!?)


※우째, 반(半) 비정규 포스팅의 넘버링으로 해야할것 같지만, 넘어갑시다 'ㅅ') (!?!?!?)
※그나저나, 도로의 便들이 문제일까요? 나중에 나올 매연이 문제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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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想具現化雜談] 당 파행운영모드 종료기념으로, 일찍 자러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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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동안 예뻐해주지 못한 당원들을 예뻐해주러 갈테니

그런줄 아시기 바랍니다.


당은 언제나 똑똑하고 사랑스러워서 매일마다 안아주고 싶은 리츠코 어른이를 예뻐하며, 이는 도덕적+법적 하자가 전혀 없다는 것을 다시한반 공지하는 바입니다. 이유없는 고소고발로 2012년 악의무리 어워드를 수상하려는 흉악무도한 어둠의 세력을 혼내줍시다 'ㅅ'// (!!!!)

※밀린 포스팅과 작업들은 지금으로부터 12~24시간 후에 재개합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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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잡담] 방금, 그 옆집 처자 호송임무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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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새 집을 옮긴 듯 해서 괘않긴 한데....

이걸 보고 드러운 군바리의 추억이 떠올랐음.



아무리 흔해빠진 미국의 콘도라고는 하지만

아스팔트에 피어난 잡초를 보고 공산주의 떠올린다는 누구 말마따나

우째 그때 당시 영내의 BOQ가 생각나는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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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중앙정보부] 야!!!!!

[일상잡담] 자 이제 일도 끝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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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포스팅하면서, 작업이나 마저해야지...'ㅅ')






....일단 레진이랑 실리콘 한번 더 붓고....;ㅅ;

[당 수뇌부] 성적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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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수뇌부] 기말고사 끝!!!!



이겼다!!!!

이번학기 Primary Mission Completed!!!!!!!



크레딧채우기용 떨거지는 좀 망하긴 했지만, 주요과목에선 통과했으니 지장은 업ㅂ음.

그럼, 안심하고 겨울방학때 잉여짓을 하고, 오늘을 위해 아껴둔 야거마이스터나 마셔야지ㅋ

물론, 앞으로 남은 산더미같은 과목은 일단 알바 아님ㅇㅇ)

[당 지하연구소의 잡담] 싸구려 저질 대체역사물 디오라마 01 : 항모 나포계획 작업결과 3/6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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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지하연구소의 잡담] 싸구려 저질 대체역사물 디오라마 01 : 항모 나포계획 작업결과 2/4 - 2/3

※저번에 다듬은 소류(+히류)와 아퀼라는 생략

[1] 그라프 제펠린 복제



보시는 바와 같이, 네 메이저급 추축국 항모 탈취의 백미인

그라프 제펠린을 복제해야 합니다.

솔까말, 쨉스랑 스파게티 물건도 뺏어왔는데, 나치놈들이 업ㅂ으면 말이 안됨ㅇㅇ


실리콘 절약을 위해 반파운드+실리콘조각을 넣어서 형틀을 만드는 중이니, 이와 관련된 건 내일 이시간에...'ㅅ'///


[2] 카가

#IMAGE|e0017807_50cbf07d6c9da.jpg|pds/201212/15/07/|mid|640|480|pds26#]


이부분은 90% 완료입니다.

기존 A&A 의 그 막힌 지지대를 모두 밀었습니다.



왜 90냐하면, 전방갑판의 일부가 덜 밀어졌거든요. 미국의 주택이 한국에 비하면 어두컴컴한지라, 내일 아침에 마저 이어서 해야겠습니다 'ㅅ')

[3] 아카기


이부분이 현재 난코스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전방갑판의 지지대는 100% 밀어버릴 수 있는데,

후방의 지지대 중 안쪽에 있는 부분은 일부가 막혀서 노가다질을 해야하거든요 'ㅅ';;;;;




지금 가지고 있는 줄을 동원해서, 가능한 한 이쁘게 밀어버리기 위해 고심중이고, 그 결과 하나를 밀긴 했습니다만, 나머지는 어두컴컴한 관계로 내일 이시간에 밀면 되겠지요 뭘 'ㅅ')


내일 날이 밝으면 전부 다 밀어버리고, 에폭시를 발라서 빵꾸때우기와 홀수선채우기를 완료한 후, 도색준비에 들어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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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역사연구소의 공청회] 밀덕 역덕 환영 - 쨉스 항모를 구체적으로 함 고쳐봅시다 2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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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역사연구소의 공청회] 밀덕 역덕 환영 - 쨉스 항모를 구체적으로 함 고쳐봅시다 2 (50% - 수정)

※본 포스팅은, 비록 망상구현화잡담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블로그 설정 중 역사포스팅에 필요한 연출과 관련된 내용 자문, 그리고 일종의 대체역사물(?)과 관련된 프라모델 작업에 관한 포스팅이므로, 최대한 사실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저번 공청회 덕택에 설정의 50%인 함 노획 후 마개조 공통부분의 거의 대부분에 대한 설정이 끝났습니다....만, 한가지가 남아있더라고요.

저번 포스팅에 티거님이 이런 댓글을 다셨던데....

어...일단 지금은 1:2400이니, CIWS의 구체적인 구현은 나중에 1:700을 건드리게 되면 그때가서 보기로 한다 치더라도...'ㅅ';;;>


확실히 CIWS는 (비록 1:700을 써야 제대로 구현이 가능하긴 하지만) 추축국 항공전력인 제로센이나 메서슈미트들의 공격을 분쇄하는데 효과적이고, 레이더(와 뇌격기 UAV)정도만 있어도, 적함 회피 및 잠수함 요격까지는 잘되겠다 싶긴 한데, 이미 저쪽에서 쏜 어뢰가 문제긴 문제겠더라고요.

그래서 해당 답글의 '어뢰 디코이'로 검색해서 찾아봤는데, 간략한 메커니즘에 관해선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본인이 이해한 게 맞다면) 보아하니, 디코이를 쏴서

① 어뢰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해서 충돌처리시키거나
② 방해전파를 쏴서 어뢰를 뱅뱅돌리기한 후 탈진(!!!)시키기


와 같은 방법인 것 같은데, 위 사진은 보니까 잠수함 VS 잠수함이라 어찌될지는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더 뒤져보니까, 예제로 쓸만한 수상함용 자폭 디코이 사진이 있던데...



이게 도저히 뭔 물건인지 판독이 안가더랍니다.

게다가, 당시 기술상, 어뢰의 자동탐색능력이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런고로, SF규칙을 동원한 물건이든, 실존하는 물건이든

적당한 모델과 회피원리에 대한 공청회를 받습니다.


● 공청회 개요 : WW2형 노획 및 마개조 완료 수상함용 대잠 및 어뢰 디코이 관련장비 공청회.
● 조건 : 작동원리 및 설정에 관해서, 실존장비이든, SF 규칙을 적용한 장비도 허가함.
단, (실루엣상의) 위장은 필요

● 참고 : 저번 설정의 '지휘통제실 현대화''소나 시스템 설치''함교 강화'와 연동될 가능성 있음

※여러 자료를 뒤져보니, 수상함의 기동력만 받쳐주면 생존력은 증가한다고는 하지만, 이 덩치큰 것들이 그럴것 같지는 않고....'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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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想具現化雜談] 내는 그거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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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내일 작업완료될 그라프 제펠린 노획형을 뽑고나서 붙여야할 데칼을 만들어야 하고, 그 이전에 함명을 정해야하는데, 예전 토나이투님의 응모 중




이런 게 있었지요.

뭐, 토나이투님의 Dies Irae은 오함마라곤 하지만......





내는 영웅왈도전 5의 그 OST가 생각이 먼저 나더라고요 'ㅅ';;;;




<한스 멤링 (Hans Memling : 1430 ~ 1494)의 최후의 심판(Das Jüngste Gericht [獨] : 1467 ~ 1471)의 부분?>

근데, 원래는 이게 나와야 정상 아닌감요 'ㅅ';;;;???? (!?!?!?)

확실히 그당시 역사의 전개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의미가 있으므로 괜찮긴 한데, 부대마크 - 정확히는 함선마크를 어떻게 짜느냐는 또다른 문제...;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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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역사연구소의 문서고] 광복군 국내진공작전 관련자료 (또 펌글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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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프라모델 관련작업과 관련있으므로, 밸리에는 올리지 않습니다.
● '문서고' 접미어이므로, 펌글이 주입니다. 각 글의 출처는 각 제목을 클릭하면 연결됩니다.



[1]

[독립기념관] 국내진공작전과 봉오동전투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국내언론의 보도경향
봉오동전투의 전개

1.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1. 독립군단의 전력정비


3·1운동 이후 건립된 항일 독립군단들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면서 전투역량의 강화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독립군은 대체로 연해주에 출병했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암암리에 매각했던 무기를 구입했다. 비용은 주로 이곳 한인사회와 국내에서 군자금으로 헌납된 자금이었다.

독립군의 무기는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일반 군총으로는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미제나 독일제 혹은 일본제 30식 또는 38식 총이 섞여 있었다. 註1) 권총류는 루거식 권총이 가장 흔했으며, 그밖에 7연발식과 남부식南部式 등이 있었다. 중무기는 기관총 및 수류탄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기의 가격은 일정치 않았는데 소총 1정당 탄환 100발을 포함하여 100원 내외였다.

독립군단의 결성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독립군단들은 자체의 무장력을 강화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20년 5월 무렵까지 대한국민회에서는 17만 원을 비롯하여 대한군정서 13만 원, 대한군무독군부 13만 원, 대한신민단 3만 원, 대한광복단 4만 원 등 총 50만 원의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 자금은 대부분 독립전쟁에 사용될 무기구입과 군수품 등에 충당되었다.

무기의 구입과 운반은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위험한 작업이었다. 때문에 대개의 경우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건장한 독립군이 투입되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무기운반대는 보통 1명이 2~3정의 무기와 탄약을 분담하고 대열을 형성하여 이동하였다. 운반 도중 중국관헌의 눈을 피해 먼 길을 우회는 다반사였다. 상황에 따라 중국관헌을 매수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기적으로 공급과 조달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측에게는 중·소 국경지대를 충돌없이 통과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註2)


독립군단은 부대원들에 대한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를 통해서 보면, 독립군은 매일 5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집총훈련을 실시하였고, 흙과 모래 6관이 든 무거운 배낭을 메고 군총으로 무장한 채 야산을 오르내리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매일 밤낮으로 2회의 정신교육을 받는 등 강도 높은 훈련이 있었다. 註3)


2. 국내진공작전의 전개

만주와 연해주지역을 중심으로 각 독립군단이 결성되고 전체적으로 독립군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어 갔다. 항일독립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상해임시정부도 독립전쟁 의지를 천명하는 등 조국광복을 위한 다방면에 걸친 민족역량 결집에 나섰다. 우선 임시정부에서는 군사상 경험이 있는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군사회의를 개최하여 군사계획을 수립할 것과 중국 및 러시아 지역에서 10만 명 이상의 의용지원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하여 독립운동진영의 항일의지를 고양하였다. 註4) 뿐만 아니라 1920년 1월 8일자 『독립신문』에서는 ‘우리의 당면 대문제는 우리의 독립운동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라는 방계를 고쳐 전쟁하려 함이요’·‘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독립에 반대하는 자’라는 취지의 안창호의 연설을 게재하여 재차 독립전쟁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註5)

1920년대 초부터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국경지역의 경찰병력을 대폭 강화하였다. 보통은 1개 군에 1개의 경찰서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국경 3도에는 함경북도 11개 군에 경찰서 19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30개, 출장소 42개소를 두었다. 함경남도에는 16개 군에 경찰서 20개, 파출소 6개, 주재소 180개, 출장소 12개를 설치하였다. 평안북도 19개 군에는 경찰서 24개, 파출소 5개, 주재소 195개, 출장소 84개를 설치했다. 특히 압록강 연안에는 10리마다 주재소 또는 파출소를 하나씩 설치하여 4~10인의 경비경찰관을 배치하였다. 당시 경비경찰관의 수는 1925년 현재 5,882명이었다.

시설면에서 보면 주재소 주변에는 반드시 참호와 철조망을 설치하였다. 1923년부터는 2척尺 높이의 석벽을 설치하는 등 자체 방어시설을 강화시켰다. 이밖에 압록강 강안江岸에는 기관총을 탑재한 발동선 3척을 배치하였으며, 두만강 강안에는 경비선 1척을 배치할 정도로 독립군 경계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강안 곳곳에는 참호를 설치하는 등 강을 따라 월경하는 독립군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註6) 뿐만 아니라 일제는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경비전화 가설을 크게 늘려 독립군 기습에 신속하게 대응하도록 하였다. 경찰관들에게는 38식 또는 44식의 최신식 총기류를 지급하는 등 공포분위기 조성을 통한 국내와 독립군 사이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강화에도 일제경찰은 수시로 반복되는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으로 ‘촌각도 안심할 수 없었으며, 불시에 대비하기 위해 총기를 목침으로 가면假眠’할 수밖에 없었다. 註7)





<독립군이 전투할 당시 사용하였던 진군기와 나팔>


대체로 1920년대 전반기의 경우 독립군의 국내진격활동은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독립군은 이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이를 정리하면 〈표 7〉과 같다.



〈표 7〉에서 보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이 있었던 1920년 경우에만 연인원 4,643명의 독립군이 1,651회에 달하는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경찰서와 관공서 37곳을 공격했다.


[註 1] 강덕상·미촌수수, 『現代史資料』 27, 375~376쪽. ☞
[註 2]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115~117쪽. ☞
[註 3] 강덕상·미촌수수, 『현대사자료』 27, 347쪽. ☞
[註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3, 282쪽. ☞
[註 5] 『독립신문』 1920년 1월 8일 「우리 국민이 단절코 실행할 6대사」. ☞
[註 6] 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警察之槪要』, 1925, 123~124쪽. 이 표는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4, 62쪽의 표를 재인용하였다. 이 자료는 일제측에 작성한 자료임으로 독립군의 실제 활동은 이 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註 7] 조선총독부 경무국, 『朝鮮警察之槪要』, 118~122쪽. ☞





[2] ※해당 블로그의 글이 공식기관 혹은 학술자료의 펌글인지, 독자연구인지는 판독불능

[千日養錢, 一日用錢] 광복군 작전사-버마전선의 광복군 (작성자 바스통)



광복군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버마와 임팔전선에서 파견되어 영국과 함께 대일 결전을 치뤘다는 예기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몇년 전부터는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그래봐야 꼴랑 2줄 이하) 광복군의 뚜렷한 대일 군사행동이었던 만큼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는 일인데 문제는 그에 대해 정리된 자료는 적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광복군의 임팔전선 파견지대에대해 배경과 전과등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임팔 파병의 배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9일 제 20차 국무회의에서 미국의 태평양 전쟁 발발을 기점으로 일본에 대일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나라 없는 임시정부가 어떻게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하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러니 저러니해도 대일 선전(宣戰)과 앞으로 알아 볼 임팔전선 파견 두가지는 확실한 임정의 대일 군사활동이었다는 걸 먼저 못 박아 두고 싶다.

아무튼 당시의 임팔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는데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개시된 일본의 동남아에서의 공세적인 행동은 잘 아시다 싶이 연합국에 불리하게 작용하여서 이미 버마가 축출되고 영국군은 인도로 쫒겨났으나 유럽전선이 훨씬 우선순위에 있음으로 인도따위는 우선순위에서 크게 밀려 있어 지원따윈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영국과 미국등 연합국은 전선 유지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는데 여기에서 또 동상이몽을 하게 된다. 미국은 당시 중국 국민당과 중국군을 지원하는데 적극적이었는데 특히나 1943년에 개시된 중국군에 대한 훈련과 미중 연합군 3만5천명의 북부 버마 탈환을 위한 미치나 공격이 미국의 생각을 대변하는 일이라고 하겠다. 반대로 영국은 중국이 연합국에 절대 발을 빼지 않을 것이고 그것 이외에는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특히나 중국이 미국과 손잡고 주도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경우 전후 발언권이 커져 과거 동남아 식민지의 유지가 어려워 질 것이라고 계산했다. 때문에 중국군과의 합동작전에서도 미온적이었으며 당연히 지원에 대해서도 미온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중국의 발언권 확대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없지는 않았다.

반면에 임정의 경우 군사적으로는 광복군을 키우면서도 외교적으로 합법 임시 정부로써 각국으로 부터 인정받는 것과 더불어 국민당 정부로 부터 자금과 지원을 벗어나 타 연합국으로 부터 자금 군사물자 유입 경로를 다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고 있었다.(결국 이 노력은 1944년에 가야 물꼬를 트지만 궁극적으로는 광복이 될때까지 실현시키지 못했고 광복군과 임정을 얶메는 족쇄가 되었다.) 이런 양측의 이해관계 속에서 인도 주둔 영국군 사령부는 임정에 광복군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한영 군사상호 협정서과 이후의 과정

당시의 협정을 보다면 정확하게는 영국군과 협상을 맺은 주체는 대한민국 임정이 아니었고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때문에 광복군의 파인 협정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주인(駐印)이 재인 영국군 주인과 같이 찍혀있다. 영국측 협상 대표는 콜린 맥킨지(인명사전 뒤지면 나오는 영국군 그 맥킨지)였고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는 김약산(김원봉)이었다.

협정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조선 민족혁명당은 영국군과 합작하고 대일 전투를 역행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혁명당 연락대를 주인도 영국군에 파견한다.

2. 전항 파견된 연락대는 대장을 포함하여 10명 내지 25명으로 정하고 영군과 동일한 군복을 착용하여 조선 민족혁명당 배지를 구별하여 사용한다.

3. 연락대의 주요 임무는 영군의 대일 작전에 응하여 대적선전 및 노획한 적군 문서의 번역을 포함한다.

4. 연락대의 복무 기한은 제 1차로 6개월로 정하고 연속 복무는 쌍방 합의로 연장한다.

5. 전항의 임무 수행에 있어서 조선 민족혁명당의 필요에 의하거나 혹은 영국군의 요구가 있을시는 일부 혹은 전부 인원을 원대 복귀한다.

6. 연락대의 대장은 주인도 영국군 대위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대원 중 특별한 공을 세운 자는 심사 표창하여 특별한 대우를 한다.

7. 조선 민족혁명당의 유효하고 강력한 공작과 영국군과의 긴밀한 합동작전을 위하여 인도에 상주 대표를 파견할 수 있다.

8. 조선 연락대는 영국군이 나포한 한국인 포로를 필요에 따라 훈련한다.

9. 연락대와 상주 대표의 파견 이전 및 소환(召還)에 관한 일체경비는 영국군이 부담한다.

10. 연락대의 이동 및 장비는 영국군 장교와 동등하게 한다.

11.뉴델리에서 공작하는 대원에게는 무료로 숙소를 제공한다. 단, 「호텔」에 거주가 가능하여 제공된다면 월 숙식비로 100루비 이내를 월급에서 공제한다.

12. 조선 민족혁명당 대표와 그 수행 장교는 뉴델리에 상주하며 일체경비는 영국군이 제공한다.


 요약하자면 영국군내에서의 광복군 파견대의 지위와 인원 그리고 임무등을 명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영어와 일어에 능숙한 간부들을 각 지대에서 선발하여 대장 한지성을 필두로 부대장 문응국, 최봉진·김상준·나동국·박영진·송철·김성호·이동수등으로 구성된 한국 광복군 인면전구 공작대가 편성되고 1943년 8월에 캘카타로 파견되어 GISK(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사령부) 201부대에 배속되게 된다. 파견 인원수와 관련해서는 9명에서 20명까지 기록에서의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조선민족혁명당이 1944년 12월 8일 국무회의에서 인도 공작대에 관한 일체관계를 임시정부로 이관시켰고 그에 따라 영국군과의 재차 협정 체결과 증파의 필요성에 따라서 5명 내외의 인원이 추가 증파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버마전선의 광복군의 파견인원은 14명에서 15명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임팔지구에 뿌려진 삐라중 하나>



[작전과 전과]

제201부대에 배속된 공작대의 임무는 선전공작, 적정수집, 대적 방송 및 선전삐라 살포 등을 전개하였으며 버마 서북방 지역, 임팔, 만테레이, 모뇌로 각각의 조를 이루어 분산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선전 작전으로 기무라 소위등 27명이 영국군측에 항복하기도 했는데 포로들이 광복군이 버마전선에 참전하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에게 적지않은 심리적 타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응국, 최봉진, 나동규,김상준 대원등은 1944년1월 영국군 1개 사단 병력(개인적으론 인도 주둔 영국군17사단이 아닌가 싶다.)이 임팔 방면에서 일본군(개인적으로는 15군 사령부 예하에 31사 15사 33사가 아닌가 싶다.)에게 포위 당할뻔 하였으나 지속적인 적진 탐색과 적 문서등을 통해 이를 모면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는 버마 전선에 파견된 광복군 공작대에게 가장 큰 전공으로 기록된다.

별도로 각 전지에 있던 공작대는 협정 내용에도 있듯 당시 버마전선으로 파견되어 있던 한국 국적의 일본군 포로들을 별도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수는 100명정도 였는데 가장 고위 계급은 15사단 군속 고등관(일제시대때의 관리 등급 칙임관과 주임관을 묶어서 부르는 명칭)이었던 김귀락을 포함하여 100명 내외였다고 하며 이들을 이후에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100명이라면 1945년 당시에 700명 내외의 광복군에게 매우 큰 전력이었을 것이다.)

위의 3개가 당시 버마전선의 전공으로써 상당 부분은 오래전에 대한광복군인회의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고 추가적인 전공과 관련된 수훈 심지어는 각 조가 배치 된 부대까지도 정확하게 나와있는 관련 자료가 매우 부실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버마전선의 광복군은 1945년 9월 임무를 종료하고 전원 원대 복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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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養錢, 一日用錢] 광복군 작전사-초모 공작 (작성자 바스통)

광복군은 두가지의 고질적인 문제에 시달렸는데 하나는 제정적인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지원 인원의 부족이었다. 창설 당시에 12명의 장교로 시작한 광복군이지만 사실 광복군 총사령부는 2년내에 3개 사단 규모로 광복군을 확장 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인원 부족으로 결국 광복군 1,2,3,5 지대 밖에 편성 할 수 없었고 그나마도 인원 부족으로 재편성을 해야할 정도로 광복군의 인원 부족은 심각한 상태였다. 사실상 인적자원 대부분이 윤함구(국민당 정부는 45년까지 중국 지역을 윤함구, 대후방, 해방구로 구분했는데 윤함구는 일본군 점령지역, 대후방은 국민당 점령지역 해방구는 공산당 점령지역을 뜻한다.)에 들어가 있었고 한인 교포 대다수가 거주하는 화북지방은 중국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의 활동지역으로 광복군이 활동하기 위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광복군은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초모 공작 즉 적지에서 인원을 끌어들이는 공작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공작대의 조직과 활동]

사실 이런 인적 자원의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초모 공작은 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기 이전인 1939년 9월 부터 임시정부의 승인 아래 이루어졌다. 이들은 서안 방면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간편하게 서안 공작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적을 5지대의 서안 공작과는 큰 상관은 없다. 아무튼 이들은 조성환을 주임으로 군사특파원 6명을 임명하고 그 다음달부터 서안 방면으로 진출하여 초모공작을 벌였고 총사령부가 창설 된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였고 최종적으로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하면서 그 다음해 1월에 임정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인력과 물적 자원 미비로 그 성과는 매우 작았다.

한편 광복군 총사령부는 초모 공작의 임무를 첫째는 사병의 모집 둘째는 선전과 정보 수집 셋째는 적정정찰 마지막으로 필요시에 유격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이는 서안이라는 지역이 공작과 작전의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병력확보에도 유리한 지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광복군 사령부는 각지대에 초모 공작대를 설치하고 각 지대장을 징모분처로 임명하여 병력 확보를 크게 독려한다. 다음은 각지대의 공작대와 활동 지역이다.

제1지대/ 노태준등 7명/ 산서성과 하남성 일대에서 활동

제2지대/나태섭등 4명/장가구, 하북성 일대에서 활동

제3지대/이복원등4명/안휘성, 강소, 산동성 일대에서 활동

제5지대/이하우등7명/북만주 일대에서 활동

제6지대/이지일등수명/강서, 남경 그리고 안경 일대에서 활동

이들은 각기 활동구역에서 사병 모집, 선전공작 및 적정 수집 그리고 수차례의 반정 공작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공작의 성과와 그 후]

이들의 이러한 활동에도 뚜렷한 성과는 제 5지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임정 자체의 공작비용이 부족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임정은 중국의 원조금과 동포들의 군자금이나 매달 1500원의 애국 성금으로는 상당히 빠듯한 살림을 살고 있었다. 특히나 미국 지역의 두 한인 단체인 안창호(이미 오래전에 순국하였지만)계열의 연합회와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신나게 싸우던 시기라 임정의 재정난이 가중되는 시점이어서 충분하게 공작금을 지원할 수가 없었다,(쩝....) 또디른 이유는 중국군의 협조가 극히 미미했기 때문인데 다 아는 사실이지만 장제스와 국민당군은 광복 전까지 광복군에게 꼬장을 많이 피웠는데 이 부분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래도 이러한 초모 공작으로 총사령부 창설 1년만에 광복군의 전력은 창설때보다 10배인 300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대로 1~5지대(6지대는 제대로 편제도....)는 이후에 1지대와 2지대로 재편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김학규가 1942년에 3지대를 창설하고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2지대를 보충함에도 불구하고 1지대와 2지대의 정원은 277명이 미달되었고 3지대도 당시에 70명 내외의 유명무실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태평양 전쟁 개전과 함께 1942년 2월에 김학규를 단장으로 7명의 공작언을 안휘성으로 파견하여 징집과 선전 공작을 벌였지만 이미 대일 항전과 태평양전쟁이 전개되던 시점에서도 보다 싶이 규모면에서 광복군의 애초에 목표였던 정규전을 통한 대일 항전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같은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1943년 10월에 이청천, 김약산, 이복원등 3인은 '군사 정책에 관한 제안'이라는 제목의 제안서를 의정군에 제출하는데 전체 내용을 쓰기는 그렇기 때문에 주요 내용만 간추리자면 광복군의 병력 표준을 30만으로 정하고 이를 위해서 중국으로 부터의 탈피와 군자금 다원화를 추진하고 해외 한인 무장단체 즉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연안파 조선의용군이나 간도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계열의 소규모 무장 단체들과의 연계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중국으로의 부터의 자금 독립과 다변화는 꾸준히 진행되지만 한인 무장단체와의 연계는 사실 이상에 가까운 내용이었는데 이미 이들은 중국 공산당과 소련으로 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전후 한국의 정치 판도를 형성할 실력있는 세력으로 볼 수 있었던 만큼 비록 임정과 광복군의 한인에 대한 대표성에 대한 자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었으나 현실적으로 3대 세력의 통합이나 연계는 이상에 가까운 제안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악조건적 상황속에서도 김학규의 3지대의 경우 1944년 말에 50명의 한인을 모병하므로써 1945년 3월에 정식적으로 3지대로 승격되어는 등 전력은 꾸준히 보충되었다. 결과적으로 1945년 5월의 광복군의 전력은 1지대와 2지대 그리고 3지대를 주축으로 인도 캘카타에 있던 버마 공작대와 성도 훈련반을 포함하여 574명의 전력을 확보하였다. 초모 공작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본군으로 부터 광복군을 모으기 위한 활동이면서 동시에 중국군으로 부터 광복군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이기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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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養錢, 一日用錢] 광복군 작전사-국내진공작전 (작성자 바스통)




많은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항일투쟁사 대목은 아무래도 가장 말미를 장식하던 국내 진공작전이 아닌가 싶다. 사실 임정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려 계획했던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1919년에 설립된 의민단이라는 천주교계 무장 독립 단체는 궁극적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고 임정과도 매우 긴밀하게 연락을 유지하면서 청산리 전투등에 참전하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대한 독립군단 자체이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지게 된다. 한마디로 처음은 아니라는 거죠.

들어가기에 앞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국내 진공작전은 대대적인 정규전 형식의 전면전이 아닌 미국의 미육군특전단이나 한국의 특전사와 같이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작전이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후일 본격적으로 한반도로 미군이 상륙할 것을 대비해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 공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좀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본격적인 침공이 있기 전에 국내 각지에 정보를 수집하고 항일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광복군와 OSS반의 국내 잠입 목적은 시설을 폭파하고 공격하는 직접적인 유격전의 형식보다는 (최소한 일정기간동안)베트남에서 몽족을 반공부대로 만드는 것과 같은 비정규전이었고 정진대(선발대) 인원이 22명이었던 이유도 각 지역에 할당지역을 정하였던 이유도 직접 전투보다는 세력을 구축하려는 의미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미군과의 협력]

1943년경 대내외적인 환경은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었는데 내적으로는 김약산의 광복군에 흡수되었고 외적으로는 서서히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연합국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광복군 사령부의 이청천과 김약산 등은 동년 10월 35차 임시의정원회의에 새로운 군사건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는데 주요 내용은 중, 미, 영, 소등 연합국들과 차관등과 함께 특수군사 교육에 대한 문제도 교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지만 국민당과의 준승등으로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1943년 2월, 임정의 외무부에 있던 안원생이 당시 미주중대사와 주중 미군 사령관들과 긴밀하게 관계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주중 미공군 사령부 정보장교였던 웜스(Clarence B. Weems)와 김구 주석이 임정 청사에서 만나 한미 군사합작에 대한 첫 토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미국과의 군사협력의 시발은 임정이 아닌 미국의 구미위원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이미 1943년 초부터 구미위원회의 추천으로 한인 청년들이 OSS에 들어가 대일 항쟁에 투입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하태씨(전 목원대 총장)가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채용이 거부 되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도 OSS의 한인 채용이 구미위원회의 추천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버마전선등 태평양 전선에 배치되었는데 이유는 당연히 특기상 일본과의 정보전을 위한 목적이었고 후에 광복군과의 합작 작전을 위해 한국 그룹으로도 편성되어 광복군과의 작전에서 다리역활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들은 OSS 소속으로 후에 있을 광복군 정진대와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전적으로 미 OSS소속 한국 그룹이었고 광복군 정진대의 소속은 임시정부 광복군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에 일이지만 해방후에 미군정에 이승만을 적극적 추천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이승만쪽 사람이었던 것이다.(어폐가 좋지 않을 수 있지만 1925년 구미위원부는 임정의 철폐 명령을 받고도 이승만의 의해서 존속되었고 이승만이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자 다시 연계 활동을 벌였다.)



다시 광복군으로 돌아와서 임정-미국 간의 1차적인 정보 접촉 활동이 이루어 지는 동안 특수 훈련 계획도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범석이 곤명에 주둔한 제14 미육군 항공대와 접촉하였고 1944년 가을에는 중경의 주중 미군 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중장과 광복군 작전계획과 한미합작에 대한 토의가 오고 갔으며 순차적으로 합의가 도출되면서 서서히 실천 단계로 이행되었다. 그러던 중 12월 제 14항공대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임정 요원과의 면담과 광복군 1, 2지대 본부를 방문하여 시찰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1945년 3월에 김학규가 고명의 제 14 항공단 사령관인 첸놀트와 면담함으로써 한미간의 군사 합작 계획과 그에 따른 세부 계획 그리고 구체적인 실시 방안까지도 합의를 보게 되고 이를 임정과 사령부에 보고하고 공식적으로 제가를 받았다. 물론 중국 군사위원회에도 동의를 얻는다.

<한 ·미 군사합작 합의사항>
① 한 ·미 양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한다.
② 한국 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 기술과 기타 필요한 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 작전에 필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한다.
③ 미군은 공동작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 기재 및 군수물자를 한국 광복군에게 공급한다.
④ 미군은 한국 광복군에게 육·해·공 교통통신의 편의를 제공한다.
⑤ 기타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상호 제공한다.
⑥ 합의된 사항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기 상부의 재가를 받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는데 상호 적극 노력한다.


[작전을 위한 준비]

구체적인 합의 사항이 도출되자 미국과 임정은 빠르게 움직이는데 우선적으로 3월 25일을기해 인도 본부의 윔스대위를 중국 본부로 전속시키고 30일날 윔스와 버치 그리고 김구와 이청천은 양측의 합의사항과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재확인한다. 그리하여 중국 본부내에는 임정과의 합작을 위한 부서인 한국 그룹이 신설되고 윔스 대위가 책임자로 임명 되었으며 5월에는 인도 본부에 있던 한인 OSS요원인 정운수와 이순용이 전속되면서 한국그룹의 토대가 잡혀가게 되었다. 한편 광복군은 4월 5일 이범석이 임정과 총사령부를 방문하여 3지대 인원 외에 2지대 인원에도 군사합동훈련을 받게 할 것을 건의하면서 확정되고(특히나 무전훈련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김우전은 광복군 연락장교와 OSS 중국본부로 파견된다. 또 김학규는 2지대와 3지대에서 총 22명의 훈련 적격자를 선발하고 곧 입황의 OSS 훈련소(이 훈련소는 합의가 이루어진 3월 말에 중국 군사위원회에 건의가 올라갔는데 6월경에 서안과 부양에 광복군 OSS 훈련소 설치 허가가 나왔다)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때가 1945년 6월 초였다. 이와 같이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던 것은 1945년 초 다 아시다 싶이 중국군의 9개항 행동준승이 폐기되면서 광복군의 관할권이 임정으로 넘어온 것도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들의 훈련 기간은 3개월로 윔스대위를 포함한 OSS 특전단에 의해서 미군 장비로 훈련 받게 된다. 훈련 내용은 폭파, 침투, 사격, 요인암살, 무전훈련 및 암호 해독법, 독도법, 첩보 수집 및 분석, 민사작전을 위한 삐라 작성 및 민사전 부분(민중선동파업), 유격훈련, 도피및 야간습격등으로 이들의 작전이 전형적인 비정규전이었음을 암시한다. 8월 초에 훈련을 마친 이범석을 지휘관으로 한 22명은 광복군 정진군 혹은 정진대로 편성되고 곧 진입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작전 계획 그러나 전쟁의 끝, 그후]

앞서 말했듯이 이 정진대는 국내에 항일 투쟁을 벌리기 위한 정보수집과 무장 조직 형성의 성격이 강한데 이미 1945년 봄 총사령부는 국내의 한국민을 동원하여 광복군을 확대 조직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시에 배합전 혹은 독자적인 유격전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정진대는 국내를 3개의 지구로 나누어 제 1지구(평안, 황대, 경기도), 제 2지구(충청, 전라도), 제 3지구(함경, 강원, 경상도)로 각각의 지구 대장을 정해 배정하였고 다시 이 지구내에 도별로 반장을 정해 담당하는 형식이었다. 편성도를 쓰자면

총지휘: 이범석

부관:김성근

제1지구장:안춘생

제2지구장:노태준

제3지구장:노복선

본부요원:이재현,민영수,김석동,이윤장.강일성,오건,최철,한경수,김동걸

제1지구 -평안도 반장: 강정선
-황해도 반장: 송면수
-경기도 반장:장준하
제2지구 -충천도 반장:정일명
-전라도 반장:반훈
제3지구 -함경도 반장: 김용주
-강원도 반장: 김준엽
-경상도 반장: (기록없음)

이들은 상륙 후 8월 20일 안(잠입과 행동 기간을 볼 때 작전 시작일은 8월 16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8월 18일이라고 기록된 곳이 있는 것은 8월 18일날 일제가 항복한 후 실제로 정진대가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으로 함경도에서 부터 시작하여 남해에까지 잠입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한마디로 어디 글에서 처럼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서 뚜들겨 부수다 몰살 당하기 때문에 국내 진공작전은 실패작이라고 하는건 좀 모르고 하는 예기다. 특수전인 비정규전은 화려하게 군장메고 적진뛰어들어가서 폭탄 한번 터트리고 은신처에 돌아가서 와인따라서 유휴~!하는 직접 타격 보다 누더기 입고 무기 들가주면서 그쪽 사람들하고 같이 먹고 자고 하면서 장기적으로 싸우는 것에 더 가깝다. 미디어가 사람 여럿 베려놨다.)

물론 계획은 그랬다. 하지만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계획은 완전 틀어지게 되는데 결국 임정은 8월18일 정진대인 이범석을 포함해 그 일행과 OSS 대원들과 함께 김포(여의도라는 기록도 있는데 확실하진 않다. 다만 여의도나 김포나 비행장이 있으니 둘중 하나인 것은 확실하다.)로 출발하여 도착하였지만 일본군의 거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야심하게 준비된 국내 진공 작전은 시작도 못해보고 끝을 내게 된다.

그후 10월 광복군 총사령부는 새로운 국가의 국군을 위해서 한교 선무단을 조직하고 10만의 한적사병을 인수하여 10개 지대로 확대 편성을 목표로(여기에는 해군 간부 양성도 포함되어있다.) 기존 3개 지대와 새로이 7개의 잠편 지대를 편성하는 계획을 가지게 되는데 잠편 지대 구성을 보자면

상해 지대:박시창
항주 지대:김관오
한구 지대:권준
남경 지대:안춘생
북경 지대:최용덕
광주 지대:최덕신
국내 지대:오광선

구성 한인들은 다수가 중국 현지내에 있는 한적 사병을 중심으로 간부진을 인솔하여 지대를 편성하려고 하였다. 예전에 논란이 된 광복 후 광복군 입대자도 이러한 사정의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물론 기회주의자들도 많았다.) 또 남경으로 사령부를 이전하고 남경에 간부훈련반을 설치하고 중국 전구의 한적 사병을 전부, 조직, 훈련 시켜 국내 지대로 편성하기 위해 귀국 시키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1945년 10월~1946년 5월까지의 광복군의 행적이다. 그러나 알다 싶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후일에 복원선언으로 해체되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된다.





물론 좌익계와 우익계 무장투쟁단체와의 뮝기적거리는 연대,

그리고 소련과 중국의 지랄발광이라는 위험요소는 차치하더라도,

성공했으면 어땠느냐하는 건 가장 큰 떡밥인건 인정ㅇㅇ


안타깝게도 OSS와의 연계와 목적 등이 전면전이 아니라는 문제는 남지만...(...)






























● 일단 여기서 채택하는 루트는 국내진공작전 → 다운폴, 채택할 엔딩 시스템은 (해보신 분은 아실) 폴아웃 뉴베가스식 엔딩인 탓에, 기존 역사와는 좀 달라질 거임. (물론 말'은' 되는 변형역사라는 전제하에서) 사실 공청회를 여는 진짜 목적이 이것때문이기도 하고..'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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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想具現化雜談]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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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작업 및 밀린 포스팅들은

유키호 어린이와 놀아준 후에 계속됩니다 'ㅅ'////



세간에는 당이 유키호 어린이를 심신미약으로 몰아가며 쪼물딱거린다는 근거없는 낭설에 허위사실을 유포하는데, 당은 절대로 유키호 어린이를 울리고 괴롭힌 적 없습니다. 저 어린 게 쥐어박을 데가 어딨다고 쥐어박습니까 'ㅅ'?

※유키호 어린이 본인의 말에 의하면,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게 남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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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재정부] 이번 작업 폐기물을 매입하시겠다는 분이 있으시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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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일정시간 경과후 혹은 특정조건이 만족되면 자동폭파됩니다.



요청에 따라 사진을 올려봤습니다.


일단 본인이 탈포기가 현재 가동불능이라 강짜로 부어서 했던 탓에, (철사로 움푹 들어간 함교나 항공갑판 등을 쑤시는 걸 깨닫기 전 단계의 물건이라) 상태가 좀 천차만별입니다.

일단, 본 폐기물은 다음과 같은 등급으로 분류되었으며

공통적으로 에폭시 혹은 폴리퍼티나 그린스터프 등의 보충재

그리고 줄이나 전동연삭도구같은 연삭/절삭가능한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도색전 세척은 필수입니다.





[A급 폐기물(?)]


● 실패작 중 그나마 잘 나온 물건을 기준으로
● 약간(?)의 에폭시/폴리퍼티와 시타델 그린스터프 등의 재료의 땜빵질과
● (포탑이나 함교 미성형 부분은) 스컬피나 퍼티 조각으로 때울 수 있고
● 줄질노가다 혹은 전동공구를 통하여
● 그럭저럭(?) 만들 수 있는 수준



[B급 폐기물(?)]


● 실패작 중 거센소리 및 된소리는 약간 나올지라도
● 에폭시/폴리퍼티와 시타델 그린스터프 등의 재료의 땜빵질이 좀 필요하며,
● (포탑이나 함교미성형 부분은) 스컬피나 퍼티 조각으로 때울 수 있고
● 줄질노가다 혹은 전동공구를 통하여
● 어찌어찌(!?) 만들 수 있는 수준


[F급 폐기물(...)]


● 실패작 중 묻지마 퀄리티로
● 에폭시/폴리퍼티와 시타델 그린스터프 등의 재료의 땜빵질이 좀 많이 필요하며,
● (포탑이나 함교 미성형 부분은) 스컬피나 퍼티 조각으로 때울 수 있고
● 줄질노가다 혹은 전동공구를 통하여
● 잘하면(!?!?!?) 만들 수 있는 수준 (...)



이상입니다.

일단 본인이 책정하는 가격은 배송비 10$ + 가격 10$ 해서 20$만 받겠습니다 ;ㅅ;



본인은 되도록 빨리 처분해야하니, 협상 가능합니다 'ㅅ')

[당 지하연구소의 잡담] 싸구려 저질 대체역사물 디오라마 01 : 항모 나포계획 작업결과 3/6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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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지하연구소의 잡담] 싸구려 저질 대체역사물 디오라마 01 : 항모 나포계획 작업결과 3/6 - 3/4

그럼 어제에 이어서, 오늘, (밑작업에 한해서)

대망의 피날레(!?)를 장식해 봅시다 'ㅅ')




[1] 그라프 제펠린 복제 끝



하룻사이에 틀이 잘 말랐더라고요.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당 실리콘 제품군이 잠수함패치가 된지라 6시간정도밖에 안걸렸는데, 안정화를 위해 12시간정도 냅뒀습니다 'ㅅ')


암튼, 일단 이걸로 넷 복사 완료.


나머지 1대 잉여분량은, 설정상 주요 연합파병세력인 YPRF사령부의 수장인 사령관의 생일선물이라,...'ㅅ')





[2] 완성



그리고, 어제의 노가다를 재반복해서,

모든 밑작업이 끝났습니다.

결과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탈포기가 업ㅂ어서, 기포때문에 포탑이 좀 망가졌다는 건 여전히 문제로 남지만...(...)



{아카기 (+노획형 병원함 및 강습상륙함 포함)}


● 가장 어려운 작업환경이였던 게....비행갑판-본체 사이의 공간이 너무 많았던데다가, 후방의 한 공간의 틀의 실리콘이 찢어지는 바람에, 막힌 부분은 죽어라 줄질했기 때문에....;ㅅ;

● 비행갑판에 빵꾸가 나긴 했지만, 못써먹을 수준은 아닙니다. 멀쩡한 건 병원함으로, 앞이 빵꾸가 난 건 원판 아카기로 잡아야겠습니다. 어차피 앞에 '시뻘건 표적지'를 그려야 하므로...'ㅅ')

● 그나마 다행인건, 항공갑판의 몰드와, 전방의 격납고층의 몰드는 살아있습니다. 그거마저 밀렸으면 뛰어내려야할판...(...)


{카가 (+노획형 병원함 및 강습상륙함 포함) + 초과물량}


● A&A키트의 대형항모 중 가장 쉬웠던 경우. 원판의 막힌 부분이 하나밖에 없는데다가, 틀이 찢어질 구조가 아니였거등요 'ㅅ')

● 문제는 격납고층 전방의 몰드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원판에서도 막혀있었거든요. 이건 그냥 그런대로 살아야겠습니다 'ㅅ')

잉여물량이 하나 있는데, 이건 어차피 전사지 실험을 해야하니, 선착순(!!)으로 설정반영 해드림ㅇㅇ. 만에하나 넨도롱 사는 분이 제출하면, 그냥 증정함미다ㅇㅇ!!!

● 앞으로 설명할 다른 키트들도 마찬가지지만, 홀수선이 모자라면 퍼티로 때우고, 딱이거나 남으면, 밑에 뻘건색 칠해서 워터마크로 표기해야겠심다.


{소류 / 히류 (+노획형 병원함 및 강습상륙함 포함)}



{히류 (+노획형 병원함 및 강습상륙함 포함)}

※고증상 함교 위치만 바뀐 소류의 동형함이므로, 원판은 소류


● 이건 원판 크기는 작은건 그렇다쳐도, 후방의 비행갑판이 좁아서, 이부분에서 좀 어긋난 게 있심다. 이부분도 퍼티로 때워야겠심다 'ㅅ')

● 사이즈가 사이즈라, 안떠진 포탑을 어케 떠야하는데, 일단, 복원부터 시키고 난 후에, 스컬피 조각으로 어케 해봐야겠심다.

● 딴것도 마찬가지지만, 안떠진 함교는 퍼티로 빛거나, 스컬피로 깎아야겠습니다. 단, 원판이 아닌 노획/마개조형은 함교 확장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 그나저나, 소류+히류 비행갑판 머릿부분에 붙어있는 대공포좌는 어찌한다냐....'ㅅ';;;;;;;;;



{아퀼라 (+노획형 병원함 및 강습상륙함 포함) + 초과물량 + 모 지인 증정용}

<요놈이 잘 안서지는 관계로, 아무놈 둘 잡아서 비교>

● 제일 어긋난 부분이 업ㅂ는 희귀한(?) 케이스. 물론 함교의 관제탑(?) 부분이 문제이긴 한데, 이건 성형이 쉬우니 문제가 안됩니다.

● 이게 홀수선이 들쭉날쭉한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퍼티로 ㄱㄱ

● 미완성 항모라 그런지, (찾아보니) 원판의 도색이 워낙 단순해서, 새로 자료 알아봐서 칠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중임미다 'ㅅ')

● 잉여물량이 하나 있는데, 이건 어차피 전사지 실험을 해야하니, 선착순(!!)으로 설정반영 해드림ㅇㅇ. 만에하나 넨도롱 사는 분이 제출하면, 그냥 증정함미다ㅇㅇ!!!


{그라프 제펠린 (+노획형 병원함 및 강습상륙함 포함) + 모 지인 증정용}



● 이것도 비교적 잘떠진 경우. 물론 소실된 포탑과 관제탑이 있긴 한데, 퍼티나 그린스터프 ㄱㄱ. 

● 형태가 1941년형이라, 비행갑판 끝이 삐죽한데, 상황봐서 1942년형인 넓적형(?)으로 하던지, 아니면 그대로 하던지 해야겠심다.

● 고증상, 그라프 제펠린의 함수부분에 대공포가 있어서, A&A 원판인 저기엔 그냥 뻥~ 뚫어놨던데, 저기에 미친척하고 카쉬탄이나 팔마를 붙여봐야겠...(!!!!)

● 잉여물량 1대는 YPRF사령부의 생일선물용이라, 설정 기다리는중. 


{미군 호위항모 (모 지인 증정용)}

● 원래는 계획에 없던 물건인데, 그라프 제펠린을 뜨기위해 섞어둔 실리콘이 남는 바람에, 급하게 때려박은 물건. 그래서 1대입니다 ㅇㅇ)

● 함교의 안테나(?)가 덜 떠진것만 제외하면 복원가능한 수준. 나중에 실제 사진을 보고나서 써봐야겠심다.








좌우지간, 모든 줄질 및 복제가 끝났습니다.

모자라는 홀수선은 퍼티로 때우고, 덜떠진 포탑이나 함교 구조물은 그린스터프 + 퍼티 조합, 일본군 계통 항모의 비행갑판 지지대는 못쓰는 빗이 있으니, 그걸 부러뜨려서 쓴 후, 퍼티+순접으로 때우면 될겁니다.


뭐, 비록 탈포기를 쓸 수 없는데다가, 일반 전기용량밖에 안되는 간이펌프도 없는지라, 빵꾸가 좀 나긴 했지만, 이정도면 퍼티+스컬피 보수로 쓸 수 있습니다.

일단 오늘은 좀 쉬고, 월요일쯤에 보강공사를 해야겠습니다 'ㅅ')



그나저나, 2주일 전, 저 줄질하다가 잘 안밀려서 면도칼로 말어서 잘 밀리다가 삑사리가 나서 손바닥이 나갔는데, 시험이 끝나고 나서야 아물었더라고요 'ㅅ')

Aㅏ...내 피묻혀가면서 만든 이....;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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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지하연구소의 잡담] 사실 이번 레진작업을 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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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지하연구소의 잡담] 싸구려 저질 대체역사물 디오라마 01 : 항모 나포계획 작업결과 3/6 - 4/4


[1]




[2]



예산절감으로 일반레진보다 15$정도 싼

투명레진을 사서 4개를 복제하고,

하나를 은폐장 발생기를 장착, 병원함이나 강습상륙함에

버프를 주려고 했지만, 뭔가 사기스러워서 냅뒀심다 'ㅅ')



게다가, 레진 주형액 : 경화제의 비율이 일반레진인 1:1이 아니라 1:10이라 선뜻 사기가 꺼려지더라고요 'ㅅ')
투명레진은 나중에 한번 해보고, 테크트리를 추가해봐야겠심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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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想具現化雜談] 블로그설정 : 부대마크 - ???? (각함 예하 항공대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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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비록 망상구현화잡담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블로그 설정 중 역사포스팅에 필요한 연출과 관련된 내용 자문, 그리고 일종의 대체역사물(?)과 관련된 프라모델 작업에 관한 포스팅이므로, 최대한 사실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부대명 및 방패문양 템플릿은 정하지 않아, 올리기만 하지만,

각함 (병원함 / 강습상륙함)의 대잠방어 전문인 건 확실합니다 'ㅅ'!!!



※해당 용가리가 쥐고있는 어뢰는 검색 후, 해당 용어로 이미지 검색 후, 편집이 쉬운 물건으로 아무거나 잡아서 합성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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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想具現化雜談] 아이씨발...병신같은 새끼라도 사진이 제대로 나와야 그린스크린 디오라마를 구상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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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비록 망상구현화잡담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블로그 설정 중 역사포스팅에 필요한 연출과 관련된 내용 자문, 그리고 일종의 대체역사물(?)과 관련된 프라모델 작업에 관한 포스팅이므로, 최대한 사실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좃선총독부 디오라마는 우째 사진이 큰 게 하나도 없어...???

UAV나 드론 녹화 및 유도라면 몰라도, 내부진입 후 소탕전을 하려면

내부사진 중 큰 게 있어야한다고!!!!! (...)


그렇다고 지상군 투입 안하고 UAV로만 지지고볶을 수도 없고...(...)

● 토쏠림을 참고 일본어 한자로 좃선총독부를 찾아봤는데, 실내 사진은 쓸만한데 딱 두어장, 모처에 쓸 좃선총독부 문장은 해상도 괜찮은게 하나 걸리긴 했는데....이거가지고 되려나 'ㅅ';;;???

● 서울에 병력 드랍하고 박살내려면, 좃선총독부 말고, 용산에 있을 쨉스 나부랭이들도 잡아먹어야하는데, 이부분은 사진이 안나오니, 대략적 위치만 잡은 후에 설정으로 잡아야하나 고민중...


물론, 장갑복 키트 미도착 및 복제가 아직 안됬으므로, 현시점에선 미리 자료를 모으는 수준이지만.....'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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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잡담] 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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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 기본이 되는 프라모델 작업을 하루안에 다끝내서

정신이 오락가락한 관계로,

24시간 이후부터 그간 밀린 트로피코4 포스팅부터 재개합니다.


ㅅㅂ...전동공구가 없으니, 아주 사람이 녹아납니다요 ;ㅅ;

[당 정치위원회의 잡담] 어쩌겠냐? 자업자득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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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랑이던 진보 도덕성·정책 선명성 다 추락…지지층 등돌리고 후보 난립


ㆍ진보정치 위기의 원인·대안

2012년 12월, 18대 대선판에 진보정치는 없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공격하며 존재감을 높이고 있지만 진보정치의 본령과는 거리가 있다. 1987년 대선 이후 진보정치가 이처럼 대선판에서, 그리고 현장의 유권자들 사이에서 무시된 적은 없다. 진보정치의 위기라는 말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다.

“깊은 수렁에 빠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이다.” 통합진보당의 한 관계자는 14일 진보정치의 현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대선이라는 가장 큰 선거를 앞두고 난망한 상황을 말한 것이다.

진보정치의 실종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우선 진보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제각각 후보를 낸 것이 상징적이다. 통합진보당에서는 이정희 후보가, 진보정의당에서는 심상정 후보가 출마했고 노동계 후보로 무소속 김소연, 김순자 후보도 나섰다. 당선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가치를 지키고 또 높이려고 나온 것이지만 그 결과는 최소한의 결실도 맺지 못하고 있다. 이정희 후보는 전국을 돌며 열심히 지지를 호소하고 있지만 지지율은 몇 달 동안 1%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출마 이후 쌍용차 노조 농성장, 현대차 비정규직 고공 농성장에 이어 각 지역별 노조 사업장을 찾으며 노동 행보를 꾸준히 했다. 하지만 많은 노조들은 이 후보가 아닌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있다. 최근 이 후보가 대선 TV토론에 나와 얻은 주목도와 인기도 지지율 상승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전통적인 지지층이던 노동계로부터도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들에 비해 존재감 부각마저도 어려운 것이 이번 대선이라는 분석이 진보정치권 내부에서부터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진보정치를 기치로 내세운 통합진보당 이정희, 노동자 출신 무소속 김소연, 청소노동자 출신 무소속 김순자 대선 후보(왼쪽부터)가 대전과 서울 등 현장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정파 간 감정싸움 스스로 확장성 포기
예전에 비해 지역현장의 조직도 약화
“부활 위해선 자성의 길밖에…” 조언

앞서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지난달 26일 후보직을 사퇴하고 문 후보를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진보정치의 가치를 알리는 것보다 정권교체가 급선무라고 본 것이다. 물론 진보의 가치를 담은 정책을 민주당이 받아들이는 이른바 ‘정책연대’는 약속했지만, 당내에서는 후보 사퇴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 일각에서는 제대로 된 야권연대 협상도 못해보고 후보직을 내려놨다며 “진보정당이기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

이들 두 후보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진짜 ‘노동자 후보’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노동계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며 출마한 무소속 김소연, 김순자 후보는 유권자들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진보정치의 실종은 중앙정치 무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진보정당의 본류인 민주노동당 대표에다 지역구(경남 창원 성산) 국회의원 두 차례를 포함해 3선의 경력을 가진 권영길 전 의원이 무소속 후보로 나선 경남지사 선거판에서도 진보정치가 체감하는 현실은 마찬가지다. 권영길 후보의 지지세가 새누리당 홍준표 후보에 비해 힘이 달리는 상황이다. 13일 통합진보당 이병하 후보가 양보하면서 야권 단일후보가 됐어도 이 역시 지지율로 연결되지는 않고 있다. 권 후보가 속해 있던 진보정의당 내부에서는 권 후보가 단일화를 위해 이병하 후보 측에게 ‘사과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반발이 일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4·11 총선에서 비례대표 부정·부실 선거로 당이 쪼개진 뒤 감정의 골이 메워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현장의 조직도 예전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고 있다. 권 후보 선대본부 관계자는 “예전에 비해 지역조직 결합이 약한 편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역 현장조직 약화가 지지율이 답보상태인 이유라는 분석이 나온다.

진보정치가 이렇게 위기일로를 걷고 있는 원인은 결국 스스로에게 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특히 통합진보당의 4·11 총선 비례대표 부정·부실 선거 사건은 진보정당 스스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린 결정적인 사건으로 지적된다. 국회의원을 뽑는 당원 모바일 투표에서의 부정 시비로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으면서 현장이 떨어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기성 정당들보다 도덕성이 우위에 있다고 자평해왔기 때문에 국민이 받은 충격은 더 컸다는 게 내부 평가다.

그 와중에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논란, 북한 핵 문제 등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논평 등은 경직된 사고관까지 보여줬다는 비판이 당 내외에서 나왔다. 당권파, 비당권파, 국민참여당계 등 정파 간 싸움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진보의 재구성을 야심차게 외치며 출발한 정당이 1년도 채 안돼 스스로 분열했다. 진보 스스로 확장성을 포기했다는 지적이다.

과거 진보정당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정책의 선명성이 떨어진 것도 진보정치를 위기로 몰아넣은 원인이다. 경제민주화, 보편적 복지, 탈핵 등 진보정당들의 기존 정책들을 민주당에 이어 새누리당까지 차용해가면서 정책적 입지마저 좁아졌다. 이는 또 전통적 지지층인 노동계의 진보정당 외면으로 이어졌다.

진보정치의 부활은 결국 스스로 자성하는 길밖에 없다는 조언들이 나온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기성 정당들에 실망한 사람들이 제3의 정당으로 지지했던 것이 진보정당인데, 스스로 무너져 이들을 모두 안철수 전 후보에게 뺏겼다”며 “외과적인 수술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비전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패권주의적 당 운영 탈피 등 내부 개혁이 급선무이고, 진보정당 특유의 내부 투쟁 외에 안정적인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책적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좀 더 진보적인 정책 마련에 주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운동부터 생태·탈핵 등 다른 정당에는 없는 정책들을 의제화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노동세력을 다시 껴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답은 결국 진보정당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경향신문] 심상정 “길과 목표는 뻔히 보이는데 진흙탕서 못 빠져나오는 막막함 느껴”


ㆍ진보정의당 심상정 전 대선 후보가 말하는 진보의 위기

진보정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진보진영은 18대 대선에서 그동안 작지만 의미를 인정받았던 존재가치를 보여주지 못했다. ‘노동자·서민 후보’를 자처하는 3명이 출마했지만 이들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유권자는 1% 안팎이다. 진보 의제를 부각할 호기인 대선판에서 오히려 진보정치는 위축돼 있다.

경향신문은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보정의당 심상정 전 대선 후보를 만났다. 그는 정권교체를 위해 지난달 26일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며 후보직을 내려놓았다. 그는 ‘진보의 위기’에 “길과 목표는 뻔히 보이는데,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막막함”을 느끼고, “가위 눌린 것처럼 힘든 상태”라고 했다. 그는 “진보정치의 미래는 결국 노동의 가치를 세우는 것”이라고 봤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 지지를 표명하며 지난달 26일 후보직에서 사퇴한 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이 14일 국회 의원회관 앞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 경제민주화·정치개혁 열망 담는
새로운 정치 주체 형성에 실패…

▲ 진보의 독자적 전망 개척하는 일과
당면한 단일화 요구는 진보의 숙제

▲ 민주노총에 의존했던 시대는 끝나
‘노동 가치’의 정치화에 미래 달려

- 대선이 닷새 남았다. 대선을 어떻게 평가하나.

“아직 평가를 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다. 다만 경제민주화와 정치개혁이 화두가 됐는데 국민의 바람, 시대정신인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나 정치개혁의 분수령을 이루는 선거의 새로운 구도를 짜는 데는 실패한 것 아니겠나. 그보다 민생과 정치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는 선거로 구도가 짜였다. 예를 들면 경제민주화의 경우 그 열망을 담는 새로운 정치 주체와 그동안 재벌경제를 이끌어온 세력의 대결이 돼야 하는데 새로운 정치 주체 형성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개혁도 마찬가지다. 다만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결선투표제를 공론화하고 그 정당성과 필요성이 사회적 공감을 얻었다는 점이 새로운 정치, 민심과 조응할 수 있는 ‘정치 생태계’를 구성하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다.”

- 대선 후보직을 사퇴하고 민주당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현재 한국 선거제도에서는 신생 정당, 진보정당에 단일화 압박은 천형과도 같다. 올 상반기 진보정치가 보여준 모습 때문에 신뢰받는 대안세력으로서의 전략적 목표를 갖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내가 10월20일 출마선언한 이후 인터뷰할 때마다 첫 질문이 ‘왜 출마했나’ ‘언제 사퇴하느냐’였다. 패장이라면 패장인데…(웃음). 민생 현장을 다니면서 새누리당 정권을 벗어나야 한다, 더 이상 연장돼선 안된다는 강력하고 절박한 요구들을 많이 접했다. 새누리당 박근혜(당선이)라는 확실히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 정권교체 가능성을 위해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차 비정규직, 쌍용차 정리해고, 삼성 백혈병 문제 등 노동자와 약자들의 목소리를 모아 사회 개혁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정치적 목표를 포기한 건 아니다.”

- 2010년 6월 경기지사 선거 때도 야권연대를 위해 사퇴했다. 번번이 사퇴하는 것은 진보정치 독자적 세력화와 다른 길이 아닌가.

“진보의 독자적 전망을 개척하는 일과, 최악을 막아야 한다는 당면한 정치적 요구는 진보의 숙제다. 저를 지지했던 분들이나 진보정치 발전을 염원하는 분들에게 낭패감을 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결선투표제를 쟁점으로 만들었다. 정치인과 정당은 국민만 보고 정치할 수 있도록, 국민은 자신의 요구를 대변하는 정당을 마음 편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 통합진보당 이정희, 무소속 김소연·김순자 후보 등 진보 후보들이 출마했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 진보정치는 깊은 골짜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이든 각종 이해집단이든 이번 대선처럼 대규모 동원력을 통해 자기 요구를 관철시키려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공무원노조 4만명, 한 자활단체 8000명 등이 요구를 분출하기 위한 실력 행사를 했다. 사회적 약자들의 절박함, 사회적 격차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이다. 진보정치는 이들을 결집시키는 데 실패했다. 정권교체의 절박성에 비해 변화에 대한 확신은 부족한 분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 진보정치의 앞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그래서 진보정치의 위기라고 하는 것 같다.

“두 거대 정당(새누리당·민주당)의 폐쇄적 구조가 민심과 거리를 벌려오는 과정에서 정치권 내 정책적 공백이 매우 커졌다. 그 빈 공간을 치고 들어가 제도권 내에 안정적인 진보정치 진지를 구축하자는 게 지난해 말 통합진보당을 탄생시킨 배경이었다. 그러나 분열했고, 그동안 진보정치가 쌓아온 도덕성이라는 정치적 자산도 훼손됐다. 아프다. 대선을 치르면서 통합진보당 실패는 (잠시 말을 중단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역사적 실패의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정치 활동가들, 정치인들이 길과 목표는 뻔히 보이는데, 발은 앞으로 가려 하면 할수록 뒤로 밀리는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런 막막함이다. 막막함 속에서 가위 눌린 것처럼 솔직히 힘든 상태다.”

- 지난 4월 19대 총선 당시 울산·창원에서 한 석도 얻지 못했을 때도 진보정치 위기라는 말이 나왔다.

“지금 진보정치 위기를 가장 본질적으로 보여주는 게 총선에서 ‘노동정치 1번지’인 창원과 울산에서 의석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분열 과정으로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 민주노총이 진보정당 배타적 지지를 철회했다. 진보정당이 노동에 기반하지 못하는 상황을 위기의 구조적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동안 진보정치가 민주노총에 의존해 왔던, 민주노총에 노동정치를 위임했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노동을 정치의 방법으로 어떻게 조직화할 수 있느냐가 향후 진보정당의 핵심적 과제가 됐다고 생각한다. 진보정치의 미래는 결국 노동 가치를 세우는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추진해갈 수 있는 주체는 어디 있나. 결국은 노동이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40%를 정치 영역에 불러내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정치가 가능하겠나. 한국 정치개혁, 사회·경제민주화를 위해서도 정치의 방법으로 어떻게 노동 가치를 표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 대선 이후 진보진영 새판짜기가 이뤄질 것인가.

“지금 시점에서 명징한 목표, 당위적인 해법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보의 시즌 2’를 많이 얘기하는데 결국 제대로 된 성찰과 새로운 정치 환경에 대한 이해 속에서 열정과 의지를 모아야 한다. 노동의 정치적 기반을 어떻게 정치의 방법으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진보정치 재건에서 가장 중요하다. 법적·제도적 개혁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과연 독자적인 제3당으로서의 전략, 대안세력으로서의 성장 전략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또 ‘기대의 역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진보정치의 도덕성, 공익적 가치에 대한 헌신성을 복원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정치 주체의 위기이지, 기반의 문제는 아니다. 이 때문에 이번 대선을 통해 제기된 경제민주화, 정치개혁 과제가 상당 기간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의제가 될 것이다. 이에 조응해 가는 과정이 진보정치의 전망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 진보진영이 하나로 묶일 수 있다고 보는가.

“진보정치에서 분화된 세력들의 재결집도 필요하지만, 진보정치가 대변하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 사회적 약자를 통합하면서 진보정치의 활로를 찾아나가야 한다. 진보정의당과 합리적 진보, 합리적 노동은 1차적으로 세력 결집이 이뤄지겠지만, 대안 주체로 성장해가는 전망이 필요하다.”

- 문재인 후보가 국민연대라는 이름으로 온건·합리적 보수도 아우르는 대통합을 얘기한다. 향후 국민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대통합 정당이 추진된다면 같이할 의향이 있는가.

“국민연대는 대선에서 새누리당 집권 연장을 막기 위한 공동선거기구다. 그 이상 의미는 부여하지 않고 있다. 민주당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 선거 때마다 통합을 반복했는데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또다시 수혈을 통해 해결하려는 발상은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강하게 드린다. 기득권 틀 내에서 미봉책이 아니라 민주당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국민 앞에 내놓고 새로운 정당 체제가 구축되도록 ‘정치 생태계’를 짜는 게 필요하다. 그 중심에 국민의 대표성, 정치의 책임성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 개혁에 모든 것을 바치는 노력이 있을 때만 변화가 가능하다. 새로운 정당, 진보정당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민심에 의해 정치개혁이 이뤄지도록 제도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그 안에서 정책·비전을 중심으로 한 연합정치의 새로운 전형들을 만드는 길로 가야 한다.”

- 문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입각을 제의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스러운 문제일 것이다. 주변 분들과 상의해서 결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경향신문] 노동계 “바닥을 친 줄 알았는데, 땅을 파고 있다” 비판·냉소만

ㆍ지도부 공백 등에 사실상 대선 지원 손놔
ㆍ정치세력화 새판짜기 주체·해법도 난망

18대 대선을 앞둔 민주노총은 지도부 공백 상태에서 아무런 대응책도 세우지 못하는 상황이다.

민주노총 안팎에서는 “바닥을 친 줄 알았는데 땅을 파고 있다”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는데 계속 추락하고 있다” “처절하게 싸우는 노동자들의 우산이 되기는커녕 훼방꾼이 되는 형국”이라는 비판과 냉소가 가득하다.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방황하던 민주노총은 내년부터 실시키로 했던 임원 직선제 유예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영훈 전 위원장이 지난달 사퇴하면서 지도부 공백 상태에 빠졌다. 당초 대선 전에 차기 지도부를 선출해 체제를 정비한 후 대선 이후 정국에 대응하려고 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다. 내년 1월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차기 지도부 선출 방안을 논의키로 한 상태다. 대선 전후 정국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사실상 손을 놓은 셈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대선이야 처음부터 준비한 게 없었다 해도 대선 후가 더 문제”라며 “민주노총이 정비가 돼야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낼 기반을 만들 수 있는데 이마저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좋은 정치적 시기에 민주노총이 아무런 역할을 못하는 가운데 비정규직과 해고자들은 철탑 위로 올라가 영하의 추위 속에서 외롭게 싸우며 각개전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18대 대선 방침은 초라하다. 지난달 28일 발표한 ‘민주노총 조합원 3대 대중운동 지침’은 반드시 투표하기,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 투표참여 보장 운동, 투표참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전파 운동 등이다. 이수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과 권영길 전 위원장이 각각 출마한 서울시교육감 선거와 경남도지사 선거에는 민주노총 차원에서 조직적 지원 방침을 정했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냉랭하다.

일선 현장에서는 노동자들만 고군분투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과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고공농성이 장기화되고 있지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쌍용차의 한 해고자는 “민주노총이 대선을 전후해 정치적 해결의 물꼬를 터야 하는데 지도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계획도 세우지 못하며 허송세월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현재의 위기를 ‘민주노조 운동의 고비이자 기회’라고 진단한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민주노총 조합원이 60만명이지만 독자적으로 진보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내부적 준비가 안된 것이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며 “대선 국면에서도 그동안 스스로 비판했던 보수적 양당에 끌려가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새판짜기의 주체와 해법도 잘 보이지 않는다. 김소연 후보가 노동자 후보로 출마해 현장 중심의 대선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조직적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 5년간의 반노동정책으로 위기에 몰린 노동자들이 현 정부에 대한 반발로 정권교체를 위해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움직임도 크다.

김소연 후보 캠프 관계자는 “이정희 후보의 출입을 막은 공장도 꽤 있을 정도로 현장의 정치적 냉소가 크다”며 “투표장에 가지 않겠다는 노동자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첫째 과제는 현장의 냉소를 넘어서는 것이며 이를 토대로 새로운 노동자 정당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니들 기억이 안날것 같아서 가져왔음ㅋ>

그러게, NL병신들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한 것부터가 에러의 시작ㅇㅇ

보수진영이 (유신잔당 및 친일파가 포함된) 수꼴과 개독을 내쳐야 진정한 보수가 되듯이, 진보진영도 NL이나 ㅄ스런 노조 좀 어케 해야 '희망'이 생길 거임ㅇㅇ

진보의 이념 자체가 인권유린-삼대세습 등을 '특수성'으로 하고 앉아있는 NL나부랭이와 맞는 게 있었던가?

옆집의 좌파들 - 그나마 입진보에 패션좌파들이 수두룩한 애들이 어케 망했는지 잘 알아둬야 할거임ㅇㅇ


※그리고 노동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예전에 故이소선 여사께서 일갈하시던 걸 고새 까먹었으니 바닥을 칠 수 밖에. 거거뜰은 바닥이 아니라, 지구 내핵까지 안간 걸 다행으로 알아야함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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