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읽기만 하고 얘기를 안한 에드워드 베르의 히로히토 책자 얘기가 갑자기 생각이 나네....
[파리13구님의 이글루] 하세가와, "히로히토의 역사적 책임은?"
다음은 하세가와 츠요시 Tsuyoshi Hasegawa의 주장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일본인들을 희생자로 자처하게 만들고 있다. 이른바 히로시마 신드롬을 통해서, 일본인들은 아시아에서 전쟁을 도발한 것에 대한 자신들의 죄를 직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희생을 논하기 이전에 일본이 명심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1945년 8월 14일 이전에, 일본 지도자들이 항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가령, 독일 항복, 오키나와 함락, 포츠담선언 발표,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련군 참전 등. 단지 소수의 일본인들만이 일본의 항복을 지연시킨 지도자들을 비난할 뿐이다. 만약 일본이 소련 주재 일본대사 사토 혹은 외무부 차관 마쓰모토 수니치의 주장처럼, 포츠담선언 직후에 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면, 원폭이 투하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소련이 참전하기 이전에 전쟁이 끝날수도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일본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전쟁을 옹호한 자들 뿐만아니라, 스즈키,도고,기조,히로히토를 포함한 평화파들도 전쟁의 파괴성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들의 책임이 미국 대통령 및 소련 독재자의 그것보다 더 무겁다.
전후 일본에서 일왕 히로히토는 일본민족의 구원자로 묘사되었고, 그의 성단으로 전쟁을 끝낼수 있었다는 신화를 유포했다. 실제로, 일왕의 개인적 개입이 없었다면,일본이 항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각과 6인회의는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단지 일왕만이 교착상태를 파괴할 수 있었다. 두번의 어전회의에서의 그의 결심과 8월 9일의 기도와의 면담 이후 종전에 대한 그의 일관된 지지가 일본의 항복을 이끄는데 중요했다.
하지만, 이것을 아사다의 주장처럼, 일왕은 일본 최고의 평화 옹호자였고, 그가 점점 평화에 대한 그의 바람을 강조했고,표현했다는 식으로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는 당시의 많은 다른 지도자들처럼 모스크바의 중재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고, 소련 참전 이전까지는 포츠담 선언이 요구한 무조건 항복의 수용을 거부했다. 소련이 전쟁에 개입한 이후에야, 그는 결국 포츠담선언을 수용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을 뿐이다. 일본에서, 히로히토가 항복을 수용하게된 동기를 질문하는 것은 금기이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의 종전에서의 일왕의 역할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연합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그가 지연시킨 것이 원폭 투하 및 소련의 참전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8월 9일 이후의 히로히토의 노력에 주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전에 대한 그의 동기는 이른바 성단 신화 sacred decision 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귀하지 않았다.
히로히토의 주요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왕실의 보존이었다. 일왕이 이후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발생한 일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았다는 신화를 유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가족의 안전 및 본인의 안전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8월 10일의 운명의 어전 회의에서, 추밀원의장 히라누마 고키는 히로히토가 일본 몰락이라는 비극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공공연하게 발언했다. 일왕의 측근인 고노에와 미국 정부 내부에서 일왕을 제일 옹호한 그루 국무부 차관 조차도, 전쟁이 끝나면 히로히토가 폐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쇼와라는 실제 의미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쇼와시대와 결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 쇼와란 밝은 평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전후 일본에서의 히로히토의 계속된 통치가 일본의 전쟁 유죄를 모호하게 만들었고, 일본이 과거의 현실에 직면하게 만드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태평양전쟁의 종전 역사에서는 진정한 영웅도 없었고, 진정한 악당도 없었고, 단지 인간들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그 인간들의 야심,공포,허영심,분노,편견이 태평양전쟁 종전이라는 인간 드라마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의 본체가 드러난다. 히로히토는, 이 부대의 설립을 명명하는 문서에 천황의 옥새를 눌렀고, 황실 가족 한 사람도, 저자인 나에게 "천황은 옥새를 찍기 전에 모든 문서를 반드시 다 읽습니다. 옥새를 절대로 우편 스탬프처럼 찍지는 않지요."라고 말해 주었다.
731부대의 비용에 관해서도 따져 보아야 한다. 천황은 황궁 경비가 되었건, 군사비가 되었건, 모든 경비에 대해서 인색한 편이였다. 그러나 731부대에 관해서는 예외였다. 이 부대에서 관리관을 지냈던 한 사람은, 예산이 '밑 빠진 독'이였다면서, 1941년 초 연구 경비로 책정되었던 300만엔이 곧 바로 10배로 증가되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 다른 증인도, 731부대가 찬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증거를, 제한이 없던 경비에서 찾고 있었다. 더욱이 히로히토는 이시이와 분야는 달랐지만, 지체높은 과학자로서, 이시이가 빠르게 진급한 사실과, 두번째 훈장인 욱일장(旭日章)의 영예를 누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중략)...베스트셀러 작가이자 731부대에 관한 책 <악마의 포식(惡魔の飽食)>을 써, 우익에게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았던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는 히로히토가 이 부대에 관해서 막연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 근거로, 육군이 고의적으로 어두운 이야기는 천황에게 전달하지 않으려 했다는 이유를 댔다. 천황이 휴머니스트였기 때문에, 만약 그러한 진실을 소상하게 알았더라면, 당장 그 부대의 해체를 명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의 근거에는 항시 히로히토는 인간적이라거나, 평화를 사랑하는 반전주의자였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시모사토, 모리무라 두 사람 다 히로히토의 막료들은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화살을 그들에게 돌렸다. 도조는 분명히 알았고, 고노에와 기도도 아마 알았을 것이고, 육군성 대신과 육군 참모총장을 포함한 고위 장성들은 분먕 알았을 것이라고 가늠했다.
의심과 호기심이 많았던 천황에게 그런 정보를,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비밀로 간직했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설명이 없었다. 히로히토가 731부대의 실험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에드워드 베르의 '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중.
※몇몇 단어가 굉장히 드럽지만, 원문은 원문이니 넘어가시면 됩니다 'ㅅ' <적당한 짤이 업ㅂ어서...근데, 저중 하나는, ~1945가 아니라 present로 가야 정상 아닌가..??>
에드워드 베르가 취재한 왕족의 말마따나, 도장찍는 기계가 아니라,
731창설과정을 보면, 지가 뭘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인간임과 동시에
평화에 관심이 많다는 어린이가 어전회의에서 총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는 걸 감안하면
요새끼가 평화주의자에 비실권자라는 건
마치 히뚜라는 주위의 간신배에게 속아서 아우슈비츠와 2차대전을 저질렀다는 얘기나 마찬가지.
갑자기, 여기서 일베충들의 '비상계엄 확대는 정당한 법절차를 받았으며, 당시 일개 군인에 불과한 전두환에겐 실권이 없었다. 모든 사태를 좌지우지 한 흑막은 최규하이므로, 모든 책임은 최규하에게 물어야 한다.'라는 개드립이 묘하게 겹쳐보이는 건 기분탓입니다 'ㅅ')
※....그러고보니, 이번학기 끝나면, 그 아카이브 포스팅을 계속 이어야하는데, 독일에 비해서 자료들이 별로 업ㅂ는 일본쪽 관련자료가 요즘 계속해서 나오니, 본인은 좋음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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